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못듣고 못보고 말못하는 그가 발견한 좋은세상
        2006년 04월 05일 07:55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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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과서도, ‘세계위인전기’도 철저히 외면했다. 그녀의 신체적 장애만 부각시켰을 뿐 정작 장애를 극복한 그녀가 지키고 설파하고자 했던 이념은 깨끗이 지워버렸다.

    미국에서조차 시각, 청각 장애를 이겨낸 여인으로만 알려져 있는 헬렌 켈러(1880∼1968). 그녀의 삶은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지난 1998년 전기 작가 도로시 허먼의 <헬렌 켈러-A Life>(미다스북스, 2001)가 출간되면서 다시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정열적인 사회주의자로서 헬렌 켈러가 되살아난 것이다.

    위인전 속의 헬렌 켈러와 세상 속의 그녀

       
     ▲ 유년기의 헬렌 켈러

    조금은 낯설은 ‘사회주의자 헬렌 켈러’를 만나기 전에 먼저 기억을 되살려 어렸을 때 읽었던 ‘세계위인전기’ 속의 그녀부터 만나보자.

    1880년 미국 알라바마주 투스쿰비아에서 태어난 헬렌은 원래 여느 아이와 다를 바 없는 건강한 아이였다. 잘 자라던 헬렌은 19개월 되던 1882년 2월 심한 열병을 앓게 된다. 당시 주치의가 며칠 안에 아이가 죽을 것이라고 진단할 정도였다. 열병은 오래 가지 않았지만 이때의 열병으로 헬렌은 시력과 청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듣지도 보지도 못하게 된 헬렌은 촉각과 후각 등으로 세상을 느끼고 몸짓으로 의사표현을 하기 시작했다. 헬렌은 5살이 돼서야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가족들이 자기처럼 몸짓으로 의사표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입으로 말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가족들의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말을 따라할 수도 없었던 헬렌은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물건을 집어던지고 발버둥을 치는 등 점차 난폭해지기 시작했다.

    설리번 선생님을 만나다

    그렇게 7살이 됐을 때 헬렌은, 그 후 50여년 동안 선생님이자, 친구로 지낸 가정교사 앤 설리번을 만나게 된다. 아일랜드 고아출신으로 빈민보호시설에서 자라난 설리번도 5살 때 앓은 결막염으로 시력을 잃은 시각장애인이었다.

    설리번이 알파벳을 헬렌의 손바닥에 써주면서 헬렌은 글을 터득하게 됐다. 시각장애인 특수학교인 보스톤의 퍼킨스 학교와 뉴욕의 라이트-휴머슨 학교에 졸업한 헬렌은 16세의 나이에 래드클리프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헬렌이 1904년 졸업할 무렵 그녀는 독일어를 비롯해 5개의 언어를 구사했다. 그녀는 처음으로 학사 학위를 취득한 시각, 청각 장애인이었다. 이후 1968년 숨을 거두기까지 헬렌은 미국시각장애인협회 일을 하며 국제적인 장애인 복지사업을 펼쳤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헬렌 켈러의 위대한 생애이다. 장애를 극복한 삶은 그 자체만으로 위대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가려져 왔던 헬렌 켈러의 ‘사회주의자로서의 삶’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그녀를 온전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급진적 사회주의자 헬렌 켈러

    헬렌이 사회운동을 접하기 시작한 것은 대학시절 여성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헬렌은 여성의 권리, 특히 참정권 쟁취를 위한 운동을 펼쳤다. 당시는 미국, 영국 등 민주주의의 선진국에서조차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하지 않았을 때였다. 영국은 1919년, 미국은 1920년에 이르러서야 여성참정권을 인정했다.

    헬렌은 1909년 사회당에 가입해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1912년 사회주의 신문 <뉴욕 콜>에 “나는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되었는가”라는 글을 기고했다.

    "몇달 동안 내 이름과 사회주의가 신문에 같이 올라왔다. 한 친구는 내가 야구, 루스벨트 대통령, 뉴욕 경찰 스캔들 기사와 함께 1면을 장식했다고 말해줬다.…악평도 이익이 될 수 있다. 내 활동을 기록하는 신문이 사회주의라는 단어를 기사에 자주 쓴다면 난 기쁘게 받아들일 것이다."

       
     
    ▲ 헬렌 켈러의 손에 존 메이시가 편지의 글귀를 적어주고 있다. 오른쪽이 앤 설리번.
     

    이 글에서 헬렌은 설리번의 추천으로 웰스(H. G. Wells)의 <신세계(New World for Old)>를 읽으면서 사회주의자가 됐다고 고백했다. 설리번은 스스로 사회주의자가 아니라고 밝혔지만 헬렌에게 사회주의를 가르쳐 준 장본인이었다. 설리번과 1905년에 결혼한 사회주의자 존 메이시 역시 헬렌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헬렌은 이후 독일에서 발행되는 점자로 된 사회주의 격월간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을 읽으며 사회주의 사상에 심취했다.

    나를 이용한 건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자본주의 언론

    당시 헬렌은 이미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녀가 사회주의를 지지하고 사회주의자로 활동하는 것에 대해 주류언론은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신문들은 사회주의자들과 ‘볼셰비키’가 헬렌의 명성을 이용하려고 하며, 헬렌은 보지도, 듣지도 못해서 정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고 기사를 썼다.

    이를테면 한 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지난 25년 동안 켈러양의 선생님이자 영원한 동반자는 메이시 부인(설리번)이었다. 메이시 부부는 둘 다 마르크스주의의 열광적인 선전가이며, 이 평생지기에게 의존하고 있는 켈러양이 그런 생각에 동화된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이에 대해 헬렌은 “존 메이시는 열광적인 마르크스주의 선전가일 수 있지만 메이시 부인은 마르크스주의자도, 사회주의자도 아니”라며 “편집자는 사회주의자 또는 다른 지적인 인물이 되기에는 사실에 대한 감각을 충분히 갖지 못했다”고 비꼬았다.

    헬렌은 또 사회주의자들이 주목을 끌기 위해 “불쌍한 헬렌 켈러를 이용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그와 같은 위선적인 동정은 거절한다”면서 “(자신을) 이용한 것은 자본주의 언론”이라고 반박했다.

    돈에 순종하는 편집자들은 사회주의 비방 위해 무슨 짓이든 할 것

       
     
     

    그녀는 자본주의 신문의 이같은 보도에 대해 “신문 뒤의 금권은 사회주의를 반대하며 자신을 먹여 살릴 돈에 순종하는 편집자들은 사회주의를 비방하고 사회주의자들의 영향력을 훼손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헬렌이 사회주의자로 활동할 당시는 미국사회에서 사회주의가 어느 때보다 힘을 발휘하고 있던 때였다. 1912년 대통령선거에서 사회당의 유진 V. 뎁스 후보는 1백만 표 가까이 득표했고 1천명이 넘는 사회주의자들이 공무원으로 일했다.

    또한 노동운동에서도 새로운 힘이 넘쳐나기 시작한 시기였다. 전투적 노동조합인 세계산업노동자동맹(IWW)은 1905년 설립돼 숙련공 중심의 미국노동총연맹(AFL)과는 달리 미숙련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교육시켰다.

    유진 뎁스의 선거운동을 도왔던 헬렌은 “사회당이 점점 정치적 늪에 빠지고 있다”고 비판하며 탈당하고 IWW에 가입했다. <뉴욕 트리뷴>과의 인터뷰에서 헬렌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IWW에 가입한 것은 사회당이 너무 더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회당은 정치적 늪에 빠져들고 있다. 사회당이 정치체제 안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거나 한 자리를 얻으려 애쓰는 한 변혁적 성격을 유지한다는 것은 전적으로는 아니더라도 거의 불가능하다.”

    “진정한 임무는 경제적 기반 위에서 모든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단결시키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자기 자신의 힘으로 자유를 확보해야 한다.”

    “정치적 행동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그녀의 말은 그녀가 왜 생디칼리스트 조직인 IWW에 가입한 이유를 알게 해준다.

    FBI 보고서 “그녀는 공산주의, 파시스트, 나찌다”

    물론 사회주의는 여전히 그녀의 나침반이었다. 참정권 시위에 참여했던 헬렌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전투적 참정권론자입니다. 나는 참정권이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나에게 사회주의는 이상을 실현하는 운동입니다"라고 말했다.

       
     
        ▲ 노년기의 헬렌 켈러
     

    헬렌은 이후 <세계를 뒤흔든 10일>을 쓴 저널리스트 존 리드를 비롯한 당시 미국의 급진적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과 교류했다. 그녀는 미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에 맞서 윌슨 대통령에 항의하고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소비에트의 열성적인 지지자가 됐다.

    헬렌의 이후 활동은 사형제도, 아동노동, 인종차별에 대한 반대로 이어졌다. 1940년대 헬렌은 스페인 공화주의자 석방운동, 매카시즘의 희생양이 된 사회주의자 석방운동에 동참했다.

    1924년부터 1972년까지 무려 48년 동안 미 연방수사국(FBI) 국장으로 일하면서 공산주의자 색출에 앞장섰던 존 에드거 후버에게 헬렌은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연방수사국은 헬렌이 존경받는 장애인 활동가라는 점에서 전면적인 수사를 벌이지는 못했지만 사찰을 진행해 43쪽 분량의 보고서를 작성한 바 있다.

    이 보고서에서 헬렌은 아인슈타인 등과 함께 "공산주의, 파시스트, 나찌 정당 당원"으로 분류돼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헬렌은 1943년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유명인사들과 함께 의회반미활동위원회를 해체하라는 탄원서에 서명했다고 기록돼 있다.

    장애를 극복한 여인으로만 알려졌던 헬렌 켈러. 여성운동가로서, 평화주의자로서 그리고 사회주의자로서 정열적인 삶을 살았던 그녀가 극복하고 했던 것은 자기의 신체장애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각장애를 가진 경제와 청각장애를 가진 사회” 바로 ‘자본주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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