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보다는 ‘더불어' 삶
[낭만파 농부] 매화, 설날, 자유인
    2018년 02월 22일 11:14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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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에도 끄떡 않던 강추위가 우수를 지나며 풀어지는 모양새다. 아직도 최저기온은 영하권을 맴돌지만 한낮엔 따뜻한 햇볕이 내리쬔다.

읍내 목욕탕에 다녀오던 길, 도로 가에 차를 세웠다. SNS 프로그램에 올라온 ‘2~4년 전 추억’이 떠올라서다. 사진 속 매화 꽃망울은 제법 부풀어 있었더랬다. 올해는 어떨지 궁금증이 일었다. 길섶에 줄지어 선 매화나무를 들여다보니 새순은 올라왔지만 꽃망울은 아직 잔뜩 웅크리고 있다. 한눈에 봐도 옛 사진 속 봉오리와 견줄 바가 아니었다.

‘극강 한파’라는 최상급 표현을 불러들인 지난겨울 추위 탓이겠다. 하긴 지들도 다 촉이 있을 텐데 맹추위를 무릅쓰고 망울을 터뜨릴 까닭이 없겠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절기에 맞출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겠고. 그것이 자연이고, 그것이 자연스런 섭리 아니겠나 싶다.

그런데 말이다. 잔뜩 웅크린 매화 꽃망울 모습을 동네 ‘톡방’에 올렸더니만 이내 활짝 핀 매화 사진이 줄줄이 올라오는 게 아닌가. 지난 시절의 영상이 아니라 ‘실화’란다. 이어 “오시면 매화꽃 찻잔에 띄워 드리리다”고 마을 어귀 찻집 쥔장이 속삭인다. 훈훈한 실내로 자리를 옮긴 꽃가지는 저리도 일찍 망울을 터뜨리는 구나. 눈부신 매무새에 한동안 넋이 빠졌다가 문득 깨닫는다.

이 겨울에 활짝 피어난 것이 어디 찻집의 매화뿐이랴. 수막재배라고 해서 지하수를 퍼 올려 냉기를 차단하고, 난방장치로 가온한 비닐집 속의 딸기, 토마토, 수박, 상추… 철없는 과일과 채소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자연스럽진 않으나 굳이 자연 아닙네, 토를 달면 그거 지어낸 농사꾼으로선 몹시 서운할 노릇이겠다.

마을 어귀 전통찻집 ‘만가은’ 실내에 활짝 피어난 매화

지난주가 설이었다. 어머니 홀로 살고 있는 익산 본가로 가서 차례를 지낸다. 지금 사는 집에서 넘어 지면 코 닿을 만큼 가깝다. 물론 들녘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는 시골이고, 거기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자고 나면 보이는 게 논뿐이라 심심하기 이를 데 없어 불만이었다. 이제 산기슭에 터 잡고 사는 까닭도 실은 그 때문이다. 아무튼.

올해 설도 그곳엘 다녀왔다. 아무리 본가라지만 내 집이 아니니 움직임이 껄끄럽다. 틈이라도 나면 고작 할 수 있는 게 텔레비전에 눈을 박는 일이다. 사실 시골 내려와 살면서 집에 TV수상기를 없애 버렸다. 일터에서 돌아오면 맨 먼저 하는 게 대부분 텔레비전 켜는 일이라고 들었다. 아니면 이미 켜져 있거나. 서울 살 때는 내내 대중(정치)활동에 몸담고 있었으니 아무리 ‘바보상자’라 해도 외면할 처지가 아니었더랬다.

이처럼 일삼아 TV를 봐야 할 이유가 없어졌으니 수상기도 필요 없게 된 것이다. 인기를 끄는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 같은 거 아는 게 거의 없다. 그래도 ‘대화에서 소외되는’ 일 따위는 별로 없다. 뜨거운 뉴스나 이슈는 SNS나 인터넷 미디어를 통해 확인한다. 세상과 동떨어져 살고 있지는 않다는 얘기다.

사설이 길어졌다만 본가에 가면 늘 TV 수상기가 켜져 있으니 옛날 버릇도 되살아난다. 보통은 딱 한 가지만 보게 된다. <나는 자연인이다>. 한 회 방송분이 끝나면 곧장 이 프로그램을 재방영하는 다른 채널을 찾아 리모컨을 바삐 놀리는 식이다. ‘40~50대 남성들이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이라고 들었다. 숨 막히는 도회지 삶에 찌든 이들한테는 그것이 ‘로망’일 수 있겠고, 적어도 대리만족 효과는 있을 법하다. 그러는 너는 ‘자연인’ 아니냐?

사실 외진 곳은 아니지만 이미 그 비슷하게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산 속을 누비며 약초를 캐거나 버섯을 따고, 웅덩이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살지는 않는다. 거기 나오는 것처럼 야외화덕에서 천연 식재료로 요리를 해먹고 살지도 않는다. 몸 부리는 걸 좋아하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나는 ‘자연인’들처럼 홀로 살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동류의식’을 느낀다. 다 같이 산업사회의 꽉 짜인 시스템 밖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 말이다. 무슨 일을 하든 정해진 울타리에 넘기가 실상 불가능하고, 층층의 통제가 작동하는 곳에서 벗어났다는 점. 다시는 그 곳에 되돌아갈 마음이 없다는 점. 바로 그 점에서다. ‘일’이라 했을 때, 시스템이나 통제 따위 거리낄 것 없이 내키는 대로 하면 그만이다. 그 결과가 미치는 테두리라 해봤자 나를 크게 벗어나지 않으니 부담이랄 것도 없다.

그런 상태를 나는 ‘자유’라 부르련다. 더러 시민혁명을 거치며 부르주아가 독점하고 있는 그 ‘자유’를 떠올리며 쓴 입맛을 다실 이도 있겠지만, 자연스런 삶에 이보다 더 어울리는 말이 어디 있는가. 그 점에서 이 프로그램은 <자연인>보다는 <자유인>이 제격이지 싶다.

어쨌거나 그들의 삶이 내게는 로망일 수도, 대리만족일 수도 없다. 다만 그들처럼 홀로가 아니고 여전히 숱한 관계망 속에서 조금은 부대끼며 살고 있으니 자유로움이 ‘궁극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한 셈이다. 그러나 나는 구태여 궁극에 이를 뜻이 없다. ‘홀로’보다는 ‘더불어’의 가치가 더 소중한 까닭이다.

필자소개
시골농부, 전 민주노총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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