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호치민의
‘신문과 잡지 만들기’
우리 운동의 미디어 전략과 내용은?
    2018년 03월 02일 09:5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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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하자면, 나는 베트남 전문가도, 호치민 생애에 대한 전문가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 포스팅에 쓰는 이상으로는 잘 알지 못한다. 단, 베트남 여행 가서 1천 페이지짜리 《호치민 평전》을 읽은 독서인일 뿐이다. 이 글은 윌리엄 J. 듀이커의 《호치민 평전》을 비롯해 위키백과, 인터넷에 공개된 베트남 정부 문서 등을 구글 번역기로 돌려 얻은 정보를 종합한 것이다.<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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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은 ‘신문’이나 ‘잡지’ 등 인쇄 매체를 활용한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그가 처음 신문 제작에 관여한 것은 프랑스에서였다. 서른 남짓이었던 당시 호치민의 이름은 ‘응우옌 아이 쿠옥(Nguyễn Ái Quốc)’이었는데, 이는 그가 1940년경까지 주로 사용했던 활동명이었다.

아직 10대였을 무렵, 그는 베트남에서 프랑스로 떠났다가, 미국에서 몇 년의 힘겨운 생활을 보낸 후, 1917년경(추정) 다시 프랑스로 돌아온 상황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적극적인 재외 독립운동을 시작하는데, 주불 베트남인 조직을 만들어 회합을 하거나, 프랑스공산당 활동가들과 토론하는 것, 국제식민지연맹 조직사업, 또는 식민지 베트남 출신의 동포들을 선전선동 및 교육하고, 프랑스 정부의 대인도차이나 정책에 개입하기 위해 언론들에 투고를 하는 방식이었다.

젊은 시절의 응우옌 아이쿠옥이 프랑스 파리에서 ‘국제식민지연맹’ 활동에 참가한 모습

그러던 그는 마침내 언론을 창간하게 되는데, 1922년 4월 1일자로 창간한 월간 신문 <르 파리아 Le Paria>가 그것이었다. 그는 프랑스 급진파들과 연대해 활동하면서, 언론을 통해 혁명적 대의를 알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달았다. 유럽과 미국을 떠돈 지 11년이 된 1920년, 프랑스공산당에 가입했고, 2년 후인 1922년 1월, ‘천대받는 자들 협회’를 결성하고, 석달 후 “천민”이란 뜻의 <르 파리아>를 창간했다.

이 간행물을 통해 응우옌 아이쿠옥은 프랑스에 거주하는 베트남과 알제리, 모로코 등 식민지 사람들에게 호소하고, 프랑스 제국이 지배하는 식민지 민족들의 대변인 역할을 하고자 했다. (점차 재정 문제로 인해 발행 횟수가 줄어들었다.) 즉, <르 파리아>의 목적은 독자들에게 식민지 사정을 알리고 관점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응우옌 아이쿠옥은 이 신문의 편집인이었고, 가장 많은 글을 쓴 기고자였으며, 삽화를 그리기도 했으며, 배포와 독자 조직화, 배달 등 많은 것을 책임졌다. 한마디로 그는, 전방위적인 선전 활동가였다. 언젠가 그는 <르 파리아>를 만드는 일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한번은 내가 <르 파리아>의 편집인, 회계, 배급자만이 아니라 판매자 역할까지 맡았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출신의 동지들이 기사를 쓰고 기고를 권유하는 일을 도왔지만, 그 외의 다른 모든 일은 내가 도맡다시피 했다.

졸라맨 스타일에 가깝지만 그림 꽤 귀엽게 잘 그린다. 만평이 갖출 요소는 대충 갖춘 셈이다

본문은 프랑스어로 되어있지만, 제호에는 아랍어와 한자가 병기되어 있다

1922년 4월 1일 창간호는 프랑스어(굵은 글씨), 아랍어, 중국어 등 3개 국어를 제호로 넣었다. “북아프리카, 서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 인도차이나”의 민중들의 문제를 알리고, 싸움을 지원하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응우옌 아이쿠옥은 7개의 가명을 사용해가며 사설과 논평, 단편소설, 번역 등 다양한 장르의 기사를 썼다. 주된 내용은 식민지 정부, 특히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제국 식민지 정부가 저지른 만행에 대한 비판이었다.

《호치민 평전》의 저자 윌리엄 J. 듀이커는 이 시절 응우옌 아이쿠옥의 글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그의 글에는 공상적인 면이 없었다. 그는 가장 좋아하던 작가 레프 톨스토이를 읽어나가면서 단순하고 직접적인 글쓰기의 중요성을 배우게 됐다. 그의 글에는 미묘한 면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요점을 전달하기 위해 사실과 숫자를 많이 인용했기 때문에, 독자들의 눈에는 그가 식민지의 삶을 대변하는 걸어 다니는 통계학 사전처럼 보였다. 적을 통계 속에 매장하지 않을 때는 풍자를 이용했다. 그러나 그의 글에는 (…) 루쉰에게서 볼 수 있는 풍자적 아이러니가 없었다. 그는 이론은 무시하고 대신 식민지 체제와 그 수레바퀴 밑에 깔린 사람들이 겪는 고난을 직접 거론하면서 늘 분개한 목소리로 비판했다.”

요컨대 응우옌 아이쿠옥의 글은 단조롭고 생생했다. 듀이커는 호치민의 이런 문체에 “그의 인격과 그가 오랜 세월에 걸쳐 유지한 정치적 영향력의 비밀이 숨어 있다”고 평가한다. 자신의 청중이 노동자나 농민과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자신의 지적인 총명함으로 독자에게 감명을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는 것이다.

프랑스어를 읽지 못하는 베트남 노동자들도 우리 신문을 샀다. 그들이 이 신문을 사고 싶어했던 것은 그것이 반서양적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프랑스 노동자들에게 그 신문을 읽어달라고 했다.

베트남에서 발행된 《프랑스의 호아저씨》에 따르면, <르 파리아>의 부수는 적게는 1000부, 많게는 5000부 정도였다. 반면 듀이커에 따르면 대략 1천 부였다고 한다. 창간호의 독자는 300명 정도였고, 나중에는 200명 정도로 줄었다. 나머지는 식민지연맹 모임이나 상점 등에서 팔았고, 인쇄된 신문의 절반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고국(베트남)으로 전파됐다.

당시 베트남에서 <르 파리아>를 읽는 사람은 즉시 체포될 수도 있었는데, 그럼에도 응우옌 아이쿠옥은 어떻게든 이 신문을 베트남을 비롯한 프랑스 식민지들로 몰래 들여보내려고 했다. 처음에는 애국적인 식민지 선원을 통해 비밀리에 전달되었고, 프랑스 당국이 이를 눈치 챈 후에는, 장난감 시계 속에 집어넣어 보내는 방식을 택했다. 돈이 많이 들긴 했지만 말이다.

응우옌 아이쿠옥이 빈곤한 파리 생활 속에서도 고군분투하며 신문을 만들었지만, <르 파리아>는 1922년 4월부터 1926년 4월까지 4년 간 38회 발행에 그쳤다. 월간이니 48회 정도 나왔어야 하지만 매월 쉬지 않고 발행하지 못할 만큼 재정 상황이 열악했던 모양이다. 1926년 4월에 발행된 <르 파리아>의 마지막 호에는 “프랑스 식민주의에 대한 심판”이라는 글이 실렸다.

아직 <르 파리아>가 발행되고 있던 시기 응우옌 아이쿠옥은 1924년 봄부터 가을까지 소련에 머무르고, 1924년 말에는 중국 광저우로 향한다. 이곳에서 그는 또 다른 잡지 <타인 니엔> 제작에 관여했다. 이 잡지는 1925년 6월 21일 창간돼 1930년 5월 까지 총 208호가 나왔으니 매우 활발한 편이었다. 주간으로 발행됐으며, 배편을 통해 베트남으로 반입됐다. 역시 단순한 문체로 쓰였으며, 한자 구호와 프랑스의 식민지 체제나 허약한 조정을 풍자하는 만평도 실려 있었다. 응우옌 아이쿠옥은 많은 사설을 직접 작성했다. 당시 중국에 있던 베트남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혁명청년회’의 기치인 ‘민족 독립’을 적극적으로 강조했지만, 일부 기사들은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로 인한 세계적 문제를 언급하기도 했다. 혹은 공산주의만이 해방과 사회적 행복을 가져올 수 있다고 우회적으로 암시하기도 했다.

한편 당시 혁명청년회는 다른 잡지도 발행했다. <린 카익 멘 (Linh Kach Menh, 혁명전사)>이라는 격주간지와 <비엣남 티엔퐁(Viet Nam Tien Phong, 베트남선봉)>이라는 월간지가 그것이다. 그밖에도 이 시기 《혁명의 길》이라는 유명한 팜플렛을 작성해 회원들의 교육 자료로 배포하기도 했는데, 이 팜플렛의 내용과 쟁점에 대해서는 《호치민 평전》의 220페이지부터 227페이지에 걸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응우옌 아이쿠옥은 중국 구이린에 체류하던 시기(1930년대 말)에도 잡지 편집에 참여했다. 당시 광서성 지역에서 ‘팔로군'(국공합작 당시 중국공산당 휘하의 군 부대)이 발행했던 <생활시보>라는 이 잡지에서 그는 편집자이자 주요한 기고자로 활동했다.

팔로군(八路军)의 광시좡족자치구 구이린 사무소. 호치민은 이곳에서 이 지역 팔로군의 기관지격인 <생활시보>를 편집했다. 팔로군이란, 중국 국공합작을 거치며 만들어진 ‘국민혁명군 제8로군’을 말한다. 위키백과 설명에 따르면, 1937년 제2차 국공합작 후에 중국 공산당 휘하 독립적 성향을 가진 부대. 신사군과 함께 화베이 지방에서 항일전의 최전선을 담당했었다고 한다. 적극적인 항일전과 민심 도모로 중국공산당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고.

사진: 광시좡족자치구 지역. 베트남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 프랑스식민지 시기 많은 베트남인들이 이곳과 광둥성 등에서 활동했다

1941년 1월에는 <비엣남 독랍 (Viet Nam Doc Lap, 독립 베트남)>을 만들었다. 이 신문은 중국 남부와 베트남 북부 접경 지역에서 배포되던, 당의 지역 신문이었는데, 응우옌 아이쿠옥이 마침내 ‘호치민’으로 이름을 바꾸고 고국인 베트남으로 진입하기 시작했을 때, 동굴 속에서 살며 게릴라 전투에 임하던 그가 가장 적극적으로 하던 활동은 이 신문의 글들을 작성하고 편집하는 일이었다. 이 신문은 동굴 속 돌 등사판으로 인쇄됐으며, 1941년 1월 말부터 석 달간 국경지역의 지지 기반을 넓히기 위한 활동에 활용됐다. 신문은 지역 주민들도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졌고, 귀중한 것이라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명목상이나마 적은 돈을 받고 팔았다.

여름이 되면 <비엣남 독랍>은 대나무 펄프로 만든 원시적인 종이에 등사했는데, 주민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작성됐다. 동시에 호치민은 대부분 문자를 모르는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문자 교육을 했고, 이런 과정에서 베트남공산당과 세계 혁명의 역사에 대한 교육도 함께 진행했다.

꽤 단조로운 구성이다. 쉬운 ‘정세폭로문’과 만평으로 구성된 잡지였던 모양이다. 어쩌면 폰트가 너무 깔끔하다는 점을 볼 때, 이때 수기로 발행했던 걸 깔끔하게 다시 편집한 것일 수도.

그림으로 이루어진 창의적인 페이지. 당시 베트남의 문해율은 매우 낮았다고 한다

호치민의 위와 같은 노력은 그가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내내 지속된 것이었다. 그의 운동은 내내 교육과 선전 사업이 핵심이었고, 문자를 모르는 민중들에게는 적극적으로 문자 교육을 펼쳐 주체적 성장의 밑바탕을 키우려 했다. 그는 이를 통해 조직을 확대했고, 영향력을 강화해 나갔다. 이렇게 얻어진 인적 네트워크망은 베트남 독립과 혁명 운동 과정에 주요한 원동력이 됐다. 애초 소수파에 지나지 않았던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이 민족주의자들을 앞질러 조직력을 키우고, 전체 운동에서의 주도권을 가질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런 꾸준한 노력 역시 보탬이 됐다.

이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이른바 ‘뉴미디어 시대’라 불리는 2018년. 우리는 당시의 인도차이나와 달리 무수한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고, 비교적 언론의 자유도 확보되어 있다. 반면, 날카롭고 중요한 정보는 대체로 별 영향력을 갖지 못하며, 동시에 대중들은 사회운동(좌파)에 대해 실망한 나머지 크게 기대하는 바가 없다. 너무 많은 정보가 쏟아지고 있지만, 사회운동이 전달해야 하는 정보는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만큼이나 접근하기 어렵다. 나아가 대중운동의 주체적 역량은 매우 제한적이다.

사회운동이 현존하는 모순에 날카롭게 도전하고 새로운 대안을 찾기 위해선 정치적 대안의 날카로움도 만들어져야 하고, 동시에 기민하고 능동적인 선전도 필요하다. 둘은 따로 나뉜 것도 아니고, 한꺼번에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명민한 전략 속에서 때로는 단계적이고 조직적으로, 때로는 정세적인 도약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 그래야 사회 변혁을 위한 ‘주체적 조건의 성숙’ 역시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미디어’의 내용과 형식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실천이 필요하고, 호치민의 기민한 매체 기획과 대중성(수용성)에 대한 실천은 우리에게 좋은 자극이 될 수 있다. 70~100여 년 전, 그 열악한 조건에서도 어떻게든 독립된 매체를 만들려고 했고, 그걸 통해서 대중들을 만나고자 했던 치열함과 기민함을 배워야 한다.

필자소개
사회진보연대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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