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들에게도 천국을, 닭죽
    [밥하는 노동의 기록] 나의 동지
        2018년 02월 27일 10:1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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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물건에도 영혼이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감정의 극단에 임신테스트기가 있고, 외로움의 가장 높고 먼 곳에 보이저 1호가 있고 우리 집엔 우직함의 강자, 음식물 처리기가 있다.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우리 집 음식물 처리기를 동지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친구는 12년 전 남편의 회사 창립 기념선물로 우리 집에 온 이래 단 한 시간도 쉬지 않고 나의 곁을 지키는 중이다. 남편은 내 아이들의 생물학적 부친이자 재화를 생산하는 사람이지만, 살림이나 육아를 함께 하기엔 모자람이 많은 사람이다.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시간이 없어서였다. 집에 붙어 있는 시간이 없으니 집안 일이 손에 익숙해질 리가 있나. 그래서 동지나 반려자는커녕 적이 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바닥을 닦는다며 문갑을 끄집어내다 나무 마루에 큰 흠집을 내기도 하고 가스렌지 상판의 말라붙은 찌꺼기를 닦는다며 철 수세미를 사용하거나(우리 집이 아니라 어머님 댁이어서 어머님께 등짝을 맞았다) 발을 닦는 데 쓰는 수건을 걸레로 쓴 적도 있다. 이것은 단순한 실수라고 치자.

    이 집에 산 지가 십 년이 넘는데 아직도 원하는 전등의 스위치를 한 번에 켜지 못하고 항상 그 자리에 있는 물건을 찾으면서 어디 있는지 매번 묻는다. 집에서 쓰는 종량제 봉투가 10리터인지 20리터인지 아직도 헷갈리며 냉장고에서 양념을 찾자면 하세월이다. 내가 외출하고 남편이 밥을 하는 날이면 매번 냉장고에 사흘 분량으로 만들어 놓은 반찬을 싹 다 모아 볶음밥을 한다. 나도 부식계획이라는 것이 있는 사람인데, 남편은 ‘그냥 두면 상할 것 같아 다 때려놓고 볶았지’하며 칭찬을 바란다.

    그가 그릇을 정리한 날이면 나는 다음 날 하루 종일 국자며 종지를 찾는다. 키가 나보다 30cm가까이 큰 남편은 키 큰 위세라도 하는지 그릇을 몽땅 상부장에 올려놓기 때문에 의자를 놓고 올라가 그릇을 내려놓자면 천불이 치밀어 오른다.

    살림이라는 것이 해도 해도 티가 안 나는데 안 하면 바로 티가 나는 것이라 살림을 담당하는 사람은 나름의 시스템을 구축하기 마련이다. 물건과 일을 범주화하여 적절한 시간과 공간을 배분하는 일은 각 가정마다 다르다. ‘설거지 그거 뭐, 빨래 그거 뭐, 청소 그거 뭐, 밥 그거 뭐, 오늘 내가 한다’고 끼어드는 동거인은 그래서 문제다. 그들은 일의 크기를 모른다.

    설거지는 밥하는 노동의 끝날 무렵에 존재한다. 식단을 짜고 장을 보고 식재료 재고를 관리하고 밥을 하고 어떤 그릇에 무엇을 담을지 결정하여 상을 차리고 남은 음식을 적절히 보관한 후에야 사용했던 그릇을 씻는다. 설거지의 끝은 개수대의 물기를 닦고 행주를 삶는 것이지 절대로 식사에 사용했던 그릇을 씻어 엎어놓는 것이 아니다. 빨래는 정해놓은 기준에 따라 세탁물을 분류한 후 오염이 심한 곳은 애벌 빨래 후 세탁기에 넣는다. 세탁이 끝나면 가져다 너는데, 이 때 다림질을 최소화하기 위해 어깨가 빠져라 털어 널거나 착착 펼쳐놓고 밟고 빨래가 마르면 개켜 옷장에 정리한다. 사람이 움직이지 않으면 양말 한 짝도 제 자리를 찾아가는 법이 없다.

    ‘엄마, 나 잘하지?’라며 싱크대를 온통 물천지로 만들어놓는 아이들은 귀엽기라도 하지, ‘나도 열심히 했는데 이렇게 야단치면그냥 안 하고 말래’하는 배우자에게 이제 해 줄 말은 ‘뭘 잘했다 큰 소리야!’밖에 없다. 조금 고쳐 쓴다. 사람이 나빠서가 아니라 의지만 넘쳐나서 그렇다. 뒤집으면 ‘의지만 넘치는 사람은 나쁘다’.

    그렇게 막내딸 시집 보내느니 내가 가는 게 낫다는 속담에 따라 살림까지 혼자 떠맡게 된 지 어언 십오 년째, 나의 가장 소중한 동지였던 음식물 처리기가 수명을 다해가고 있다. 그 친구는 정말 소처럼 일했다.

    의지만 넘쳐 나쁜 남편에게 쓸만한 구석은 각종 비위 상하는 일을 망설임 없이 처리하는 것이라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는 일은 그의 몫이다. 나의 음식물 처리기는 남편이 시간이 나는 주말까지 묵묵히 잔반과 재료를 다듬고 남은 것들을 말려놓는다. 이 친구 덕분에 한 여름에 초파리 걱정 없이 수박과 포도를 사먹었고, 주 초반에도 닭죽을 해먹을 수 있었다. 아이들을 재워놓고 오밤중에 공동 음식물 쓰레기통을 열며 이 시간까지 들어오지 않는 남편에게 화를 내는 일도 없어졌다. 그 누구보다 나의 안녕과 가족의 평안을 지켜준 저 작은 기계를 위한 천국이 반드시 예비되어 있기를. 나는 이미 천국 가기 글러먹은 삶이고 내 남편은 가든지 말든지 상관없지만 꼭 이 친구만은.

    배추김치, 버섯과 브로콜리 볶음, 닭죽

    필자소개
    독자. 밥하면서 십대 아이 둘을 키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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