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시간 단축과 3중의 배당
    [에정칼럼] 개인적인 '자노단' 운동을 시작하며
        2018년 02월 23일 01:0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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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노동 관련 논점이 최저임금 인상에서 노동시간 단축으로 옮겨가는 조짐이 보인다. 당정청이 주휴일 노동 금지를 골자로 하는 안을 공개하면서 논쟁이 되고 있는데, 야당에서도 이견이 있을 뿐 아니라 노동계의 동의를 얻기 어려워서 2월 임시국회에서 근로기준법 개정안 처리는 어려울 전망이라 한다.

    민주노총은 2월 22일 낸 성명을 통해, 당정청이 내놓은 안은 주휴일 근무 금지를 위반할 시 벌칙조항을 적용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통상임금이나 노동시간의 1.5배를 급여나 대체휴가를 적용한다는 것인지가 불분명하고 업종과 노동 형태가 다양한 현실에서 그 실효성도 의문스럽다고 비판했다. 많은 쟁점이 있는 노동시간 관련 개정안을 밀실에서 탁상공론으로 만들다보니 부실하다는 것이고 노동계와의 사전 협의가 없었던 것도 문제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확인되는 점은 정부여당도 한국 노동자 평균 노동시간의 전반적인 또는 급격한 단축 보다는 장시간 노동이 특히 심각한 부문과 집단의 문제 해결에 중심을 두고 있다는 것이고, 노동계 역시 원론적으로 노동시간 단축을 주장하고 있지만 지금으로선 근로기준법 59조의 노동시간 특례업종 조항 폐기와 노동시간 단축을 빌미로 하는 근로기준법 개악 저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현재 한국에서 전체 노동자 평균 노동시간의 전반적 또는 급격한 단축을 열심히 주장하는 세력은 보이지 않는다.

    임금 삭감 없는 노동시간 단축 고수할 것인가?

    사실 근래에 한국의 노동운동이 노동시간 단축을 위해 투쟁했던 기억도 많지는 않다. IMF 구제금융 위기 상황에서 실업자운동과 결합하여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가 주장되었지만 정책이라기보다는 구호에 가까웠고, 이후에는 주로 대형마트나 제조업의 심야노동, 특례업종의 장시간 연장노동 등 특정 부문과 사업장의 요구 투쟁으로 전개되었다. 물론 완성차와 연관 사업장들에서 실시되기 시작한 주간2교대제가 노동시간 단축에서 큰 성과로 자리매김될 수 있고 실제로 여러 긍정적 효과를 낳고 있다.

    하지만 자동차산업의 주간2교대제 협상은 예상보다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는데, 노동시간 단축에 대한 기대보다 소득 감소에 대한 우려가 더 크게 작용했던 게 중요한 이유였다. “총액임금 삭감 없는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게 노동 측의 전제였고, 실제로 약간의 잔업을 보태서 임금 수준이 거의 보전되는 것으로 협상은 타결되었다. 이와 결부되는 노조와 회사 모두의 명시적 또는 묵시적 전제는 주간2교대제를 하더라도 하루의 자동차 생산대수는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라인을 개선하고 물량을 더 투입함으로써 생산대수 역시 거의 보전되었다.

    총액임금 삭감 없는 노동시간 단축을 고수함으로써 협상이 오래 걸렸던 것이나 노동시간 단축 자체의 사회적 의미가 희석된 것에 대해 아쉬운 평가를 할 수 있을 것이고, 다른 한편 당시에 원칙을 지킨 것이 지금도 원칙으로 작용한다는 평가도 가능할 것이다. 어쨌든 노동시간 단축은 하더라도 임금 삭감은 안 된다는 것이 지금도 노조운동에게 원칙으로 기능하고 있는 듯하고, 이는 수입 감소와 결부될 수 있는 노동시간 단축 구상은 먼저 꺼내지 않게 만드는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이런 이유로 공세적인 노동시간 단축 이야기를 계속 미뤄두게 된다면 그것이 좋은 일일지는 의문이다.

    다운쉬프트: 노동자와 환경의 기어변속

    <과로하는 미국인>, <쇼핑하기 위해 태어났다>, <제3의 경제학> 등을 쓴 미국의 사회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줄리엣 쇼어는 노동시간 단축이 ‘3중 배당(triple dividend)’, 쉽게 말해서 1석 3조의 효과와 필요성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노동시간 단축의 첫 번째 효용은 실업의 감소와 일자리 창출이다. 그녀가 역사적으로 살펴본 바 노동시장의 균형은 언제나 노동일의 단축을 통해 이루어졌다. 1870년과 1970년 사이에 노동자의 노동시간은 대략 절반으로 줄었으며, 이제는 현재와 미래의 ‘잉여’ 노동을 빨아들여서 GDP를 키우는 성장은 현실적이지도 않다. 물론 노동시간 단축이 일자리 창출과 나누기로 연결되려면 각국의 조건과 제도적 설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점을 덧붙일 수는 있겠다.

    노동시간 단축은 온실가스 배출 감축이라는 두 번째 효용을 가져온다. 쇼어는 더 많이 일하는 나라가 더 많이 오염시킨다고 간단히 그러나 정확하게 지적한다. 이는 더 큰 생산 규모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간에 쫓기는 가계와 사회가 탄소배출을 더 많이 하는 방식으로 살게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빠른 삶과 많은 노동을 도와주는 교통수단, 일회용품, 배달식품, 각종 가전제품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노동시간 단축과 생산-소비 총량 감소를 진지하게 실현하지 않으면서 온실가스 감축 목표와 부문별 할당 계획을 제출하는 것으로 기후변화에 대처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사실 심각한 자기기만이다.

    노동시간 단축의 세 번째 효용은 시간 자체다. 쇼어는 자발적으로 노동시간을 줄임으로써 동시에 임금과 연계된 활동과 수입 수준을 줄이는 생활양식을 추구하는 ‘다운쉬프터(downshifters)’ 운동이 성장하고 있다고 말한다. 다운쉬프트는 자동차를 낮은 기어로 변속하듯 생활을 더 느리고 낮게 바꾼다는 뜻이다. 이들은 수입 대신 확보된 시간으로 더 좋은 신체와 정신의 건강을 찾고 창조적이고 의미 있는 사회 활동 비중을 늘리고자 한다. 처음 접하는 주장도 아니고 우리 주변에 이미 많은 이들이 꿈꾸고 또 실제로 시도하고 있는 삶이기도 하다. 다만 아직은 사회운동이라기보다는 주로 여유 있는 개인이 행할 수 있는 부분적인 ‘체제 탈출’에 가깝겠다.

    쇼어의 3중 배당과 다운쉬프트의 주장이 그럼직해 보이더라도 당장 두어 개의 반론이 나올 성싶다. 하나는 서구 선진국에서나 할 만한 운동 모델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본가들과 싸우는 대신에 노동자들의 몫을 줄이자는 이야기는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되물어보자. 얼마나 GDP가 성장하고 가계 소득이 늘면 다운쉬프트를 시작할 만큼 충분히 여유 있다고 할 것인가? 한국이 선진국이 아니면 어느 나라가 선진국인가? 늘어난 소득만큼 더 많은 소비와 투자를 하게 되는 굴레를 개별 가구든 사회 전체든 언제야 벗어날 수 있는 것인가? 주당 68시간 노동을 하는 한국에서 이런 주장을 안 하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은가?

    그리고,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이윤을 만들어서 그중 노동자의 더 많은 몫을 쟁취하면 자본주의는 극복되거나 그 폐해를 없앨 수 있는 것인가? 그런 더 큰 파이를 만드는 노동에 우리 자신과 이웃은 얼마나 동참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런 더 큰 파이를 만들고 소비하기 위해 배출될 더 많은 온실가스를 어떤 다른 기술과 제품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자발적 노동시간 단축 운동을

    좋은 노동 사회와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진지한 논의를 바란다면 노동시간 단축 없이는 어불성설이다. 고용과 환경에 실효성을 가질 만큼의 노동시간 단축이 임금의 증감과 어떻게 연결될지 노동 패턴을 어떻게 바꿀지에 대한 논의를 회피해서는 노동시간 단축 논의도 가능하지 않다.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까? 일단 올 봄부터는 나의 반상근 계약 근무시간부터 지켜보려 한다. 매주 하루는 사무실 말고 갈 곳이 안 떠올라 집에서 노는 한이 있어서 출근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면 뭔가 좋은 궁리라도 떠오르고 뭘 새로 배워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주 소박한 이 구상에 이미 거창한 이름도 지어놓았다. 자발적 노동시간 단축운동, 줄여서 “자노단”운동이다. 개인적인 자노단 운동을 시작한다.

    필자소개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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