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연대, 노동계급의 자기 치유 전략
    [노동자 내전·갈등⑧] 추격전의 구조에서 벗어나야
        2018년 02월 21일 11:5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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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자계급 내부의 갈등과 분열에 대한 상황 진단과 해법에 대해 레디앙은 몇 차례의 글을 게재한 바 있다. 이 현실에 대한 잠정적 성격이지만 해결의 방향에 대한 장석준 정의당 정의정책연구소 부소장의 기고 글을 게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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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급한 이상주의자는 ‘내가 설 자리를 주시오. 그러면 내가 이 지구를 움직여보겠소.’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런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이 지구상에 서 있어야 하고 지구가 움직이는 속도에 맞추어 걸어가야 한다.”

    – 치누아 아체베, <더 이상 평안은 없다>, 이소영 옮김, 민음사, 2009. 241쪽.

    고대 그리스 수학자 아르키메데스는 충분히 긴 지렛대와 이를 받칠 수 있는 움직이지 않는 점만 있다면 지구를 들어 올려 보이겠다고 말했다 한다. 여기에서 유래한 말이 ‘아르키메데스의 점’이다. 정말 아르키메데스의 점이 존재한다면 세상을 들었다 놓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위에 인용한 문장에서 나이지리아 소설가 치누아 아체베가 단언하는 것처럼, 그런 점은 지구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아르키메데스 비유 속 주인공처럼은 세상을 들었다 놓을 수 없다.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흔히 ‘과학적’ 사회주의의 시조라 일컬어진다. 두 사람 이전에 이미 한 세대 이상 사회주의 사상-운동의 역사가 전개됐는데도 이들을 창시자 격으로 떠받드는 이유 중에는 변혁의 주인공을 적시했다는 점도 있다. ‘자본’의 자리를 ‘사회’가 대체해야 한다는 선배들의 발언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이들은 ‘사회’를 대표할 구체적인 세력이 ‘노동계급(프롤레타리아트)’이라 지목했다. 물론 1세대 사회주의자들 중에도 노동운동에 주목한 이들이 많았지만, 가장 명쾌하고 단호하게 탈자본주의 전망과 노동계급의 운명을 연결시킨 것은 바로 두 사람이었다.

    분명 이는 마르크스주의의 반대자라 하더라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명제다. 실제로 이후 150년 넘는 세월 동안 지구 위 곳곳에서 벌어진 사회 개혁 언저리에는 항상 노동계급이, 그들의 운동이 버티고 있었다. 19세기-20세기 전환기에 서유럽 곳곳에서 벌어진 정치 총파업을 지워 버린 채 보통선거제도 실현의 역사를 서술할 수는 없다. 1930년대 미국의 산업별 노동조합운동을 이야기하지 않고 뉴딜을 설명할 수도 없다. 산업 자본주의에서 노동계급이 민주주의와 사회 개혁의 가장 일관되고 튼튼한 지지 기반임은 20세기 역사에서 어느 정도 검증된 사실이다.

    하지만 검증은 미완성이기도 하다. 사회주의의 창시자들이 염두에 둔 변혁은 실은 20세기에 실현된 사회 개혁보다 훨씬 진폭이 큰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노동계급이 탈자본주의로까지 나아간 사례는 ‘아직’ 없다. 그리고 그런 사례가 혹은 그 조짐조차 눈에 띄지 않은 지 한참이 된 요즘은 정반대로 현대 자본주의의 변화(지구화, 정보화, 유연화 등등) 때문에 노동계급 자체가 해체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최소한 과거 어느 때보다 ‘계급’이라 할 만한 구심력이 약해졌다는 진단만큼은 다들 동의한다. 노동계급에게 새 세상의 기대를 걸기는커녕 이제는 노동계급의 지속 자체가 논란거리다.

    이런 역사상 유례없는 상황에서 150여 년 전 예언자들이 가리켰던 방향은 이전보다 더 어둡고 모호해 보인다. ‘사회’에서 ‘노동계급’을 식별해냈던 그 발견이 더는 확고한 지반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어쩌면 자본주의 극복을 꿈꿨던 이들에게 노동계급이란 일종의 아르키메데스의 점은 아니었을까. 현실의 노동자들과는 상관없는, 지구 위에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점. 특히 지금 한국 사회에서 이 의문은 더욱 아프고 절박하게 다가온다. 왜냐하면 혁명은 고사하고 개혁에서도 노동 세력이 맨 앞에 서기보다는 뒤를 따르는 모습이 너무나 흔한 광경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한국의 노동계급은 왜? – 몇 가지 가설들

    촛불 항쟁과 조기 대선, 리버럴 정부 출범 이후 노동운동의 양상은 복잡하고 착잡하다. 노동운동이 사회 개혁에 전혀 앞장서지 않는 것은 아니다. 최저임금 인상 등을 예로 들 수 있겠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조합이 정부의 초보적 개혁 조치를 힘겹게 뒤쫓아 가거나 아예 장애물 노릇을 하기도 한다.

    가령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 과정에서 상당수 사업장의 정규직 조합원들이 비정규직 정규직화에 반대하고 나섰다. 정규직 노동자들이 다 그렇지는 않다는 말로 넘어가고 말 사안은 아니다. 몇몇 노동조합 상황이 곧 노동운동의 평균 수준은 아니라는 것도 답이 될 수는 없다. 얼핏 보기에도 상당히 근본적인 문제들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 정규직 조합원들의 경제적 이익과 직접 충돌하지 않는데도 반발이 나타난다는 점이 중요하다. 차라리 현저한 경제적 이해 상충 때문에 갈등이 발생했다면, 고민이 깊어질 이유가 없을지 모른다. 경제적 이익의 같고 다름으로 계급을 나누는 통상의 시각을 단지 노동계급 내부 분파들로 확대 적용하면 될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이런 경제주의적 계급관에 잘 들어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한국 노동계급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를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최근 전개된 상황을 바탕으로 새롭게 들여다보거나 강조해야 할 대목은 무엇일까? 한국 노동계급의 특성을 해명하고 노동운동의 과제를 재검토하려면 무엇을 새삼 주목해야 할까? 나는 세 가지 정도를 짚고 싶다.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의 모습

    ① 노동계급의 역사적 전통의 부족과 단절

    우선 한국 노동계급에게 과연 역사적 전통이라 할 만한 것이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 변혁의 담지자를 논한다면서 ‘전통’ 이야기를 꺼내는 게 어색해 보일 수도 있다. 노동계급은 자본에 맞서면서 미래 사회의 요소들을 발명해내는, 자본보다 더 미래를 사는 존재들이 아닌가! 그러나 노동운동의 역사가 깊은 나라들을 보면, 그 ‘미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부분이 ‘과거 속 미래(지나간 미래)’로 구성돼 있음을 알 수 있다. 노동계급이 만들어가는 삶에도 온갖 재료들은 필요하고, 그 재료 중에는 물론 제조일자가 아주 오래된 것들도 있게 마련이다.

    노동조합 형식만 놓고 봐도 그렇다. 산업별 노동조합은 참으로 오랫동안 한국 노동운동이 기업별 노동조합에서 탈피해 도달하려 한 목표다. 하지만 아직도 ‘제대로 된’ 산업별 노동조합이 무엇인지는 감이 잘 오지 않는다. 아무리 뜯어봐도 여기에는 역사적 이유가 있다. 산업별 노동조합은 직업별 노동조합을 극복하고 등장한 조직 형식이기도 하지만, 또한 직업별 노동조합이 낳은 조직 형태이기도 하다. 그리고 직업별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이전 단계의 길드(동업조합)와 탯줄로 연결된다. 우리에게는 없는 과거다.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전 자본주의 시기에 한반도는 전 세계에서 유례없는 지식인-관료 지배 사회였다. 이 점에서는 중국도 상대가 되지 못한다. 근세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상인이나 노동자의 직업적 전통이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했지만, 조선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다. 이후에 자본주의로 전환하더라도 노동계급이 성장하기에 결코 유리하지 않은 토양이었다 하겠다.

    여기에서 문제는 단지 독자적인 노동자 전통이 부족했다는 점만이 아니다. 그 빈 공간을 다른 집단의 세계관과 윤리가 채웠다는 점이 중요하다. 농민, 노동자, 상인 모두 양반, 즉 지식인-관료의 세계관과 윤리를 받아들였다. 양반과 자신들을 구별해서 정체성과 내부 연대를 강화하기보다는 오히려 양반을 배우고 따라함으로써 양반과 구별할 수 없는 존재가 되려 했다. 다들 족보를 만들었고,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으며, 시험 봐서 관료가 되는 것이 출세의 전형이 됐다.

    그러고 나서 몇 세기가 지난 뒤인 오늘날, 한국의 일부 대기업이나 공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정규직화에 반대하는 주된 논거 중에는 입사 시험이 있다. 시험을 거쳐 정규직으로 들어온 자신들과 달리 비정규직이 시험도 안 보고 정규직이 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는 주장이다. 여기에는 평등과 공평, 기회의 평등과 결과의 평등 같은 쟁점도 있지만, ‘시험’이라는 문제도 있다. 노동자 쪽에서 이렇게 ‘시험’과 자기 정체성을 결합시키는 사례는 다른 나라에는 별로 없다. 이들은 실은 노동자라기보다는 지식인-관료처럼 생각하며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숙명론은 가장 천박한 역사관 중 하나다. 21세기 한국 사회의 특성을 모두 19세기 조선 상황으로 소급해 설명할 수는 없다. 그 사이에 두 세기의 시간이 있고, 이 정도 시간이면 한 사회의 기본 성격이 여러 차례 뒤바뀌고도 남는다. 노동계급이 전통을 새로 만들어가기에 부족한 시간은 아니었다.

    그러나 잘 알다시피 한국 근현대사는 이런 노력을 매번 비극적으로 단절시켰다. 일제 강점기의 직업별 노동조합도, 해방 공간의 산업별 노동조합도 후세대로 이어지지 못한 채 역사책 속의 기록으로만 남았다. 그래서 2018년 현재조차 한국의 노동자들은 역사적 뿌리와 기억이 박탈된 빈곤한 존재다. 세상에서 가장 지식인 독재가 심했던 나라가 처음으로 자본주의 세계와 맞닥뜨렸던 그때와 마찬가지로, 헐벗은 채 말이다.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학원의 모습

    ② 민주노동조합운동, 계급의식이 아니라 추격의식을 다지다

    다음으로 곱씹어봐야 할 것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과 이후 민주노동조합운동의 공과다. 1987년이 사실상 한국 노동운동의 ‘출발 원년’이었다는 것은 진보 사회과학계의 상식이 돼 있다. 분단과 군부 독재라는 척박한 토양에도 불구하고 이때부터 계급의식과 조직을 갖춘 노동계급이 비로소 성장했다는 게 표준적인 서사다. 그러나 이제는 아프게 돌아봐야 한다. 과연 그랬는가? 지난 30년간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이 자라났는가?

    자본에 맞선 ‘적대’를 중심으로 계급의식을 바라본다면, 성장했다고 할 수 있다. 민주노동조합이 들어선 사업장이라면, 적어도 한 차례 이상은 노사 간 격전을 치렀을 것이다. 특히 1980년대 말-1990년대 초의 파업 물결 속에서 전개된 전투들은 그 시절 전 세계에서 가장 격렬한 계급투쟁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이 사측과 담합해 실리를 챙긴다는 비판을 받는 요즘도 노동자들은 여전히 ‘우리 대 저들’의 틀로 사측을 바라본다. 이것을 계급의식 외에 다른 말로 부를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게 계급의식의 전부는 아니다. ‘적대’만큼이나 ‘연대’도 계급의식의 중요한 구성 요소다. “누가 적인가”는 계급의식의 반만 규정할 뿐이다. 나머지 절반은 “동지가 누구냐”다. 동지란 단순히 적대의 순간에 내 편에 선 이들만은 아니다. 나와 내 동지들이 이루는 세계가 먼저 있기에 이 세계와 저들이 적대하는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동지가 누구냐”는 물음은 “당신이 지키고 쟁취하며 삶의 의미를 확인하려는 세계는 무엇이냐”는 물음이기도 하다. 이것은 세계관의 영역이고 윤리의 무대다.

    한국의 노동자들은 이런 측면의 계급의식도 발전시켜왔던가? 적어도 지금까지 결과만 놓고 평가한다면, 답은 긍정적이지 않다. 민주노동조합은 자기 사업장의 자본에 전투적으로 맞섰지만, 투쟁의 경계는 사업장 울타리를 좀처럼 넘어서지 못했고 쟁점은 기업별 임금 인상에 집중됐다. 사측을 ‘저들’이라 인식하기는 했지만, ‘우리’란 임금 인상에 공동 이해를 지닌 직장 동료에 그쳤다.

    나는 다른 글(“중산층 추격 사회, 진보의 상식을 깨다”, <프레시안> 2017년 8월 1일)에서 임금 인상 투쟁이 키운 것은 계급의식이 아니라 추격의식이라 진단한 바 있다. 한국 자본주의는 선진국 추격 전략을 통해 급속한 산업화를 이뤘다. 그런데 정부와 기업만 추격 전략을 꾀한 게 아니라 대중들 사이에도 추격의 심리가 뿌리 내렸다. 경제 성장 속도보다 더 빠른 속도로 부와 권력을 늘려 가는 부유층을 따라 잡으려는 전 사회적 추격전이 벌어졌다. 추격전의 주된 행위자는 처음에는 중산층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는 중산층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새로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대기업, 공기업 노동자들이 추격전에 합류했다. 성공적인 임금 인상 투쟁이 이들의 추격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그러자 이들 중 일부는 중산층이 추격 수단으로 요긴하게 써먹은 입시 교육 경쟁, 부동산 투자(투기) 경쟁에 뛰어들기도 했다. 이들을 지배한 것은 한 마디로 추격의 심리, 즉 추격의식이었다. 상위계급과 자신을 구별하면서 ‘우리’를 확장하는 계급의식이 아니라 하위계급과 자신을 구별하면서 ‘저들’과 가까워지려는 추격의식이었다.

    새로 등장한 노동운동의 이념은 대체로 마르크스주의의 경제주의적 판본(혹은 도식화)이었다. 그런데 이 이념은 대기업, 공기업 노동조합이 추격전의 수단이 되는 걸 막는 데는 무력했다. 이 도식에 따르면, 계급의식은 자본에 맞선 대결 경험을 거듭할수록 발전하게 마련이었다. 투쟁 쟁점이 늘 임금 인상 주위를 맴돌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이런 경제주의적 계급투쟁관의 기대와는 달리 조합원들은 임금 인상 투쟁에 성공할수록 자본주의적 경제주의, 즉 경제적-분파적 이익 추구에 매몰됐다. 그들에게 노동조합은 중간층에 진입하는 집단적 추격 수단이 됐다.

    ③ 헬조선의 기본 구도 – ‘추격당하는 자들의 연대’ 대 ‘추격하는 자들의 경쟁’

    과거를 위와 같이 진단한다면, 지금 한국 노동계급이 처한 상황은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민주화와 동시에 신자유주의 지구화의 직접적 영향권 아래 들면서 현재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비정규직 증가, 부동산 거품, 소득-자산 양극화 등등)가 심화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맞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걸로 그림이 다 완성되는 것 같지는 않다. 지구 자본주의의 전반적 변화가 중요한 배경이기는 하지만 한국 자본주의에 유독 심각하게 나타나는 양상들이 있기 때문이다.

    비정규직 문제만 해도 그렇다. 기본적으로는 노동시장 분단에서 비롯된 것이고, 다른 나라에서도 자본-국가가 노동 유연화를 추진하면 비슷한 추세가 나타난다. 하지만 그렇다고 노동시장 정책을 전환하기만 하면 다 해결될 문제냐면, 그건 아닌 것 같다. 다른 나라는 몰라도 한국은 아니다. 서두에 언급한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시도에서 이런 점이 드러난다. 비정규직 정규직화에 반발하는 일부 정규직의 시선 이면에는 단순히 지난 몇 년간의 잘못된 노동 정책만 있지는 않다. 훨씬 더 뿌리 깊은 분열과 경쟁이 도사리고 있다.

    나의 가설은 이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한국 자본주의의 특징인 추격사회 양상이 결합된 결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추격하는 자들의 전면적 경쟁이 노동 유연화와 맞물리면서 다른 어느 나라보다 정규직-비정규직 분열과 격차가 심각한 사회가 됐다. 이 상황에서 정규직은 비정규직을 노동 정책이나 기업별 임단협의 피해자로 보지 않는다. 하루빨리 피해에서 구제돼 동렬에 서야 할 동료로 보지 않는다. 지금은 뒤쳐져 있지만 정규직 전환 같은 계기를 통해 앞으로 추격전에서 치열하게 맞붙을지 모를 잠재 경쟁자로 바라본다.

    노동계급이라는 틀로 바라본다면 마땅히 연대해야 할 집단들이 서로 전면 경쟁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추격사회 말기의 또 다른 양상과 결합돼 현재 한국 사회의 기본 구도를 이룬다. 그것은 이미 추격전에서 승리한 자들, 즉 추격당하는 자들의 연대다. 이들은 자본 축적과 자산 형성, 권력 기반 구축에서 남들보다 먼저 도달한 지위를 완강히 지키면서 동시에 바로 그 지위로부터 엄청난 지대 수익을 챙긴다. 물론 신자유주의 금융화가 이런 지대 수탈에 최적의 기반을 만들어주었다. 추격당하는 자들의 연대는 곧 지대수탈자, 불로소득자들의 동맹이다.

    말하자면 현재 한국 사회는 두 층으로 확연히 나뉜다. 피라미드의 맨 위에는 ‘추격당하는 자들의 연대’가 똬리를 틀고 있다. 반면 드넓은 아래층에서는 ‘추격하는 자들의 경쟁’이 요동친다. 사실 둘을 가르는 단층에서 추격전은 이미 끝난 상태다. 지대수탈자 동맹은 특권과 독점을 통해 오래 전에 사다리를 걷어찼을 뿐만 아니라 대기업의 약탈적 축적, 노동시장 경쟁 강화, 부동산 불로소득 등을 활용해 추격하는 자들의 상호 경쟁으로부터 이익을 착복한다. 추격하는 자들의 경쟁이 격렬해질수록 추월의 위협을 느끼기보다는 지대수탈자 동맹의 지배가 공고해진다. 이기는 자들이 늘 이길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렇다면 노동운동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이제 추격전 시대는 끝났다는 각성의 촉구이자 확산일 것이다. 이뤄질 수 없는 미몽일 뿐인 추격 경쟁을 때려치우고 기득권 동맹에 맞서 연대하자고 외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노동운동의 중심 기관인 노동조합은 이런 역할을 할 지적-도덕적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형편이다.

    일각에서는 아예 정규직 중심 노동조합도 지대수탈자 중 하나라고 비난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정규직이라 하더라도 대다수 조합원은 여전히 ‘추격당하는 자’보다는 ‘추격하는 자’ 쪽에 가깝다. 노동조합을 방패삼아 남보다 앞섰다고는 하지만 그래봐야 불안정한 우위일 뿐이다.

    다만 비난을 자초하는 결정적인 한계는 분명히 있다. 대기업, 공기업 노동조합은 지대수탈자 동맹과 협상해서 그들의 이익 중 일부를 양보 받을 역량이 있는 유일한 세력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그 힘을 아직까지는 경제적-분파적 이익 추구에만 쓰고 있다. 이 때문에 적어도 추격하는 자들 안에서는 상대적 특권 세력으로 치부된다. 지대수탈자 동맹에 맞설 수 있는 첫 번째 세력이 자기 방어에만 몰두한 탓에 오히려 기득권 동맹의 일원으로 몰리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정규직 노동조합에게만 최악의 상황이 아니다. 추격하는 자들의 경쟁을 하루빨리 기득권 동맹에 맞설 연대로 반전시켜야 할 모든 이들에게 가장 고약한 수렁이다.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집회 모습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노동계급의 자기 치유

    그간 이 수렁에서 빠져나올 여러 방안들이 제시됐다. 하나같이 노동자 사이의 경쟁을 완화하고 연대를 강화하려는 방책이다. 흔히 뭉뚱그려 ‘사회연대 전략’이라 불린다. 그 중에는 북유럽 복지국가 전성기에 실시된 연대임금 방식의 임단협을 산업별 노동조합 차원에서 추진하자는 제안도 있다. 최근에는 관변에서 나오는 직무급 도입 방안을 노동조합이 적극 수용하자는 목소리도 있다.

    나는 이런 방안들 대부분이 선의에서 나왔다 믿는다. 이들 제안 중 어느 하나라도 실현된다면, 최소한 지금의 현실보다는 훨씬 정의롭고 합리적인 국면이 열리리라 확신한다. 그러나 선의에서 나온 합리적인 방안이라고 하여 모두 다 바람직한 대안이 될 수는 없다.

    혁명 구상만 아르키메데스의 점을 상정하곤 하는 것은 아니다. 개혁 전략에도 이런 오류는 나타날 수 있다. 무엇보다 노동계급 역시 다른 사회 구성 요소들과 마찬가지로 유기체로 접근해야 한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병명이 명확하고 수술이 반드시 필요할지라도 기초 체력조차 고갈된 형편이라면 무턱대고 수술만 강행할 수는 없다. 회복력부터 키우는 게 급선무일 수 있다. 기업별 임금 인상 투쟁이 문제라 하여 임단협 제도부터 손 보자고 접근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오히려 임금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노동자 가계의 소득-지출 구조를 바꿔서 임금 인상 집착을 줄이는 쪽이 바람직하다.

    또한 새로운 미래를 모색하는 자들조차 무겁게 짓누르는 역사의 무게(경제학에서는 흔히 ‘경로의존성’이라 일컫는)도 망각해선 안 된다. 예컨대 연공서열급보다 직무급이 더 합리적임에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곧바로 직무급을 도입하자고만 할 수는 없다. 서구 자본주의의 직무급 제도에 중요한 배경이 된 길드에서 산업별 노동조합에 이르는 역사가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설령 위로부터 직무급을 도입하게 될지라도(실은 이조차 쉽지 않을 테지만) 이게 애초 기대했던 방향으로 뿌리 내리고 진화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역사성을 무시한 사회 공학의 실패가 충분히 예상된다.

    이렇게 상황이 복잡하고 난해할수록 해결 노력은 실제 풀어나갈 수 있는 문제에서 시작돼야 한다. 비록 낮은 수준일지라도 노동운동의 사기를 높이면서 연대를 체험하고 훈련할 방안부터 실행에 옮겨야 한다. 나는 이제껏 제안된 사회연대 전략들 중 다음 세 가지 방향 정도가 그나마 실현 가능성이 높으면서 지금 반드시 필요한 방안이라 생각한다.

    첫째는 산업별 노동조합의 복지 기능 확대를 통한 노동자 간 연대 강화다. 본래 자본과 대립하거나 협상하는 일만큼이나 노동자들의 상호 부조 역시 노동조합의 중요한 임무다. 19세기 유럽 노동조합들은 전자보다 오히려 후자에 더 힘을 쏟기도 했다. 노동조합이 실업보험을 운영해 신규 조합원 조직화 통로로 삼았던 벨기에의 ‘겐트 시스템’이 대표적인 사례다.

    반면 한국에서는 노동조합의 이런 기능이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이를 적극 부각해야 한다. 기업 규모와 고용 형태를 넘어 노동자 간 연대를 강화할 좋은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가령 대기업 노동조합이 이미 적립해 놓은 각종 기금을 산업별 노동조합으로 돌리거나 조합원 임금인상분 일부를 모아 복지 기금을 만들 수 있다.

    이 복지 기금은 기업 소속이나 고용 형태와 상관없이 산별노조 조합원 전체의 추가실업보험(고용보험을 보완하는)으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아예 조합원 경계를 넘어 미조직-청년 노동자를 위한 복지, 교육 사업에 투자될 수도 있다. 말하자면 21세기 한국판 겐트 시스템을 만들자는 것이다.

    둘째는 국가의 복지 기능 확대를 통한 사회 연대 강화다. 간단히 말해 복지국가 실현에 나서자는 것이다. 복지를 중심으로 한 국가 재정 회로에서는 조세와 복지 수당-공공 서비스라는 형태로 자원과 생산, 서비스 활동이 순환한다. 이는 자본주의 안에서 작동하는 비시장 경제 부문이다. 시장 경쟁이 아니라 사회 연대가 이 부문의 작동 원리다. 이런 부문의 등장 자체가 자본주의 구조의 상당한 변형일 뿐 아니라 경쟁이 아닌 연대가 재생산되는 진지의 구축을 뜻한다.

    특히 복지국가가 아직 자리 잡지 못한 한국에서는 노동운동이 복지 증세를 주창하면서 복지국가 건설의 선두에 나설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복지 재정 확대를 위한 핵심 증세 대상은 물론 지대수탈자 동맹이다. 하지만 노동자 역시 복지를 위해 더 납세할 수 있다고 나서는 게 바람직하다. 이를 통해 시민사회 전반에 복지 확대 지지 여론을 강화하면서 기득권 동맹을 압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노동운동이 복지국가 실현을 앞당기는 방안일 뿐만 아니라 임금 격차 문제에 우회적으로 접근하는 방안이기도 하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복지 수당-공공서비스가 자리 잡은 상황에서는 노동자들이 당장의 경제적-분파적 이해를 넘어 연대를 추구할 가능성이 지금보다는 높아질 것이다. 따라서 노동조합의 복지 증세 운동은 비록 당장은 임금 격차 문제와 상관없을지라도 장기적으로는 이를 해소할 여건을 마련하는 운동이 될 수 있다.

    셋째는 교육과 주거 문제 해결이 노동운동의 중심 과제로 부각돼야 한다는 것이다. 입시 위주 교육과 부동산 시장은 ‘추격당하는 자들의 연대’가 불로소득을 빨아들이는 통로이면서 ‘추격하는 자들의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무대다. 노동운동이 앞장서서 이 영역의 추격전에 종전을 선포하고 지대수탈자 동맹을 공격해야 한다. 지금까지 이런 노력이 강조되지 않은바 아니지만, 임단협이 중심이 된 노동조합운동 구조 탓에 계속 소귀에 경 읽기에 그쳤다.

    하지만 더 이상은 미룰 수 없다. 기득권 세력이 영세 자영업자의 경영난을 이유로 들며 최저임금 인상에 반발하는 모습을 이미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영세 상인의 곤란은 실은 상당 부분 건물주의 임대료 수탈 탓이다. 즉, 노동 정책이나 소득 정책의 협소한 틀로만 접근해서는 비정규직이나 영세 자영업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이 분명해지고 있다. 반드시 교육-주거의 구조 개혁이 동반돼야 한다.

    아니, 제도 개혁 요구만으로도 부족하다. 노동자들 스스로 교육-주거의 새로운 생활 양식을 창안하고 이를 정착시켜야 한다. 시민 대다수가 교육-주거에서 계속 ‘강남 중산층’을 (어설프게) 따라하는 한, 한국 사회에서는 영영 노동‘계급’을 식별하기 힘들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임노동자의 독자적인 교육-주거 양식을 정립하는 것은 곧 노동계급의 윤리를 새로 벼려내는 일이다. 이는 제도 개혁만으로는 실현될 수 없다. 지금 당장은 구체적인 모습이 잘 안 잡히지만, 그야말로 아래로부터의 운동 형태로 교육과 주거 대안을 찾고 만들어가는 노력이 펼쳐져야 한다.

    당분간 위와 같은 사회연대 전략들이 노동운동의 중심 과제가 돼야 한다. 이는 한 마디로 노동계급의 ‘치유’ 과정이다. 치료해줄 남이 있지 않으니 정확히 말하면 ‘자기 치유’다. 압축 산업화 와중의 추격전에서 입은 상처와 후유증 그리고 신자유주의 국면에 더욱 심각해진 경쟁의 중압에서 스스로 벗어나려는 노력이다. 이런 자기 치유를 거쳐야만 한국 사회에서 노동계급이 개혁이든 혁명이든 사회 변혁의 구심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치유 경험을 통해 회복탄력성을 갖춘 상태여야만 정보화, 자동화가 불러일으킬 미래의 더 큰 해일 역시 의연히 대처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너무 수세적이고 소극적인 진단 아니냐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시대에는 이 ‘치유’ 행위야말로 가장 적극적인 변혁 실천 중 하나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의 부패가 절정에 달한 국면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풍요로운 해방의 가능성만큼이나 그것이 왜곡된 결과인 심각한 질병에 시달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꾸려면 우선 이 병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아니, 이것은 어리석은 이원론이다. 병에서 벗어나려는 노력 자체가 세상을 바꾸는 일이다. 부패한 자본주의 질서가 강요하는 병든 주체이길 거부하는 것은 이 질서에 맞선 가장 진지하면서도 강력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이런 노력은 병든 질서가 더 이상 작동할 수 없다는, 돌이킬 수 없는 징표가 될 것이다.

    이렇게 탈경쟁-사회연대를 고민하기 시작하는 노동자라면, 의식 진화의 가속도 법칙에 따라 곧장 새로운 세상의 건설을 향해, 그런 세상을 만들 권력 관계의 변화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노동계급은 더 이상 아르키메데스의 점이 아니게 될 것이다. 현실의 점과 점이 이어져 선이 되고 선과 선이 만나 면을 이루며 낡은 세상을 안에서부터 정복해 들어갈 것이다. 사회연대의 세계관과 윤리로 말이다.

    그래서 사회연대 시도는 결코 방어나 위선의 몸짓이 아니다. 추격당하는 자들의 연대와 추격하는 자들의 경쟁이 이루는 한국 사회(‘헬 조선’)의 기본 구도를 헤집고 흔드는 길이다. 탈자본주의의 길은 이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아니, 어쩌면 둘은 서로 다른 길이 아닐지도 모른다.

    앞 회의 글 “상호소통과 설득 포함, 노조의 장기적·전략적 실천 시작돼야”

    필자소개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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