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황제, 1인 독재’?
    시진핑과 중국정치 미래
    [중국과 중국인] '연임 제한' 폐지 등
        2018년 03월 20일 10:1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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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인터넷 판에는 마오쩌뚱에게나 붙였던 인민의 지도자(人民领袖)라는 호칭을 붙인 시진핑의 사진이 화면을 장식하고 있다. 불과 5년 전 후진타오가 18차 당대회에서 전권을 넘겨줄 때 “높은 인격과 곧은 절개”(高风亮节)를 지닌 공산당원 모범으로 찬양하던 시진핑이 이제 영구집권을 의심받고 있다.

    “종신제 회귀”, “시황제”, “1인 지배체제 확립” 등의 제목으로 지난 2주간 한국 언론의 관심을 사로잡았던 중국 양회(전국정협과 전국인대)가 각급 정부기구의 책임자 선출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예상대로 국가 주석과 부주석직의 연임제한 규정이 폐지되고, 당과 정부의 감찰기능을 통합한 국가감찰위원회가 설립되었지만, 왕치산 밑에서 기율위 부서기를 담당했던 양샤오두(杨晓渡)가 막강한 권한을 가진 국가감찰위원회 주임에 임명되는 등 예상 밖의 인선도 있었다.

    인민일보 인터넷판의 첫 화면 캡처

    마오쩌뚱에 버금가는 ‘시진핑 사상’을 헌법에 명기하고 국가 주석직의 연임 제한 조항을 폐기하는 등 막강한 권력을 장악한 시진핑과 중국정치의 미래에 대해 검토해 보고자 한다.

    우선 시진핑체제의 권력개편에 앞서 중국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몇 가지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중화인민공화국은 5천년의 봉건역사와 백여 년의 역사를 지닌 공산당이 집권하고 있는 당-국가 정치체제라는 사실이다. 마오쩌뚱을 비롯한 중공의 지도자들은 마르크스나 레닌의 경전보다 중국의 봉건적 역사와 상황에서 더 많은 교훈과 경험을 얻었으며 이러한 역사적 문화적 토대 위에서 자칭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건설에 매진하고 있다. 이러한 중국의 역사적 문화적 상황을 무시하고 단순하게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의 시각 또는 스탈린주의적 이념정당의 잣대로는 중국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어렵다.

    둘째, 정치국 상무위원회 진입의 연령 상한선으로 알려진 7상 8하(만 67세까지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지 못하면 은퇴해야 한다고 당 내부에 암묵적으로 공인된) 규정은 당의 문건으로 명문화된 것이 아니며 따라서 공식성을 갖지 못한다. 7상 8하 규정은 장쩌민이 자신에 비판적이면서 동반 은퇴를 주장하던 당시 전국인대 상무위원장 챠오스(乔石)와 전국정협 주석 리뢰이환(李瑞环)을 은퇴시키기 위해 연령 제한을 만들어 두 사람에게 적용하면서 시작되었다.

    당과 국가의 고위 간부 임기에 대한 명문화된 규정은 2006년 중공중앙판공청에서 공표한 <당과 국가의 영도 간부 임기 규정에 관한 임시 규정(党政领导干部职务任期暂行规定)>으로, 내용을 보면, 각 직무의 임기는 5년(제3조)이고, 동일 직위에서 연속으로 2번의 임기, 즉 10년 재직하면 그 직위에 다시 추천하거나 임명하지 않는다(제6조)고 규정하고 있으며, 동일한 직급에서 15년 재직한 간부는 제2조에서 규정한 동일 직급에 다시 추천 또는 임명하지 않지만, 간부 개인의 상황이나 업무상의 필요에 의해 적절하게 배치한다(제7조)고 규정하고 있다. 제7조의 규정에 해당하는 경우가 딱 한 번 있었는데, 장쩌민 집권기에 총리를 역임했던 리펑(李鹏)이 주인공이다. 그는 1988~1998년 총리로 재임한 후 1998~2003년까지 전국인대 위원장으로 재임했다.

    따라서 7상 8하 규정의 비공식성이나 이러한 간부 임기 규정에 의하면 왕치샨의 국가부주석 임명이 외부에서 보는 것처럼 그렇게 파격적이거나 규정에 어긋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셋째, 한국 언론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격대지정(隔代指定), 즉 차차기 지도부를 현 지도부가 지명할 수 있다는 규정에 대한 해석인데, 혁명 1세대의 일부가 여전히 생존한 상황에서 당 원로들의 정치 개입을 방지하고 젊은 당 지도부의 안정적 정국 운영과 정권이양을 위해 떵샤오핑이 원로들의 동의를 얻어 쟝쩌민의 후임인 후진타오까지 임명했을 뿐이며, 이것을 당의 암묵적 동의 내지 규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다만 최고지도자의 위상에 따라 차차기 지도부 진입에 유력한 후보군을 발굴할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하다.

    시진핑의 권력재편

    시진핑이 예상보다 빨리 강력한 권력을 구축할 수 있었던 요인은, 한때 경쟁 상대였던 혁명 2세대 보시라이(薄熙来)의 몰락과 이로 인한 혁명 2세대 구성원들의 시진핑에 대한 결집된 지지 그리고 후진타오의 당(총서기)-정(국가주석)-군(중앙군사위 주석) 세 분야에서의 전권이양이 결정적이었다. 물론 시진핑 본인의 정치력도 한 몫 했다.

    시진핑이 집권 후 당연직인 당 총서기, 국가 주석, 당과 정부의 중앙군사위 주석 외에 전면심화개혁영도소조, 인터넷안전과 정보화영도소조, 국방개혁과 군대개혁소조 등의 핵심 영도소조 외에도 리커챵 총리가 맡고 있던 중앙재정영도소조의 지휘권까지 넘겨받으면서 관례상 총리가 담당하던 경제 분야에서도 주도권을 잡았고, 그 후부터 2022년 가을로 예정된 중공 20차 당 대회 이후에도 계속해서 집권할 것이란 예측들이 여기저기서 제기되었다.

    시진핑 권력 강화의 정점은 2017년 10월 개최된 19차 당대회였다. 시진핑이 푸지엔(福建), 저쟝(浙江), 샹하이(上海)에서 근무하던 시절의 측근들이 대거 중국 정치권력의 핵심인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에 진입해 25명 정치국원 중 2/3를 차지했다. 이로써 시진핑은 이미 ‘핵심’ 이상의 권력을 확보했다. 사실 중국공산당의 최고 지도자 중, 임기를 모두 마치지 못하고 중도 하차한 화궈펑(华国锋), 후야오방(胡耀邦), 자오즈양(赵紫阳)을 제외하면, ‘핵심’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못했던 사람은 후진타오뿐이다.

    시진핑은 이미 떵샤오핑 못지않은 권력을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단순한 정치권력의 장악력으로만 보자면 떵샤오핑의 그것보다 더한 힘을 가진 것처럼도 보인다. 그 이유가 단순히 당의 강령과 헌법에 이름을 명기하고 마오쩌뚱에 붙였던 ‘사상’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은 아니다. 떵샤오핑은 지도부의 핵심이었지만 천윈(陈云), 리시엔니엔(李先念), 예지엔잉(叶剑英) 등 쟁쟁한 동료들의 견제를 받았고 이들과 타협해야 했다. 그러나 현재 시진핑 주변에는 그를 견제할만한 사람이나 세력이 딱히 보이지 않는다. 장쩌민은 노쇠했고 다수의 그의 측근들은 지난 5년 동안 반부패 운동의 주요 공격 대상이 되어 이미 제거되었고, 후진타오는 개입할 힘도 의지도 없으며, 그가 발탁한 인물들은 시진핑 시대에 고립되거나 주변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공산당의 또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체제를 ‘1인 통치체제’ 또는 ‘1인 독재체제’로 부르는 것은 당 체제에 대한 무지 또는 오해라고 볼 수밖에 없다. 1인 통치나 1인 독재가 될 수도 없다. 마오쩌뚱도 떵샤오핑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지만 당은 여전히 존재한다(언제까지일지는 모르지만). 그것도 그들이 계획하고 원했던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시진핑의 권력이 일정 기간 다른 구성원들에 비해 강하다 하더라도 당의 중앙위원회와 정치국 정치국 상무위원회로 이어지는 구조를 뛰어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중국공산당이 수많은 내외부의 도전과 투쟁을 극복하고 백년에 가깝게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마오쩌뚱, 떵샤오핑 등 어려운 시기마다 당을 진두지휘한 뛰어난 지도자의 역량도 한몫을 했지만, 53명의 당원에서 시작해 9천만에 달하는 당원과 이들을 지도하고 관리하는 당의 조직적인 역량 덕분이다. 지금 현재 다른 지도부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고 시진핑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는 것으로 판단하는 순간 중국공산당과 중국에 대한 오해가 시작될 것이다.

    시진핑의 비대권력이 초래할 수 있는 문제들

    후진타오 역시 당-정-군의 최고 지위를 독점했지만, ‘반장’으로 폄하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무기력을 극복하기 위해 후진타오가 사용했던 방식이 당 운영의 민주화였다. 작동하지 않던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를 매년 정기적으로 개최해 중앙위원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현안 문제에 대한 정치국원들의 집단학습과 토론을 시작했다. 당의 중앙위원(후보위원 포함)급과 원로(정치국원 이상)들을 대상으로 정치국원 및 정치국 상무위원 후보자들에 대한 다면 평가도 실시했다.

    그러나 19차 당대회의 결과를 놓고 보면 과거보다 다양화된 민주적 평가 방식의 한계가 명확히 드러난다. 평가의 내용과 절차가 완전한 공정성을 담보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과거보다 진일보한 평가 방식의 결과가 새로운 고위 지도부 선출에 그다지 반영된 것 같지는 않다. 더 많은 지지를 받은 인물보다는 시진핑과 더 가까운 인물들이 요직을 차지했다.

    과거 정치국원급 고위 지도자들의 이력을 보면 농-공업 중심지역이나 변경지역의 성급 책임자 또는 당이나 국가의 중앙 부처에서 5~10년 정도의 실무경험을 쌓으면서 최소 한두 차례 중앙위원을 역임한 후 정치국에 진입했다. 그러나 지난 19차 당대회를 통해 정치국에 진입한 시진핑 측근들의 사례를 보면 중앙위원에 선출되면서 바로 정치국에 진입했거나 겨우 한 차례 중앙위원을 역임하고 정치국원이 된 경우가 다수다.

    시진핑의 복심으로 불리는 중앙판공청 주임 딩슈에샹(丁薛祥), 당의 이데올로기를 책임지는 중앙선전부장 황쿤밍(黄坤明), 이번 전국 인대를 통해 새로 설립된 막강 권력의 국가감찰위원회 주임 양샤오두(杨晓渡), 베이징시 위원회 서기 차이치(蔡奇) 등등이 모두 지난해 개최된 19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에 선출되면서 바로 정치국에 진입한 경우이다.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민주는 서구의 그것과는 다르다고 항변하면서도, 오히려 능력에 따른 등용(任人唯贤)보다는 사적 관계에 따른 인재등용(任人唯亲)을 답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 대다수는 당과 정부의 중요한 자리에서 요구되는 정책 결정과 업무 집행의 능력에 대한 충분한 검증을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절대 권력자와의 인간관계 및 그에 대한 충성심으로 막중한 자리에 올랐다. 절대자에 충성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정책 결정과 집행이 부메랑이 되어 시진핑에게 돌아올 수 있다.

    지난 겨울 한국 언론에도 보도되었던 베이징 외곽에 거주하는 농민공 거주지역에서 발생한 화재와 이로 인한 전면적인 강제 철거는 거센 반발을 일으켰으며, 베이징의 겨울철 공기오염을 개선하기 위해 주변 동북지역의 탄광을 일거에 폐쇄함으로써 수많은 동북지역의 주민들이 겨울 난방에서 배제되었고, 심지어 일부 초등학교에서는 수업을 교실 밖 교정에서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런 정책들은 지역 주민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고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19차 당대회와 13기 전국 인대에서 드러난 당-정의 구조 재편과 변화가 시진핑 권력구조 개편의 완결판인지 아니면 새로운 시작인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곧바로 당 주석직의 부활 등 2022년 가을로 예정된 20차 당대회 이후에도 시진핑의 집권을 가능케 하는 다양한 각본들이 만들어 지고 있다.

    당 운영의 제도화를 꾀했던 떵샤오핑의 노력이 6.4 천안문 사건 그리고 보시라이의 당 중앙에 대한 도전 등의 영향으로 역주행하고 있다. 과거 당내에 살아 있던 비판적 논쟁의 목소리가 이제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

    장쩌민이 사영기업가, 즉 자본가의 입당을 허용하는 7.1 연설(2001년)을 발표하자 당내 좌파 이론가의 리더인 떵리췬(邓力群), 신화통신사와 인민일보 사장을 역임한 우렁시(吴冷西) 등을 비롯한 원로 당원 14여명이 공개 서신을 보내 장쩌민을 강력하게 비판한 것에 비하면, 이번 국가 주석 및 부주석의 연임조항 폐지에 대해서는 한숨소리만 들릴 뿐 당 내에서 어떤 공개적인 문제제기도 없다는 사실이 중국정치의 암울한 앞날을 예고해 주는 것 같아 씁쓸할 따름이다.

    필자소개
    중국의 현대정치를 전공한 연구자. 한국 진보정당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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