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트럼프의 무역 전쟁,
    '진실 감추기와 낙인찍기'
    [국제정치 이슈] 역사는 반복되나
        2018년 03월 08일 09:4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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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대 정치외교학과 배병인 교수의 칼럼을 새로 시작한다. 정치와 경제 등 국제 이슈에 대한 칼럼이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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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럼프의 무역 전쟁

    미국 현지 시각으로 3월 1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수입산 철강에 25%, 알루미늄에 10%의 관세를 일률적으로 부과하겠다고 발표했다. 전 세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발표였지만, 그의 스타일에 견줘보면 그 형식은 차라리 점잖은 것이었다. 미 철강업계 최고경영자 간담회에서 발표한 것이기 때문이다. 뒤이어 그의 상징인 트위터 정치가 이어졌다. 역시 현지 시각으로 3월 2일 오전 6시경 트럼트 대통령은 자신의 트위터에 무역적자 상대국과의 무역 전쟁은 좋은(good) 것이고 쉽게 이길 수 있는(easy to win) 것이라는 글을 올렸다. 세 시간여 후에는 ‘호혜세’(reciprocal tax)라는 이름으로 보복관세를 검토할 것이라는 글이 이어졌다. 불과 24시간이 채 안 돼 미국발 무역 전쟁을 공식화한 것이다.

    전 세계적인 반발이 이어진 것은 당연했다. 트럼프가 직접 전쟁의 대상자로 지목한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캐나다와 멕시코, 일본, 호주, 유럽연합은 물론 세계무역기구(WTO)조차 트럼프의 조치를 비난하고 나섰다. 미국 내에서도 폴 크루그먼과 제프리 삭스 등 저명한 경제학자들의 비판이 이어졌고, 심지어 트럼프가 소속된 공화당의 폴 라이언 미 하원의장조차 이번 조치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바야흐로 사면초가인 듯 보이지만 그렇다고 트럼프가 물러설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번 조치가 트럼프 개인의 즉흥적인 결정이 아니라 미 행정부의 공식적인 결정이고, 무엇보다 경제적인 결정이 아니라 정치적인 결정이기 때문이다.

    갤럽 조사에 따르면 트럼프의 국정 지지율은 2017년 1월 취임 당시의 45%가 최고점으로, 2017년 8월에 35%의 최저점을 기록한 이후 현재 약 40%선에서 유지되고 있다. 지미 카터 이후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낮은 지지율이다. 대통령 선거 당시부터 불거진 탈세 논란과 러시아의 선거 개입 스캔들 등 트럼프 자신을 둘러싼 온갖 추문들뿐만 아니라, 집권 1년 동안 오바마케어 무력화와 대규모 감세안 등 노골적으로 ‘부자들’만을 위한 정책을 추진해 왔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오는 11월로 예정된 미국 중간선거에서 현재 공화당이 다수를 점하고 있는 상, 하원 모두 민주당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조심스럽게 제출되고 있기도 하다. 트럼프와 공화당으로서는 선거 승리를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트럼프와 공화당이 처한 정치적 상황과 무역 전쟁 선포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트럼프의 당선 과정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지난 2016년 대통령 선거에서 트럼프의 총 득표수는 힐러리 클린턴에 비해 300만 표가 부족했다. 그럼에도 그가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의 대통령 선거인단 제도, 즉 특정 주에서 유권자 다수의 지지를 얻은 후보가 해당 주에 배당된 선거인단 전체를 독식하고 최종적으로 확보한 선거인단 수를 기준으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미국의 독특한 선거제도 때문이다. 유권자 총 득표수에서 앞서더라도 선거인단 수에서 밀리면 당선될 수 없는 것이다.

    과거 조지 W. 부시가 그랬듯이 트럼프 또한 이 제도의 최대 수혜자였다. 그리고 과거 조지 W. 부시가 그랬듯이 트럼프 또한 ‘러스트 벨트’(rust belt)라 불리는 일리노이, 미시간, 아이오와, 오하이오, 인디애나, 펜실베니아 등 미국 중동부 주에서의 지지를 등에 업고 당선될 수 있었다. 과거 미국의 공업 중심지였던 이 지역은 미국 공업 생산의 퇴조로 쇠락의 길을 걸어 오늘날 ‘러스트 벨트’라 불리게 되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치솟는 실업과 빈곤 문제의 직격탄을 맞은 지역이기도 하다.

    노골적으로 부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트럼프가 이 지역 유권자들의 지지로 당선되었다는 것은 다소 역설적이다. 그 비밀은 2016년 당시 미국의 대선 구도에 있다. 당시 이 지역, 나아가 2008년 위기 이후 미국 노동자들이 직면한 문제에 대해서는 트럼프식 해법과 샌더스식 해법이 제출되어 있었다.

    샌더스가 미국 노동자들이 직면한 실업과 빈곤의 문제가 초국적 기업과 금융자본의 탐욕에 따른 것이므로 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규제와 대규모 증세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면, 트럼프는 문제의 원인을 ‘이방인’들에게 돌렸다. 미국에 유입된 이주 노동자들, 그리고 온갖 ‘불공정한’ 방법으로 미국에 값싼 공산품을 수출하여 미국의 산업 기반을 잠식하는 외국 정부가 그 ‘이방인’들로 지목되었다. 그리고 NAFTA를 포함하여 미국의 역대 정부가 추진한 자유무역협정은 미국 노동자들의 희생을 대가로 이 이방인들에게 터무니없는 혜택을 준 최대의 정책실패로 지목되었다. 불행히도 초국적 기업과 금융자본에 전쟁을 선포한 샌더스는 민주당의 후보로 선출될 수 없었다. 공화당에게 트럼프는 ‘아웃사이더’일지언정 ‘위험인물’은 아니었다. 샌더스가 사라진 대선에서 러스트 벨트 노동자들을 향한 트럼프의 전략은 영향력을 발휘하기에 충분했다. 바야흐로 트럼프에게도 공화당에게도 실업과 빈곤에 허덕이는 러스트 벨트의 노동자들은 중요한 정치적 고비마다 활용할 수 있고 또 활용해야 하는 전략적 자산이 된 것이다.

    진실 감추기와 낙인찍기

    미국 현지 시각으로 3월 2일 오전 트럼프의 트위터에는 “우리의 조국과 노동자들을 지키자”라는 글이 올라와 있었다. 진실과는 무관하게 트럼프의 무역 전쟁은 일자리 전쟁으로 포장된 것이다. 여기에는 미국의 만성적인 무역 적자가 일자리 부족의 원인이라는 단순한 논리가 자리하고 있다. 수입 증대로 국내 산업 기반이 잠식됨에 따라 미국 노동자들이 실업과 빈곤에 시달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견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 미국의 무역 적자와 실업률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는 단적으로 2000년대 이후 미국의 무역 적자는 증가세를 보여 왔지만, 실업률은 오히려 감소세를 보여 왔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미국의 실업률은 2008-2010년 10% 정도까지 치솟았다가 현재 4%선에서 유지되고 있다.

    물론 실업률이 감소했다고 미국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이 향상된 것은 아니다. 노동시장의 극단적 유연성으로 양질의 일자리 대신 불안정한 저임금 일자리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원인은 고삐 풀린 초국적 기업과 금융자본에 있다. 1980년대 레이거노믹스라는 이름으로 신자유주의 정책이 본격화된 이후 미국의 초국적 기업과 금융자본은 노동 규제는 말할 것도 없고 최소한의 사회적 규제로부터도 자유롭게 되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월가를 점령하라’는 운동으로 초국적 기업과 금융자본에 족쇄를 채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지만, 결국 미국 노동자들의 세금으로 형성된 대규모 공적 자금을 투여해서 초국적 기업과 금융자본을 회생시키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회생한 초국적 기업과 금융자본은 과거와 다를 바 없는 직장 폐쇄와 투기적 행태를 반복하고 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트럼프 행정부의 노골적인 지원 정책 덕분에 세금이라는 최소한의 사회적 공헌에도 얽매일 필요가 없어졌다는 점과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도입된 금융규제 덕분에 그나마 노동자들이 접근할 수 있었던 값싼 신용마저도 사라졌다는 점 정도가 될 것이다. 2017년 12월 논란 끝에 의회를 통과한 감세안으로 법인세와 소득세율이 현저하게 감소되면서 초국적 기업과 금융자본은 과거보다도 더 최소한의 사회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금융위기 이후 금융기관의 자기자본비율 확대 조치로 그나마 미국 노동자들이 극단적인 노동 유연성과 사회복지의 부재 속에서 소득을 보전할 수 있었던 값싸고 풍부한 민간 신용마저 사라지게 되었다. 초국적 기업의 직장 폐쇄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불안정한 저임금의 일자리나마 확보한 노동자들조차도 금융기관의 높아진 문턱 앞에서 빈곤의 늪에 빠져 들게 된 것이다.

    초국적 기업과 금융자본에 족쇄를 채우는 것 이외에 미국 노동자들의 실업과 빈곤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없다. 불행히도 이 경로는 트럼프 행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미국의 주류 정당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경로이다. 그러나 근대 민주주의의 탄생으로 노동자들이 유권자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지게 된 이상 어떤 형태로든 노동자들을 정치적으로 포섭하지 않고서는 초국적 기업과 금융자본의 이익을 관철할 수 없다는 것 또한 현실이다.

    지난 대선을 통해 트럼프는 ‘이방인에 대한 낙인찍기’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노동자들을 기만하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수단인지를 증명해 냈다. 이방인에 대한 무역 전쟁을 선포함으로써 트럼프는 다시금 이 전략에 승부수를 띄웠다. 이 전략이 지난 대선 때와 마찬가지로 성공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이제 상대는 힐러리 클린턴이 아니라 전 세계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트럼프와 트럼프 행정부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패전과 혁명의 소용돌이에 빠진 독일에는 한편의 음모론이 떠다녔다. 1차 세계 대전의 패배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독일제국의 군 수뇌부는 독일이 패배한 것은 독일군의 ‘등 뒤에서 칼을 꽂은 자들’ 때문이라고 강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유태인과 공산주의자들이 그 배신자들로 지목되었다. 비겁한 변명에 그쳤을 법한 이 얘기는 히틀러와 나치당을 만나 어느덧 전쟁과 대공황의 폐허 속에서 신음하던 독일 노동자들을 포섭하는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배신자들, 이방인들을 고통의 근원으로 낙인찍음으로써 히틀러와 나치는 당시 전쟁과 빈곤의 원인이 되었던 금융자본에 면죄부를 줄 수 있었고, 독일 노동자들을 다시금 전쟁과 궁핍의 늪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이 뼈아픈 역사적 경험이 2차 대전 이후 자본의 통제가 보편화되고 복지국가가 발전하는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이 모든 것들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가 위기에 처한 지금 100여 년 전 독일에서 풍미했던 음모론이 신자유주의의 첨병인 미국에서 다시금 화려하게 부활했다. 역사의 시계바늘이 똑같은 궤적을 그릴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문제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고, 그것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역사가 반복될 수도 있다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필자소개
    국민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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