• 뒤숭숭한 봄날의 넋두리
    [낭만파 농부] 풍물패와 벼농사모임
        2018년 03월 22일 10:0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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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거야말로 호떡집에 불난 꼴이다.

    눈을 뜨니 창밖에 흰 눈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오늘이 춘분이라는데, 매화며 산수유가 활짝 피어 봄노래가 울려 퍼지는 이 계절에 눈이라니. 심지어 오늘 밤에도 눈이 예보돼 있다. 설중매가 아름답다지만 전혀 반갑지가 않다.

    넋 놓고 창밖을 내다보며 시름을 달래고 있는데 찹쌀을 보내달라는 주문이 날아들었다. 그러고 보니 찧어놓은 찹쌀은 바닥이 난 상태. 부랴부랴 방앗간에 전화를 넣었더니 다행히도 정미기계를 돌릴 수 있단다. 남은 찰벼를 모두 찧어 달라 주문을 넣고 숨을 돌리는데.

    갑자기 밖이 떠들썩하다. 통창에 씌울 비가림 천막을 설치하러 왔노라 일꾼들이 들이닥친다. 차일피일 공사를 미루더니 하필 오늘이람. 집안이 금세 북새통이 되었다.

    하긴 그새 너무 조용했던 게지. 봄꽃이 피도록 ‘동안거’ 해제할 생각도 않고 여적 틀어박혀 있었으니 늦잠 자던 곰 천둥번개에 놀란 꼴이랄까. 생각이 여기에 미쳐 그 와중에도 SNS에 ‘춘분대설’ 사진을 올렸더니만 바로 <레디앙> 편집자의 댓글이 달렸다. “3월의 농부일기는 언제쯤…” 지금 쓰고 있는 이걸 깜빡하고 있었네. 참말로 가지가지다.

    오늘 일진이 어수선해져 버렸지만 원래 예정됐던 일은 딱 하나, 저녁에 장구 강습을 받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를 뺀 모두가 급한 일이 생기는 바람에 일정이 취소되고 말았다. 다들 그 빈틈을 노린 건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온다. 그도 그럴 게 오늘이 바로 장구를 쳐온 지 딱 1년째 되는 날이다.

    명색이 ‘벼농사모임 풍물패’로 거창하게 시작했는데 어쩌다보니 나를 막내로 하는 늙다리 셋이 뭉치게 됐다. 게다가 다들 채 한 번 제대로 잡아본 적 없는 신출내기. 어쩔 수 없이 학창시절 풍물깨나 쳤다는 젊은 회원을 사부로 모셨는데 “장구를 익히면 다른 악기는 거저 먹는다”며 장구 강습을 제안했다. 게다가 잔뜩 멋을 부리고 가락이 현란한 전라우도 농악이란다. 배우는 주제에 여부가 있을 수 없다.

    매주 수요일 저녁이면 한 시간 남짓 복판을 두드리고 변죽을 울려댔다. 비록 휴강과 결석이 잦아 생각만큼 실력이 늘지는 않았지만 꾸역꾸역 따라왔다. 어떤 날은 왼손에 물집이 잡히고 살갗이 벗겨져 피가 흐르는 줄도 모르고 궁채를 놀리기도 했다.

    한여름이 아니어도 강습이 끝날 즈음엔 송글송글 땀이 맺히게 마련이라. 뒤풀이, 선술집으로 자리를 옮겨 세상사를 더듬고, 우리들의 시골살이를 뒤적이는 맛은 또 어떻고. 사실 그 맛에 장구를 쳐왔는지도 모르지. 얼마 전부터는 뒤풀이 판이 커져 갈 곳 없는 술꾼들이 부담 없이 낄 수 있는 동네술판으로 확장되기에 이르렀다.

    어쨌거나 그렇게 한 해를 보냈는데도 아직 뉘 앞에서 가락을 선보이기 민망한 수준. 하긴 무슨 ‘장구 명인’을 목표로 시작한 일 아니니 신명을 풀어내는 것으로 그만이지 싶다. 게다가 삶의 현 좌표를 짚어보는 덤도 있으니 금상첨화라 해야 할까.

    그런데 오늘 강습이 무산된 건 무척 아쉬운 일이다. 신명풀이 할 기회가 사라져서도, 1주년을 그냥 지나쳐서도 아니다. 뒤풀이 자리에서 이 풍물패의 모체라 할 벼농사모임의 중요 현안을 의논키로 했었는데 바로 그게 무산됐기 때문이다.

    벼농사모임은 지금 반 년 넘게 맥을 놓고 있는 상태다. 지난여름 의욕적으로 준비했던 백중놀이가 볼품없이 끝나면서 풀려버린 맥이 여적 그대로인 탓이다. 농사를 포기할 순 없는 노릇이니 어찌어찌 일손을 나눠왔지만 농한기로 접어들고서는 아예 손을 놓았다. 장구 강습 하나로 겨우 명맥만 이어왔다고 할 수 있다.

    지난여름의 백중놀이 장구 연습과 뒤풀이

    사실 다 내 탓이다. 경작 면적이 개중 도드라지게 넓어 ‘대농’ 소리를 듣는 내가 맥이 풀렸던 거고, 제 구실을 팽개쳤던 거다. 그 꼬인 심사를 풀어놔봤자 소갈머리 없는 놈이 되고 말 테니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어쨌거나 농사철이 코앞이다. 농사를 작파하지 않을 거라면 품을 나눌 수밖에 없는 것이 ‘포트모 유기농 벼농사’다. 모두가 그걸 안다. 그래서 이심전심 추스르기로 한 것이다. 이 참에 그 동안 ‘무정형’으로 굴러온 조직체계도 제대로 갖추고, 재정과 운영구조도 분명히 하기로 가닥을 잡았다. 물론 올해 농사계획을 짜는 일만 해도 녹록치가 않다.

    이번 주말 전체모임을 열어 이에 대해 의견을 나누기로 했고, 오늘 장구 강습 뒤풀이를 겸해 사전준비를 하기로 했던 거다. 그게 무산됐으니 딱한 노릇일 밖에. 형편이 이러하니 바로 다음날 저녁 준비모임을 열기로 했다. 지금 장구 강습이 문제가 아니다.

    북새통을 이루던 비가림 천막 설치작업은 두어 시간 만에 마무리됐고, 새로 방아 찧은 찹쌀을 트럭으로 실어다가 포장을 한 뒤 택배를 보냈다. 그 틈새를 비집고 뜨문뜨문 써내려온 이 글도 이제 마무리해야 할 시간. 문득 창밖을 내다보니 종일 내리던 비가 진눈깨비로 바뀌어 있다. 참 뒤숭숭한 봄날이다.

    필자소개
    시골농부, 전 민주노총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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