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통사람들의 관점에서
    600년 걸친 거대한 변화의 이야기
    [책소개] 『유럽민중사』 (윌리엄 A. 펠츠/ 서해문집)
        2018년 03월 10일 03:3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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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은 종교개혁 급진파, 18세기 정치혁명, 조직 노동계급의 발흥 등 아래로부터의 반란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데 더없이 좋은 토양이었다. 20세기에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요란한 등장과 붕괴가 있었고, 냉전 시기의 민중 저항, 1968년의 학생·노동자 저항이 있었다. 이 책은 통상적인 역사 이해의 바탕이 되는 기득권층의 식상하고 상투적인 시각을 쓸어버린다. 그 대신 역사를 다르게 바라볼 기회를 제공한다.

    저자인 윌리엄 A. 펠츠는 역사라는 무대를 활보하는 위인의 행적을 구경꾼처럼 좇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보통의 남성, 여성이야말로 사회 변화의 주역임을 밝힌다.

    이 책을 처음 번역하기로 한 때는 재작년 여름이었다. 아직 촛불의 승리라는 거대한 사건이 일어날 줄은 알지 못한 채 무능하고 시대착오적인 정권에 답답해하던 때였다. 그러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30년만의 대항쟁이 있었고, 탄핵과 조기 대선이 있었으며, 정권 교체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이런 일이 벌어진 2017년은 6월 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의 30주년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종교개혁 500주년이기도 했고 러시아혁명 100주년이기도 했다. 이런 역사의 한 굽이에 《유럽민중사》를 우리말로 옮기는 일은 역자 입장에서도 무척 뜻깊었다.

    저자 펠츠의 필봉을 따라 수백 년 역사를 훑다 보니 15세기 종교개혁과 20세기 초의 러시아혁명은 결코 동떨어진 사건이 아니었고, 이들과 최근 우리 역사 역시 전혀 별개가 아니었다. 종교개혁 급진파의 숨은 역사에도 민중의 함성이 메아리치고 있었고, 러시아혁명의 주인공도 몇몇 혁명가가 아니라 당대의 보통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촛불 물결에서 우리 역시 저들이 염원했던 인간의 세상을 바라며 싸우고 있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 역시 이런 수많은 물길들의 합류를 실감하길 바란다. 유럽 민중과 이 땅의 민중이 결국은 같은 과제, 즉 민중이 참으로 주인 되는 민주주의를 위해 같은 시간 지평에서 함께 싸우고 있음을 확인하길 바란다.

    – ‘옮긴이의 글’ 중에서

    중세 이후 유럽 민중사의 입문서

    보통 ‘민중사’라고 하면, 다음의 세 연구 영역을 포괄한다.

    첫째, 민중투쟁사 또는 민중운동사다. 19세기 말에 마르크스주의 역사관이 처음 등장하고 20세기 들어서 더욱 정치하고 폭넓은 좌파적 관점의 역사 연구들이 축적된 뒤에야 민중투쟁사는 역사 서술의 필수 요소로 부상할 수 있었다.

    둘째는 민중생활사다. 민중사를 민중투쟁사로만 바라보면, 민중생활사의 중요성을 놓치기 쉽다. 하지만 민중사의 연구 과제들 중 더 많은 영역은 실은 민중생활사 범주에 속한다. 마지막은 민중적 관점의 역사 재해석 혹은 재서술이다.

    민중사 연구가 등장하기 전에 이미 인류는 오랫동안 역사를 쓰고 읽어왔다. 대부분이 대다수 민중이 아니라 이들을 지배한 소수 엘리트의 시각에 바탕을 둔 역사 서술이고 해석이었다.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역사였고, 대중이 아니라 지식계층의 역사였으며, 여성이 아니라 남성의 역사였다. 민중사란 이런 지배적 역사 서술을 비판하고 전복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즉, 이제껏 발언권을 지니지 못했던 집단을 끊임없이 새로 무대에 올려 역사 전반을 재구성하는 작업이다.

    이 책은 중세 이후 유럽 민중사의 입문서다. 위 세 영역 중 어느 하나를 깊이 파고들기보다는 이들 영역을 종횡하면서 압축적으로 서술한다. 유럽사를 다룬 책들 가운데 이처럼 철저히 민중사 시각에서 접근하는 저작은 보기 드물다. 대다수 유럽사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계몽주의 이후 유럽 문명이 이룬 승리의 찬가로 끝맺는다. 좀 더 좌파적인 관점을 더한 책들도 2차 대전 후 복지국가 건설로 유럽사가 후퇴할 수 없는 어떤 지점에 도달한 것처럼 기술하곤 한다.

    그러나 이 책은 이런 주류 역사 기술에 훌륭한 해독제 구실을 한다. 종교개혁, 산업혁명, 제1차 세계대전, 전후 경제 부흥기 등 누구나 알 만큼 안다고 생각하는 주요 사건들을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파헤친다. 그간 가려져 있던 등장인물들을 되살리고 그들의 목소리에 힘을 싣는다. 그러다 보면 유럽 여러 나라가 평탄한 진보의 길을 밟으며 복지국가라는 정점에 도달하기는커녕 끊임없는 민중투쟁의 전진과 후퇴 속에 그나마 좀 더 나은 사회로 변화해왔고 지금도 이 과정은 끝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한때 ‘유러피언 드림’이라는 이름으로 선망의 대상이 되던 유럽이 2008년 경제 위기 이후에는 가장 반동적인 신자유주의 지배층과 민중의 대립, 극우 인종주의 대안의 득세 등으로 시끄럽다. 이 책을 보면, 지금의 이 투쟁하는 유럽이 실은 기나긴 유럽 역사에서 오히려 더 익숙한 광경임을 깨닫게 된다. 유럽 중심주의의 신화에 매몰되지 않으면서, 유럽 민중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쉽지 않은 투쟁을 이어가고 있음을 절감하게 된다.

    최신 민중사 연구 성과의 집대성

    또한 이 책은 민중사 연구의 최신 성과들을 집대성했다. 이 책의 밑바탕에는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외치며 새로운 역사 기술의 모범을 보인 20세기 중반 영어권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에릭 홉스봄, 에드워드 파머 톰슨 등)이 있고, 20세기 말의 풍요로운 미시사 연구들이 있다. 이에 더해 최근 괄목할 성과를 내고 있는 것은 여성사 연구다. 이 방면의 역사학자들은 이제껏 주목받지 못했던 여성 관련 주제들에 천착할 뿐만 아니라 페미니즘 시각에서 기존 역사상을 철저히 비판, 재구성한다.

    이 책은 근대 유럽이라는 범위 안에서 이런 연구 성과를 적극 반영한다. 또한 미국, 러시아 양측의 기밀문서 해제 덕분에 1차 사료의 양과 질 자체가 달라지면서 새로운 지평을 맞이한 냉전사의 연구 성과도 생생히 소개한다. 이런 신선한 정보를 접할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이 책은 분명 일독의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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