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무는 골목 안, 역사와 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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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4월 08일 11:5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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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월 25일, 신문에 실린 기사 하나가 내 눈을 잡았다.

    “구로 노동자 문학회, 문패 내리던 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 자신이 문학에 그다지 관심이 있다거나 소질이 있는 것도 아니고, 90년대 초반 이후에는 매니아급의 문학 편력을 펼친 것도 아닌데, 휑한 바람이 가슴 한켠을 휩쓸고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18년의 역사, 그러니까 1988년의 첫 시작의 설레임이 끝난 것이다. 마치 수줍게 손 잡던 연애가 파경으로 끝나듯이. 노동자의 글쓰기, 자기고백과 성찰, 현장성 있는 삶글, 이러한 수식들이 여러 문학단체나 행사들을 규정해주던 그 시기는 지났는가?

    글만이 아니다. 이젠 민중가요도 보급되지 않는다. 김호철의 새 노래가 나왔다고, 테잎 하나 사서 복사해서 듣고는 뒷풀이 자리에서 문화의 전도사인양 목청 돋우며 ‘잘난 체’ 하던 그런 장면은 이제는 없다. 오로지 ‘파업가’와 ‘단결투쟁가’, ‘철의 노동자’ 등 몇 곡 외에는 듣지도, 부르지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신곡이 나오지 않느냐? 지금도 많은 문화활동가들은 앨범을 내고, 공연도 하지만 문화를 향유해야 할 동지들은 관심이 없다. 신곡을 풍성하게 담은 민중가요 노래책이 나오지 않은 지도 꽤 오래 된 것 같다. 많은 노동조합들은 집회용 CD를 제작보급하지만 신곡은 절대 없다. “내말 오해하지 말고 들어. 10곡 넣을 때, 한 두곡씩 넣으면 안 되겠니?”

    가슴 한켠이 바람처럼 무너졌다

    진보운동 속에서 문화운동을 고민하고, 급진적인 문화와 사회적 파급력을 고민해도 실천적으로 향유하지 않는 한 찻잔 속에 태풍이 될 수밖에 없다. 네루다의 시, 빅토르 하라의 절절한 노래, 80년대 한국민중운동과 민중문화운동, 그 속에 있던 임진택과 오윤과 홍성담과 김호철. 알고 있으나 지금은 고민되지 않는다. 어디서부터 풀 수 있는지. 모른다.

    “사람들은 날 보고 신세조졌다 한다, 동료들은 날 보고 걱정된다고 한다……노동운동 하고 나서부터 참 삶이 무엇인지 알았네.” 한국 노동운동의 또 다른 중심축이었던 마산창원에서 고승하 선생의 ‘고백’이라는 노래가 불리워지고, 전국적으로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던 시절, 확실히 입소문과 귀동냥의 강력한 파워는 그 시대를 풍성하게 규정하고 있었다. 그 마창에서 나온 세권의 책이 있다. 

       
     
     

    <마산 창원 역사읽기>(불휘, 2003)는 노동자들의 책은 아니다. 오랫동안 마산창원지역을 연구하던 마산창원지역사연구회에 있는 교수 또는 언론인, 전교조 선생 등이 쓴 글을 모은 책이다. 마창에서는 꽤 유명한 홍중조, 김재현, 이은진, 김주완, 김용택, 김건선, 박호철, 유장근, 박진해 선생 등이 쓴 책인데, 필자가 다양한 만큼이나 다양한 주제와 꼭지로 마창 지역의 오래된 역사를 재미있게 소개 하고 있다. 이 책이 나온 것을 처음 안 것은 2월에 마산 전교조 사무실에 갔을 때였다. 사실 필자도 이런 책이 나왔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청동기시대부터 부마항쟁까지 여러 꼭지를 실었고, 이원수나 이은상, 장지연 등의 인물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면서 마창의 역사를 풀기도 한다. 또한 마창 노동자들의 삶과 밀접하거나 밀접했던 공간들, 예를 들어 어시장, <마산문화>, 결핵병원과 월영대, ‘책사랑 도서관’ 등에 대해서도 소개를 하고 있다.

    민간도서관 책사랑은 88년 처음 문을 열었는데 지역 노동자들의 이용에 초점을 맞추었고, 하루 이용자가 200명이 넘었으며 개관 후 6개월 만에 가입자가 1만 명을 넘었다. 서울로 치면 ‘사회과학 서점’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거기에 마을 도서관의 성격을 혼합한 것이다.

    여타 공간과는 다른 독특한 문화와 역사를 간직하는 ‘지역’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가? 새삼 부끄러워지게 만드는 책이다. 마산 오동동에 있는 ‘불휘’라는 지역 출판사가 정성스럽게 편집을 했으나 불행히도 품절된 상태이다. 부산에도 ‘산지니’라는 출판사가 있다. 과연 지금 부산, 울산, 경남에 있던 얼마나 많은 출판사들이 문을 닫았을까 생각해보면 지역의 ‘문화공동화’를 걱정하게 된다.

    얼마나 많은 출판사들이 문을 닫았을까

    <출구>와 <저무는 골목에서 삶을 만나다>는 문학도서이고 비매품이다. 두 권 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옛 문예진흥원)의 지원을 받아 만든 책이다. <출구>는 구로노동자문학회와 함께 노동자문학운동을 해온 ‘마창노동자문학회 참글’의 열두번째 작품집이다.

    구로노동자문학회 관련 신문기사의 부제는 이렇게 되어 있다. “노동자의 삶글 쓰기 어디서 ‘출구’ 찾나?” 막힌 출구를 부여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창노동자문학회 작품집 <출구>라는 제목은 그래서 마음이 아프다. 출구를 못찾은 구로노동자문학회는 결국 자기 손으로 스스로를 정리했고, 마창노동자문학회 참글은 <출구>라는 작품집으로 ‘출구’를 찾고 싶었을까?

    문학회 회장 김건곤 형의 말을 들어보자.

    이번 작품집은 5년 만에 발간되는 것이라 그런지 다른 어느 해 보다 감회가 다른 것 같습니다. 5년 도안 참글이 무엇을 했는지 일일이 기억조차 힘들지만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2006년에는 헤어진 발길들도 하나, 둘 참글로 돌아오는 꿈을 꿔 봅니다.

    힘들게 힘들게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는 마창노동자문학회 참글의 처지가 과연 구로노동자문학회보다 나을까? 자신의 삶만큼이나 문학회 활동이 힘들테고, 그 힘든 삶들이 문학회 활동을 더 힘들어 할테고, 부족함이 채워지지 않으나 삶을 참되게 증명하기 위해 5년 만에 작품집을 낸 그들에게 우리는 사실은 무관심하지 않았나? 5년 동안 공장을 다니며 삶과 문학 두 마리의 토끼를 잡으려 했으나 그 어느 것도 손아귀에 잘 달라붙지 않았을 지도, 그래서 스스로 무기력해졌을 수도 있겠다.

    “문학이 부박해지고 노동자 민중의 통 큰 감동을 상실한 것은, 문학자체가 노동자 민중의 대지를 떠나는 것을 넘어 최소한의 70년대식 친구 의식조차도 버거워 한 그 순간이다”

    결국 삶의 문제이다. 지난 5년보다 나아질 것 같지 않은 우리의 주위를 힘겹게 한 발 한 발 딛는 것이 숙제일테다. 참글이 그랬듯이. 우리에게도. 모두에게도.

    <저무는 골목에서 삶을 만나다>는 2004년 마산창원진해 문학교실을 수강한 사람들을 주축으로 하고, 2005년 ‘마창노동자문학회 참글’에서 주최한 ‘르포문학 실기교실’에서 공부하고 취재하고, 발로 돌아다니면서 만든 책이다. 마창에서 오랫동안 고독하게 노동문학을 움켜쥐고 있는 김하경 선생이 두 행사의 중심에 있었고, 남해에 사는 괴짜(?) 사진작가 오남해 형이 마산, 창원, 진해를 다니면서 구석구석을 필름으로 기록했다. 글은 노동문학을 하는 오도엽 시인과 정윤, 이일균 경남도민일보 기자와 김규석, 신미란, 박미영 등이 썼다.

    노동자의 삶글 쓰기 어디서 ‘출구’ 찾나

    제목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마산창원진해의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노인네들이나 토박이들에게서 그 동네의 애환과 변천, 고민과 부대낌을 담았다. 한때 전국 7대 도시에 들었다던 마산에는 어시장과 원조 아귀찜에 얽힌 사연들, 오동동 나래비골목과 통술집의 주당들의 취중추억이 빼곡하게 숨쉬고 있다.

    마산의 관문인 양덕동에는 지금은 없어진 한일합섬, 이를 대체한 한일타운 아파트, 당시의 눈물나는 설움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한일여실 출신의 노동자들이 있다. 부림시장 옆 도둑놈 골목에는 "인자 이 골목은 끝나 뿟어"라고 말하지만 이 골목에 그대로 있을 수밖에 없고, 그게 마지막 고집인 삶이 있다.

    영원히 사라지는 게 있는가 하면, 사람의 기억은 지웠다가도 되찾을 수 있다. 콘크리트 지우개로 하나씩 지워져 가는 양덕동 골목, 결코 지울 수 없는 것이 보인다.(오도엽, 129쪽)

    그렇게 되살아난 마산창원의 질긴 삶들이 담겨 있는 이 책을 보면서, 부산과 울산에는 얼마나 또 기가막힌 사연들과 변화들, 애환과 진솔한 재미가 흘러넘칠까 궁금해진다. 하지만 그 궁금증은 또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워질 수도 있다. 그래서 안타깝다.

    때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이제 그 얼굴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사진 한 장이라도 찍어둘 걸. 뼈아픈 반성이 회한으로 변했다. 사라져가는 골목과 거리를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없어지기 전에 빨리 기록해야 한다. 바로 지금이다. 기록의 필요성이 절박해졌다.(김하경, 9쪽)

    꼭 마창이라서 이런 걸 할 수 있었던 게 아닐게다. 울산도, 부산도, 거제도 골목 안 이웃들이 있고, 거리엔 노동자들이 있다. 때론 안타까움이 용기를 갖게 만든다. 부디 그 용기가 충천해 돌아봄의 용기로 울산과 부산을 휘감기를 바란다. 역사를 만들고 기록하는 것은 출구를 찾는 것에 다름 아니니까.

    양솔규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사무국장)

    *이 글은 영남노동운동연구소 정책지 <연대와실천> 2006년 4월호(제142호)에 동시게재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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