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빠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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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4월 10일 09:3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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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단한 대학시절을 마치고, 대학원에 다닐 무렵 길거리 여기저기서 "오빠"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학교 선배도 "오빠", 애인도 "오빠", 친오빠도 "오빠", 동네 아저씨도 "오빠". 어느 순간 내 주위에 여자들이 남자를 "오빠"로 불렀다.

    나는 이 끈적하고 불분명한 용어가 반갑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짜증까지 났다. ‘오빠’라는 용어는 한국의 근대사에서 수상쩍은 용어로 등장한 적이 있다. 식민지 시기 비루한 아버지를 부정하고 새시대의 주체를 가늠하는 자리에서, 남성은 여성을 누이로 호출하며 자신의 짝패로 만들었다.

    오누이 구조는 사심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가족적 관계를 통해 누이의 내면을 포박하는 또다른 가부장의 기획이다. 표면적으로는 육체성이 제거된 관계이자 수평적인 관계처럼 보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여성의 육체를 규율하고 이를 통해 누이를 위계화하는 호명인 것이다. 이 구조는 부드러운 가부장의 또다른 이름이자 더 강력하게 누이의 저항성을 잠재우는 호명 방식인 셈이다.

    90년대 벽두부터 시작된 여성소설의 약진 속에서 신경숙은 단연 돋보이는 작가였다. 여성적인 문체와 여성성의 이름으로 논의된 그녀의 소설은 ‘여성적인 것’에 대해 다시 묻게 하는 작가였다. 그러나 그 성과에도 불구하고 잃어버린 시간을 구구절절 되뇌이는 이 여성작가의 우울에는 오빠를 떠나보내지 못하는 슬픔이 있었다.

    ‘큰오빠’를 가슴 한 켠에 오롯이 새겨둔 채 이야기되는 ‘여성적인 것’에서는 주변부적 특성이 잔상으로 남아있었다. 비록 그녀가 여공의 ‘외딴방’을 떠올리지만, 실상 그 외딴방이란 자신이 소외시킨 자매애적 공간이기도 했다. 때문에, 나에게 신경숙은 누이의 자리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여성작가로 기억되었다.

    그런데, 며칠전 한 편의 영화를 보면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시골 다방의 창부(전도연이 출연한 <너는 내운명>)가 한 농부에게 처음으로 마음을 열면서 ‘오빠’라고 부를 때는 뭐 그런가 보다 했다. 그리고 이 오빠가 세상에 있을까 말까한 순정을 보여줄 때도 대단한 오빠로맨스가 시작되는가 싶었다.

    근데, 이 오빠가 사랑을 지키는 과정에서 목소리까지 잃고 마는 게 아닌가. 인어공주도 아닌데 오빠가 목소리까지 잃어가며 거세되다니. 현대판 인어공주도 아니고, 자기 몸받쳐 순정을 얻어내는 이 오빠를 보는 순간 당혹스러웠다. 거세까지 감내하는 오빠의 순정이라니, 이것은 좀 다른 문제가 아닌가.

    누이를 위해 주체의 자리까지 한 순간 포기할 수 있다고 선언하는 이 세기의 로맨스는 오누이 관계의 최대 로맨스가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잠시 동안 "너는 내 운명"의 지독한 판타지에 넋이 나갔었다. 더럽혀질 대로 더럽혀진 여자의 몸을 구원하는 오빠! 멋지지 않은가.

    그러나 이 위대한 로맨스 안에는 남자의 목소리 뿐만 아니라 여자의 목소리 또한 없었다.이 시골 창부(에이즈 보균자)는 표면적으로 목소리를 잃지는 않았으나 오빠의 로맨스 안에서 그녀의 말은 오빠의 사랑을 확인하는 기계에 불과했다. 오빠의 위대한 사랑을 완성하기 위한 또다른 타자로서 말이다.

    목소리까지 반납하고 사랑을 완성하는 비루한 ‘오빠’를 보면서, 이 시대의 누이들이 오빠의 테두리를 벗어나기 어렵겠구나 하는 끔찍한 상상을 했다. 오빠들이 목소리까지 헌납해가며 죽자 사자 "너는 내운명"이라고 하니, 이 오빠들을 벗어나는 건 요원한 문제겠구나 하면서 말이다. 지금도 길거리를 오가는 연인들 사이에서 이 시대의 ‘오빠’는 태어나고 있다.

    오빠라는 언어의 감옥 속에 갇힌 연인들. 더욱이 이 누이들이 “오빠 나만 바라봐”하며 실은 자기가 오빠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할 때, 나는 이 시대의 여성들이 ‘오빠의’ 식민지 안에서 갇히는 것 같아 우울해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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