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
    “노동 배제, 내용도 부실”
    하청노동자에 산재 집중···“우리 사회 후진성 드러내는 치명적 약점”
        2018년 03월 21일 10:3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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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가 지난 9일 입법예고한 ‘산업안전보건법 전부개정안’(산안법 개정안)에 대한 학계와 노동계 등의 평가는 좋지 않다. “취지는 좋지만 부실하다”는 지적이 전반적이며, 특히 노동계는 이해당사자인 노동자와 전혀 논의 없이 만들어진 탓에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탁상행정의 결과물”이라는 혹평을 내놨다.

    국회 비정규직차별해소포럼 공동대표들의 주최로 20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 제2소회의실에서 ‘위험의 외주화와 균열일터 산업안전 차별해소-산업안전보건법 전부개정안을 중심으로’ 토론회가 열렸다.

    비정규직차별해소포럼 공동대표는 자유한국당 김성태·장석춘 의원, 더불어민주당 홍영표, 바른미래당 김성식, 정의당 심상정 의원이다.

    위험의 외주화 관련 토론회 모습(사진=유하라)

    하청노동자에 집중되는 산업재해
    “우리 사회 후진성 보여주는 치명적 약점”

    우선 권혁 부산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발제에서 기업들의 비일비재한 산업재해 은폐와 산재가 대부분 하청노동자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최근 부산 해운대 엘시티 건설 현장, 인천 송도 건설 현장 등에서 산재로 사망한 노동자 역시 모두 하청노동자였다.

    권 교수는 “1982년 산안법이 시행된 이후에도 여전히 우리나라의 산업재해 현실은 참혹하다. 더 심각한 것은 산업재해의 통계조차 불명확하다는 것이다. 그만큼 산재 은폐가 많다는 뜻이다. 통계도 믿을 수 없는 나라에서의 법, 제도가 존재한다는 것도 미스매치”라고 지적했다.

    권 교수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산재 사고와 관련해, 정치권이 ‘임기응변식’으로 대응한 탓에 현재의 산안법이 누더기법이 됐다고 비판했다. 예컨대 크레인 작업 현장에서 사고가 나면 크레인 작업에 대한 산업안전 대책만 마련하고 그 외에 유사한 다른 설비 운영과정에서의 문제점을 들여다보지 않는 식이라는 지적이다.

    산재가 하청노동자에게 집중되고 있는 것에 대해 “우리 사회의 건전성에 치명적인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다”며 “위험의 외주화라는 비판이 단순히 산업안전에 국한된 평가가 아니고, 우리 사회의 후진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치명적 약점이라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외주화의 원인 중 하나로 비용절감을 꼽으면서 “하청노동자의 건강을 담보로 (기업이) 비용을 절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적어도 산업안전과 관련해 비용절감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외주화는 오히려 비용을 증대하는 요인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양대노총, 노동자 배제한 개정안에 강력 항의

    노동계는 28년 만에 이뤄지는 전부개정임에도 이해당사자인 노동계의 참여가 배제됐다고 비판했다.

    조기홍 한국노총 산업안전보건연구소 본부장은 “노동부의 이번 개정안은 절차적, 내용적으로 잘못됐다”며 “소수의 전문가와 정부관료가 주도해서 만든 그야말로 밀실에서 이뤄진 산물에 불과하고, 그 결과 포장만 요란할 뿐 내용물은 부실투성이”라면서, 전면 재검토를 촉구했다.

    그는 “형식적인 공청회를 통해 의견을 수렴하는 요식행위로는 누더기 산안법이 될 것이 자명한 일”이라며 “노사, 전문가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해 노동자의 사망사고 및 위험의 외주화로 인한 산재를 예방하기 위한 내용이 충실히 담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명선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실장은 “법안은 적용 대상이나 내용이 협소하거나, 하위 법령이나 위반 시 규제가 없고 현장 노동자 참여가 배제되어 있는 내용이 상당수”라며 “개정안의 내용은 차치하고라도 추진과정에서 당사자인 노동계와의 논의가 거의 없었다. 실제 내용을 담은 개정안은 입법예고 당일에서야 볼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소수 전문가들의 논의 중심으로 진행된 법안은 현장 노동자들의 실질적인 보호에 근본적인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며 “개정안이 더 늦지 않게 현장 노동자의 현실을 반영해 수정 보완 추진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하는 사람’의 보호, 진일보한 개정이지만…

    “산업안전과 보건에 관한 기준을 확립하고 그 책임의 소재를 명확하게 하여 산업재해를 예방하고 쾌적한 작업환경을 조성함으로써 일하는 사람의 안전과 보건을 유지·증진함을 목적으로 한다” 개정안 제1조의 내용이다. 기존 ‘근로자’를 ‘일하는 사람’을 바꿔 법이 보호해야 할 대상을 보다 확대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권 교수도 “큰 방향에서 본다면 진일보한 개정이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 노동계도 이에 대해선 비슷하게 평가하고 있다.

    다만 개념의 모호성이 지적된다. 권 교수는 “일하는 사람의 개념 범위가 지나치게 모호하다”며 “(그러면서도) 이번 개정안에선 기존 개념 규정은 그대로 두고 있다. 즉 근로자 개념만을 개념화하고 있다. 이 대목이 일하는 사람의 개념의 모호성을 더 가중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어 “개인적 소견으로 산안법이 보호의 대상을 반드시 명시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라며 “우리가 지향할 것은 사업장의 안전성이다. 이를 위한 법, 제도라면 굳이 이런 고민을 할 필요 없는 것 아닌가 싶다”고 덧붙였다.

    토론에 참여한 양대노총도 비슷한 의견을 밝혔다.

    최명선 실장은 “근로자의 정의는 유지하고 ‘일하는 사람’에 대한 정의는 없어 사업장의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고 했고, 조기홍 본부장도 “특수고용노동자 등 모든 일하는 사람을 보호하도록 법의 목적을 확대했다는 것에 대해선 진일보한 개정”이라면서도 “법의 목적만 바꿨을 뿐 정의를 바꾸지 않아 여전히 근로자로 한정하고 있다. 일하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선 근로자의 정의를 취업자 또는 종사자 개념으로 변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수고용노동자 산안법 보호…적용 대상 한정적, 실효성도 의문

    이번 개정안에선 특수고용노동자 중 일부 직종에 대해 안전·보건 조치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근거를 마련하고 건강진단 및 안전보건에 관한 교육을 실시하도록 했다.

    이에 대해 권 교수는 “단말기 등을 통한 배달업무 등 일하는 방식이 새롭게 나타고 있는 상황을 감안하면 필요하고 시의적절하다”고 긍정 평가했다. 다만 “근로자와 사용자만큼 전속성이 강하지 않은 이들에 대해 중개사업주가 실질적으로 위험을 제어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실효성에 대한 고민이 남는다”고 지적했다.

    노동계는 적용 대상의 협소함을 문제로 짚었다. 최 실장은 “특수고용 노동자는 현행 산재보험법 ‘주로 하나의 사업’ 규정(산재보험법 시행령 제125조(특수형태근로종사자의 범위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직종에 종사하는 자“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자 부분을 지칭-편집자)을 그대로 차용했다. 현행 규정으로는 ‘보험, 레미콘, 학습지, 퀵 서비스, 택배, 대리운전, 카드, 대출’만 적용된다. 건설기계, 화물 등은 적용되지 않는다”면서 “동일한 현장에서 레미콘 노동자는 산안법을 적용 받고 덤프, 굴삭기, 화물 노동자는 제외되는 것은 타당성도 낮고 산재 예방효과로 귀결되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조 본부장도 “배달종사자에 대한 산재 예방 조치를 강화하겠다고 해놓고 처벌조항이 없어 실효성에 의문이 있다”며, 특고노동자 산재 예방과 관련해선 적용대상이 “매우 제한적”이라며 “모든 특수형태종사자의 산업재해 예방을 위한 방향으로 확대돼야 한다”고 말했다.

    회사 전체의 안전 계획 수립해 ‘원청의 책임성 강화’
    “회사 안전계획엔 노사 모두 참여해야”

    개정안 ‘제13조 대표이사의 안전과 보건에 관한 계획수립’에는 산재에 대한 원청의 책임성을 강화하는 내용이 담겼다. 대표이사 등 실질적인 업무집행 지시자가 매년 회사의 안전과 보건에 관한 계획을 수립해 이사회에 보고하고 승인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권 교수는 “이 규정은 사업주가 앞으로 산업안전에 문외한인 시대는 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라고 해석하면서도 “자칫 보고하는 정도의, 형식적인 것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회사의 안전과 보건에 관한 계획 수립은 단지 경영적 결정사항에 그치지 않는다”며 “노사 모두의 참여하에 결정되고 공유되어야 한다. 계획을 수립하고 이사회에 승인을 얻는 과정에 근로자 측의 참여를 제도적으로 확보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최 실장도 이 조항이 실질적으로 효과를 발휘하려면 “‘안전보건관리 계획’을 산업안전보건위원회 심의 의결 사항으로 추가해야 한다”며 “최소한 노동자가 내용에 대해 알고, 노사가 같이 심의 의결하며 게시 공지 의무가 부여돼야 한다”고 말했다.

    산재 발생의 급박한 위험은 어디까지?
    취지만 좋고 구체적 내용은 허술

    개정안엔 산업재해 발생의 ‘급박한 위험’이 있는 경우 근로자가 중지한 후 대피할 수 있고, 급박한 위험이 있다고 믿을 만한 ‘합리적 이유’가 있을 경우 사업주가 노동자를 불이익 처우를 하면 1년 이하의 징역, 1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형사책임을 부담하도록 했다.

    이와 관련해 권 교수는 “이것만으로는 여전히 부족하다”며 “근로자가 위험을 발견하면 작업을 중지하고 대피해야 하는데 스스로 합리적 이유의 존부를 판단해야 하는데, 결과적으로 근로자들은 스스로 위험 앞에서 판단을 강요받는 결과가 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산재는 예방조치가 가장 중요한데 작업중지가 예방조치로서 기능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 문제를 해소하지 않으면 실효성을 잃을 공산이 크다”고 덧붙였다.

    최 실장은 “작업 대피나 거부가 해고 등 불이익으로 연계되는 현실에서 현행의 불이익 처우에 대한 처벌 조항 수준으로는 개별 노동자가 대피권, 거부권을 행사하기 어렵다”며 “위험 작업에 대한 거부권은 노동자 대표나 명예산업안전감독관에게 부여해야 현장의 실질 작동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조 본부장도 “근로자의 긴급대피를 사업주의 믿을 만한 합리적인 이유로 판단하는 등 사업주의 재량에 맡기고 있는 것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탁상행정의 결과물”이라며 “노동자의 긴급대피는 급박한 위험뿐만 아니라 안전보건조치가 미흡할 경우 당연히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필자소개
    레디앙 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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