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평의 로케이션과 소명
    [노동·문예 노트] 어디서 시작하나
        2018년 02월 20일 10:55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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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계간 『the position』(2017년 여름호)에 수록한 평문으로, 해당 매체 편집진의 동의를 얻어 레디앙에 게재한다. 『the position』 집진과 필자에게 감사 드린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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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의 사유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시작된다.

    레이먼드 윌리엄스

    1. 가난과 무력으로부터

    문학비평가에게는 대부분 문학연구자라는 수식이 따라 붙는다. 평론가의 어깨 위에 붙은 ‘겸업의 견장’은 예술가로서의 개성과 학문으로서의 객관성을 함께 부여해주는 상징적 의례처럼 보인다. 이렇게 말해 놓고 나면, 비평가는 예술과 학문의 지위를 동시에 누리는 특별한 존재처럼 묘사될 수도 있겠다. 허나, 사실 그렇지는 않다. 속된 말로, 비평은 살림(生界)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비평’은 삶의 물질적 자산을 확보하는 행위와는 무관한 문예 활동이다. 논문 각 편이 연구 실적이라는 이름과 형식으로 정량화되어, 교육/연구 기관의 취직이나 승진, 그리고 연구비를 수혜할 수 있는 ‘포인트’가 되는 것과 비교하면 이해가 쉽다. 물론 비평적 노고에 대한 답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원고료가 그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인데―, 이마저도 현실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일까? 활발하게 비평 활동을 전개하거나 문예지 발간에 참여하던 비평가들이 대학이나 연구기관에 자리를 잡게 되면, 평론 작업을 대폭 줄이거나 아예 논문적 글쓰기나 짧은 칼럼 쓰기로 전회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오해하지 말 것은, 이는 특정한 삶의 형식과 글쓰기를 조소하고자 하거나―비평의 가치가 생업의 현실성을 전혀 획득하지 못하는 사회 현상에 대한 지적일 뿐―, 그 가치나 의미를 폄훼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점수나 생계가 되지 못하는 비평의 실존적 가능성, 다시 말해 유물론적 맥락에서는 ‘살림’의 의미를 거의 갖지 못하는 ‘비평(Criticism)’의 존재 의미와 가치를 되묻는 일이다.

    여기에서 하나 지적하고 가야 할 것은, ‘비평-문’과 ‘평론-쇼’는 다르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잡다한 방송과 각종 프로그램에서 ‘비평’이라는 이름으로 ‘크리틱 쇼(show)’를 펼치고 있는 정치평론가들의 ‘수다’가 그것이다. 여러 가지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다른 점이 있다면―때로, 비평이 자본과 결탁하고 공모하는 경우가 없지 않지만―, 제대로 된 비평은 상품화의 유혹에 저항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비평가는 가난하다. 그러나 비평이라는 이름을 팔고 사는 ‘쇼-평론(가)’의 저속함보다 더 참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비평의 현실/정치적 ‘무력(성)’이다. 비평이 순일한 정신 활동이나 고고한 표현예술에까지 이르지는 못하더라도, 우리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혁파하는 비판적 술어 정도는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비평은 너무도 무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 비평은 무력했다. 마지막 방세를 남겨 놓고 세 모녀가 이승을 등지던 순간에도, 벌건 백주대낮에 아이들이 차가운 맹골수도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을 때도, 현실 정치의 농단과 부패로 사회 운영시스템이 완전히 정지되었을 때도, 비평은 아무런 응답과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심지어―신경숙 표절 사건과 같은 현상에서 보듯―, 문학판 내부에서의 창작 윤리와 권력의 감시 기능조차 해내지 못했다. 그래서 누군가는 비평의 위기를 말하기도 한다. 혹은―『릿터』나 『문학3』의 등장이 시사하듯―, 비평과 무관한 정서적 글쓰기의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비평의 위기가 아니다. 기실, 비평은 단 한번도 ‘위기’가 아니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비평은 그 속성상 이미 ‘위기’의 문제 상황을 내장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의 ‘위기’에 응답해야 하는 비평의 가능성과 잠재성은 항상화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너무도 가난하고 무력한 비평의 존재 형식은,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성립되고 발화 가능한 것일까. 비평의 존재 조건에 대한 이러한 물음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다시 비평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생성시킨다.

    1. 이론의 물신성과 문학제도 비판의 공과

    비평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은 직업비평가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문학 작품을 생산하거나 향유하는 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고민해 본 적이 있는 질문일 테다. 구태여, 장황하게 비평의 역사적 배경과 내용을 열거하고 축약하지 않더라도, 이를 정의하는 방식이 매우 다양하다는 사실은 쉽게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로이스 타이슨의 비평이론의 모든 것에서는―김욱동의 광장을 읽는 일곱 가지 방법의 경우도 비슷하지만―, 열한 개에 이르는 비평이론과 독법을 제시하고 있다.

    당연히, 이론적 입장에 따라 텍스트의 분석 방법과 가치 평가는 크게 달라진다. 왜냐하면 이론은 세계와 타자를 해석하는 다채로운 시선의 규범적 틀인 동시에―비평의 관점과 텍스트 분석의 지렛대가 되기에―, 분석 텍스트의 선별 조건과 성취 수준을 가늠하는 판별 척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론은 사상이기도 하지만, 더불어 제도이기도 하다. 문예이론이 문학 장(場) 속에 안정적으로 정박하는 경우, 아이러니하게도 이론의 창발성은 표백되고 단단한 제도적 분석틀로 물신화된다.

    그러므로 ‘신비평부터 퀴어비평까지, 비평이론의 모든 것’을 습득하고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문학 텍스트의 역동성과 다성성을 확보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이미 오래 전, 고바야시 히데오가 날카롭게 지적했던 것처럼, “아무리 비평 방법이 정밀하게 점검되었다 하더라도, 그 비평이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지 여부와는 별 관계가 없”(유은경 옮김, 고바야시 히데오 평론집, 소화, 2004, 13쪽)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평의 존재 조건은 이론의 성채 속에서 증명될 수 없고, 또 역으로 텍스트 자체의 신성을 예찬하는 방식으로 성립되지도 않는다. 전자에 치우친다면 이론의 물신주의에 침하될 수 있으며, 또 후자에 경도될 경우에는 쇄말적 텍스트주의로 기울어질 수 있는 탓이다.

    비평은 단순히 문예 이론을 텍스트에 적용하는 해설 행위가 아니며, 텍스트의 비밀을 찾아 어둠의 심연 속으로 떠나는 해석의 탐험 과정 역시 아니다. 이는 비평에서 차지하는 이론과 텍스트의 중요성을 망기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라, ‘이론-텍스트-비평’이 맺고 있는 접촉면과 관계망이 그리 간단한 교통 구조로 이루어져 있지 않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시, 소설, 수필, 희곡, 비평 등을 비롯한 문학 텍스트는 독립적으로 존속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 장의 내재적 규칙과 이데올로기에 의해 성립된다. 비평이 제도적 구성물이라는 주장은 이 지점에서 부각되는데―굳이 피에르 부르디외나 테리 이글턴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는 비평을 순수한 예술 장르가 아니라 사회·역사적 산물로 해석하게 한다.

    한국 문단의 비평 장과 담론 공간을 뜨겁게 달구었던, 1980년대 ‘문학과 지성’ 비판이나 1990년대 신세대 비평가들의 문학권력 비판, 그리고 최근에 이슈가 된 신경숙 표절 사태를 통해 촉발된 출판사와 비평의 공모관계 비판 등은, 모두 비평의 메타적 사유에 기반한 실천적 쓰기(들)이다. 특히, 1980~90년대의 문학권력 비판과 논쟁은 이론적 탐구와 텍스트 해석에만 자족하고 있던 비평계의 자기 반성과 비판적 문식력을 최고치로 끌어올린 문학사적 사건으로 평가할 수 있을 듯하다. 이는 탈식민주의 담론과 연계되면서 ‘반(反)-중심주의, 혹은 반-권위주의 문화 운동’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위대한 문학적 전통의 역사적 내력에 대한 비평적 고증과 탐구가 전개되면서, 현대적 문범(正殿)으로 불려왔던 텍스트의 허구적 실체가 폭로되었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문화적 기반이 ‘서울’ 지역이나 특정 ‘에꼴’에만 집중되어 있다는 문학 권력 비판/논쟁의 결말은 다소 허망한 부분이 없지 않았다. 문학권력 비판 이후에도, 메이저 출판사와 문예지는 ‘제도적으로 승인된 문화적 커뮤니티’로 자가 발전해갔고, 오히려 더 견고하게 주류 문예지(출판사)로서의 자리(Vested interests)를 확보해 갔다. 신경숙 소설가의 미시다 유키오의 우국 표절 논란은 이러한 속물적 문화주의에 정점을 찍은 사건이다. ‘비평의 비평’, 혹은 ‘문학권력 비판’은 문학이 순수한 언어적 형상을 창안하는 예술적 과정이 아니라, 각각의 입장이 개입하고 충돌하는 ‘갈등의 산물’이라는 점을 상기시켰다는 측면에서 충분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문학권력 논쟁에 참여한 비평 논객 중에는, 특정 작가나 에꼴(출판사/매거진)을 ‘절대적 악의 형상’으로 묘사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는데―문단을 일련의 전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효과적인 언술 전략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이는 그리 합리적인 응전 방식이 아니었다는 판단이다. 왜냐하면 비평의 적대적 언술 전략은, 개개인이 배치되어 있는 삶의 조건을 단순화할 위험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올바른 도덕률을 강조하는 비평의 기치란, 너무나도 손쉽게 가해자와 피해자, 다수자와 소수자, 중심부와 주변부라는 이분법적 정의(正義)론을 발동시키며, 동시에 자기 자신을 ‘선(善)’의 자리로 배치시키는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나 역시 이러한 사례에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지, 정말로 자신은 없지만―, 우리는 종종 자기 자신의 문화적 후진성과 작품 생산의 부진을 ‘외부적 요인’으로 전가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주변부’의 문학적 삶과 제한적 문화자산을 ‘자기 실패’의 알리바이로 삼는 셈인데, 이런 경우 ‘문학권력 비판’이 융기한 생산적 문제 인식은 완전히 탁화된 채, 애잔한 자기애만이 남게 된다. 문학권력 비판의 강한 메시지와 담론적 구호를 무비판적으로 전유할 때 발생하는 모순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이론적 물신주의와 쇄말적 텍스트주의, 그리고 비평의 모럴리티를 넘어서는 비평(가)의 태도란 무엇인가? 이에 대한 응답을 비평(가)의 로케이션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1. 시좌와 실험: ‘시’의 임계를 횡단하는 ‘삶’의 자리

    비평(가)의 로케이션. 비평은 자신이 위치한 ‘삶/자리(Location)’의 다양한 조건과 가능성을 힘껏 사유하면서도, 그것을 자기 한계로만 규정하지 않는 능동적 태도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이는 비단 탈식민주의 문화론에 입각한 비판적 ‘지역주의(Regionalism)’ 담론에 한정되는 문제만은 아니다. 최근, 국가 주도적 문화성장론이 은폐하고 있는 폭력성과 식민성을 지각하고, 지역의 특수성에 기반한 보편적 사유와 삶의 양식을 정초해야 한다는 주장이 공감을 얻고 있다. 다만, 이를 비평 담론의 차원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문학’의 자리에서 구현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문학 창작과 비평은, 결국 더 나은 삶을 위한 ‘공통의 가치’를 발견하고 창안하는 작업이다. 그러나 이것은 ’일국(一國)적 사고‘나 ’속지주의적 사고‘ 속에서는 불가능하다. 새삼스럽게 다케우치 요시미나 쑨거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비평가에게 ‘시좌’의 감각이 중요하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시좌(視座)란 주체의 로케이션에 입각해 미지의 세계와 낯선 타자를 만나는 사유 체계이자 과정이다. 그러므로 어디에서, 어떻게, 무엇을 보는가, 하는 것은 단순한 생활 조건의 인지 여부가 아니라, 주체와 타자가 어떤 방식으로 관계 맺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지각하는 시선과 사고의 발명 과정이다. 즉, ‘시좌’는 비평의 조건과 가능성을 통찰하게 한다. 왜냐하면 이는 비평의 한계와 과제를 함께 사유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한국문학이라는 시좌, 혹은 부산비평이라는 시좌는 ‘나’의 문학적 지향과 비평적 세계를 구성하는 중요한 존재 조건이 된다. 물론 비평가의 시좌를 구성하는 ‘삶의 자리’는 구체적 장소에 기반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꼭 특정 지역(명)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나의 경우 ‘(아시아/한국)부산이라는 시좌’, 혹은 ‘비평전문 계간지 오늘의 문예비평이라는 시좌’가 주어져 있다. 이를 ‘부산비평의 시좌’라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편의상 그렇게 부른다고 할 때―, 이것이 ‘나’의 비평적 한계와 가능성을 사유하게 하는 중핵 조건인 것만은 틀림없다.

    ‘아시아와 한국’이 괄호 쳐진 ‘부산비평의 시좌’는, 때때로 중심부 문화론의 시각에서는 포착하거나 담지하지 못하는 ‘주변부 삶의 양상’을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시차(視差)를 구성하곤 한다. 주변부(혹은 반주변부) 문학비평의 성취와 담론적 도약이란 이런 맥락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주변화된 삶의 조건이 ‘중심/주변’, 혹은 ‘서울/지방’이라는 지정학적 조건을 통해서만 분기하거나 성찰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예를 들어 장애나 젠더, 그리고 세대나 계급 등과 같은 다양한 조건들을 통해 논의되는 바와 같이―, 이는 부산과 지역이라는 시좌 속에서만 발아되는 것은 아니다. 한 예로, ‘부산(혹은 한국)의 작가’를 발굴하고 성장시켜야 한다는 당위적 발언에 기반한 민주적 문화론은 지나치게 감상적인 비평적 주창에 다름 아니다. 또한 ‘중심부의 문학적 기반과 성과’를 선망/질시하면서, 작품 창작이나 비평적 교호 없이 문인 단체에서의 행정사무나 협회활동으로 ‘작가/비평가적 소임’을 완수하려고 하는 태도도 비생산적이기는 마찬가지이다.

    한 가지 곤혹스러운 것은―이는 비단 부산비평의 난처함만은 아니겠으나―, 지역에서 창작/비평 활동을 하다 보면 문학의 미학적 한계치에 미달하거나, 혹은 이를 과하게 초과하는 텍스트를 만나게 된다는 점이다. 오해하지 말 것은, 이는 개별 작품(집)의 창작적 노고를 평가절하기 위한 의도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보다는, 문학 작품(집) 발간의 양적 증가가 과연 한국문학의 질적 도약을 담보한 것인지를 따져 묻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작품 해설이나 리뷰 청탁을 받고 난감했던 적이 없지 않다. 비평의 책무는 읽고 쓰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맞지만, 모든 문학 작품을 해제하는 것이 비평의 역할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주 가끔씩은 문학의 미학적 임계를 넘어서 반드시 해제/비평되어야 하는 작품을 만나기도 한다. 바로, 다음에 인용할 사례가 그것이다.

    시는 예술이기에 앞서 인간의 자기표현 방식 중 하나이다. 이승재 씨가 이십 년 동안 써온 시를 묶은 마개 없는 것의, 비가 오다라는 시집은 문학이 자기표현의 방편인 동시에, 일상과 절단된 문자 행위나 자기 과시가 아니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그는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웅숭깊은 사연을 진솔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이 작품집을 읽는 독자라면, 그가 얼마나 따뜻한 사람인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중략) 잘 알다시피, 시는 일상생활과 괴리된 특별한 창조물이 아니다. 시를 비롯한 문학은, 세상사와 단절된 고고학적이고 탐미적인 언어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 도처에 존재하는 사연이자 말의 흔적일 따름이다. 인생이 끝나지 않았듯, 우리의 사연 역시 끝나지 않았다. (이승재, 『마개 없는 것의, 비가 오다』, 소요유, 2017에서)

    하나의 ‘실험’적인 에피소드이다. 지난 봄, 부산의 어느 독립출판사로부터 ‘시집 해설’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문학 전문출판사도 아니고 시집을 낸 경험도 전무한 곳이다. 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잠시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나의 머뭇거림을 눈치 챘는지, 출판사 대표는 ‘소요유 시선(詩選)’의 기획 의도를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 이 ‘시선’의 의미는 등단하지 않은 일반 시민(들)의 진솔한 삶을 ‘시’라는 형식으로 묶어내는 데 그 취지가 있다는 것. 나는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하고 원고 청탁을 수락했는데, 사실 전문 문사가 아닌 ‘시민의 시’는 어떤 내용과 형식일지, 다소의 궁금증과 호기심이 발동한 까닭도 없지 않았다. 그런데 원고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각각의 시편에 상당히 공감하였고 이는 작품 리뷰의 충분한 동기가 되었다. 물론 시 텍스트의 심미적 한계나 작품간 편차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20여 년 동안 쓰였다는 70여 편의 시들은 ‘한 사람의 인생’을 망라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가난한 유년시절에서부터 현재의 생(生)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삶을 과장하거나 뽐내지 않으면서, 따뜻한 대화의 언어를 통해 세계/타자와의 만남을 기록하고 있는 이승재 씨의 시집은, 비록 ‘완성도 높은 서정시의 목록’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지라도, 충분히 ‘시적인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실제로 그가 시인으로 데뷔하기 위해 시 수업과 습작 활동까지 했다는 문학적 내력을 알게 되었다. 어찌 보면, 이승재 씨는 전문 문사로서의 시(인), 혹은 예술로서의 시(인)의 문턱까지 와 있었던 셈이다. 다만, 말 못할 사연과 삶의 고비로 인해, 직업적 문사로 가는 경계를 넘어서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순정한 아마추어 시인의 꿈은 실패한 것이 아니다. 그는 여전히 시와 삶의 틈에서 진솔한 생의 언어를 길어 올리고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대중독자가 시집을 읽지 않는 시대의 비평적 책무란, 바로 이와 같은 ‘삶/시’의 가능성을 발굴하고 해제하며 공유하는 ‘자리(location)’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비평의 미래 과제 역시 중심과 주변의 관계 역학과 물적 조건에 대한 저주와 비판이 아니라, 문학(성)의 통념과 임계를 횡단하는 비평적 시좌를 확보하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1. 비평의 소명: ‘문학적 규범’에서 ‘문학적 진실’로

    나는 이미 몇 차례 비평(가)의 로케이션이 비평 주체가 놓여 있는 물리적이고 지정학적인 위치만을 되묻는 일이 아니라, 비평하는 이의 역할과 책무를 함께 자문하는 것임을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어쩌면 이승재 시(집)에 대한 ‘발문’은 ‘주례사 비평’이라는 혹독한 비판에 직면할지도 모르겠다. 시 해설의 마디마디에 ‘비판과 제언’을 제시한 것과 별도로, 미적 성취 여부에 대한 객관적인 해석과 평가를 유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주례사 비평’의 취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처사이다.

    주례사 비평은 독자와 평단의 주목을 받고 있는 작가에게 ‘상찬’과 ‘혜택’의 언어만을 돌려주는 속류 문학비평에 대한 조소와 야유이다. 한국 현대비평이 분석과 평가의 대상이 되는 작가와의 객관적인 거리를 충분히 유지하고 있지 못하다는 데서 시작된 메타 비평의 생산적 증례인 셈이다. 이는 칭찬 일색이 된 비평적 글쓰기를 반성하고 엄밀한 평가의 잣대를 회복하고자 하는 윤리적 태도(Attitude)인 동시에, 각기 다른 의장(이론)을 달고 문학적 텍스트를 호명하고 있는 과잉 비평에 대한 적의이기도 하다. 문학의 생산과 소비를 철저하게 사회 제도의 산물로 보면서 비평의 “천사주의를 포기”(피에르 부르디외)하고 있는 ‘주례사 비평’은, 우리 문단의 명망주의와 권위주의에 대한 비평적 도전이라 기록할 만하다.

    그러나 ‘주례사 비평 비판’의 진의를 왜곡해서는 안 된다. 주지하다시피, ‘주례사 비평’이란, 엄격한 비평적 기준을 적용하지 않고 ‘주례사’하듯이 좋은 말만 하는 비평이 분명하지만―이제는 관용 표현처럼 되어버린―, 그것이 곧 텍스트에 대한 다양한 해석, 이론적 적용, 그리고 긍정적 평가나 가치 부여를 배제하는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문학 텍스트에 대한 이론적 독해와 정교한 해석은 작품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가 된다. 비판을 위한 비판의 명분으로 ‘주례사 비평’이라는 관용 표현이 전유되는 것은 삼가야 한다는 뜻이다. 앞에서 예로 든 이승재 씨의 ‘생애 시집’을 통해―한 사람의 삶이 한 편의 시로 기록되고 기억되는 작품집을 이렇게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주례사 비평이 전용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논의해 볼 수 있을 듯하다.

    본래 ‘주례사’라는 말은 축사의 의례이다. 새로운 삶의 출발점에 선 이들을 위해 축복과 교훈의 메시지를 전하는 말이 주례사이다. 그러므로 주례의 언어는 다소 능력이 부족하고 채워야 할 부분이 많은 타자에게서도 나름의 ‘장점’과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핵심이다. 이승재 씨의 ‘생애 시집’ 발문에서, 미적 자질과 서정시의 규범을 넘어선 ‘진솔한 삶’의 내력과 가치를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나, 아마추어 시인으로서의 새로운 출발을 ‘축복’하고자 하는 마음이 여기에 비유될 수 있겠다. 이른바, 주례를 서는 경건한 마음으로 ‘생애 시집’ 저자의 삶과 결속되는 경험을 공유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주례사 비평’의 참된 모습이 될 것이다.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의 문제 인식 역시, 모든 비평이 ‘주례사’처럼 축언의 의례가 되는 것에 대한 경계일 뿐, 이러한 비평의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비평의 미래를 모색하는 자리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반-권위적이며 반-엘리트적인 시좌를 통해 비평의 대상을 다양화하고 살뜰히 살피는 태도를 잃지 않는 것이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비평가라면 누구나 ‘명망 작가’의 작품을 다루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욕망이 없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그러나 이름 있고 미학적 성취가 높은 텍스트를 다룬다고 해서 그 비평이 함께 가치 있어지는 것은 아니다. 비평가는 허명(虛名)의 뒤를 따르거나, 기존의 문학적 관습을 지키고 유지하는 존재가 아니다. ‘이론’과 ‘작법’, 혹은 다양한 문학/예술의 규칙이 우리 사회의 문화적 기득권을 승계하는 도구라면, 이 역시도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다. 비평이 이론적 탐구나 방법론적 쇄신에 앞서, 자기 반성을 먼저 동반해야만 하는 까닭이다.

    이를테면, 서정시가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유효한 까닭은, 바로 이와 같은 문화적 기득권과 예술의 규칙을 전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적 언어의 미적 혁신과 욕동이란 단순한 ‘언어적 실험’이 아니라 세계와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차의 구성’ 과정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과연, 비평은 어떤 ‘변혁’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가? 비평은 각기 다른 의장(이론)을 통해 문학 텍스트에 다채로운 숨결을 부여하는 언어인가? 그렇지 않으면 시대적 조류와 모순을 독해하고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는 이론적 실천인가. 이러한 물음에 진정성 있게 응답하고 있는 문학적 증례가 있어서 소개하고자 한다. 세월호 사건의 의혹과 진실을 탐구하고 있는 김탁환의 『거짓말이다』가 그것이다.

    재판장님!

    이것부터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미수습자 수색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가을이든 겨울이든 계속 잠수하려고 했는데, 철수하란 문자를 일방적으로 받은 겁니다. 내쫓기듯 바지선을 떠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중략) 잠수사들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기강을 잡고 응급 상황에서도 신속히 대처하게 하려는 겁니다. 욕 좀 들었다고 얼굴 찡그리는 잠수사는 없습니다. 격식 갖춰 말하려다가 귀한 목숨 잃을 순 없으니까요. (중략) 바지선에서 해군, 해경, 민간 잠수사 통틀어 그 누구도 류창대 잠수사를 감독관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겐 형님이었고요, 해경이나 해군 간부들에겐 ‘민간 잠수사 류창대 씨’였습니다. (김탁환, 『거짓말이다』, 북스피어, 15-213쪽)

    이 작품은 고 김관홍 잠수사를 비롯한 많은 이들의 증언과 기록에 바탕하고 있는 장편소설이다. 그러나 위의 인용에서 확인할 수 있듯, 『거짓말이다』는 ‘소설’이라기보다는 ‘피해(자) 보고서’나 ‘문학적 탄원서’에 더 가깝다. 이는 문학적 규범의 ‘두 가지 포기’를 통해서 만들어졌는데, 먼저, ‘인물-사건-배경’의 유기적 관계를 통해 서사 구성의 미적 가치를 성취하는 내러티브 양식의 포기이다. 각 인물의 기억과 증언을 통해 재구되는 세월호 이야기는 인터뷰와 잠수기록부, 그리고 팟케스트와 몽유록적 판타지의 형식을 차용하며 전개된다. 김탁환이 이전 작품에서 보여준 역사추리물의 서스펜스를 고려하면, 굉장히 예외적인 구성 방식이다. 다음으로, 문체의 포기이다. 이 소설은 서사 장르의 미감과 개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작가의 문체 사용을 최소화하고 있다. 철저하게 정보전달 기능에 입각해 있는 것. 그의 문체 전략은 문학 작품이라고 보기에는 건조하다 못해, 아예 작가 자신의 목소리조차 소거될 지경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작가의 개성을 지워가면서까지, 그가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사건의 진실이다.

    자기 표현이 아니라 정보 전달의 목적성을 선택하는 것. 문학적 담화 유형에서는 대체로 선호하지 않는 방법일 듯하다. 한국의 굴곡진 역사에서 언론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이러한 역사적 고비마다, 문학은 공론장의 중핵 미디어나, 심지어 진실을 공표하는 찌라시 역할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미적 자질의 후퇴’라는 냉혹한 평가가 꼬리표처럼 따라 붙었다. 과연 이런 지적이 비평의 균형 감각일까? 비평하는 이라면 누구나 고민해 보아야 할 대목이다. 우리가 문학적 양식과 미적 의장(意匠)을 고민하고 있던 그 순간, 김탁환은 ‘소설’이 아니어도 좋다는 각오로 거짓말이다를 집필하였다. 일정한 매니아 독자층을 지닌 작가로서는 대단한 자기 결단이자 용기가 아닐 수 없다. 실제로 김탁환은 세월호 참사를 다룬 장편소설을 쓰면서 “구상부터 출간까지 최소한 3년은 집중한다는 원칙을 깼”(「작가의 말, 감사의 글」)다고 말한 바 있다. 그것은 문학적 의장으로서의 반-스탈주의가 아니라, 소재적 ‘긴급성’에 응답하는 작가적 윤리라고 하겠다.

    그는 류 잠수사의 말을 빌려 이렇게 표현한다. “격식 갖춰 말하려다가 귀한 목숨 잃을 순 없”다! 이 말의 진의는 문학의 형식이나 미적 규범이 문학적 삶과 진실에 이르는 길에 앞서는 일이 아님을 보여준다. 문학적인 것들을 내려놓은 자리에서, 오히려 문학의 ‘여전한 가능성’이 발견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이러한 역설에 대한 증명이야말로―문학적 통념에 대한 도전과 다시 쓰기야말로―, 문학비평이 감당해야 하는 순명(順命)이자 당대적 소명이 아니겠는가.

    1. 이 무력한 비평을: 이론적 의장과 텍스트의 신정을 넘어서

    비평은 가난하고 무력하다. 고바야시 히데오가 이론과 방법이 비평의 의장(意匠)이 되어 버렸다고 말한 것처럼, 어쩌면 비평은 순정한 텍스트의 의장이 되어 버렸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작금의 비평적 위기란, 이론적 물신주의와 텍스트 신정(神政)주의 속에서 길을 잃은 상태를 지칭하는 것은 아닐까. 비평이 우리 사회의 위기를 진단하고 타개하는 대안적 언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론과 텍스트주의에 침전되어 오히려 사회적 기득권을 유지하는 자기 방어의 문장이 된 것은 아닌지 성찰해 보아야 하는 까닭이다.

    비평(가)의 이러한 자기 반성이란, 주체가 놓여 있는 위치와 배치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비평은 어떤 ‘시좌’를 확보하느냐가 핵심 관건이다. ‘타자의 시선’이 아닌 ‘주체적 응시’에 의한 해석과 평가를 가능하게 하는 힘, 그것은 바로 비평적 주체의 로케이션에 대한 지각에서 마련된다. 당연히 ‘시좌’는 관성적인 사고 방식에서 벗어난 새로운 ‘시차’를 구성한다. 부산을 거점으로 비평을 전개하고 있는 ‘나’는 ‘아시아-한국-부산’이라는 시좌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시아와 한국’이 괄호쳐진 상태에서 호명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를 지나친 피해의식으로 과장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부산비평이라는 시좌’는 다른 장소에서는 보지 못하는 것과 느끼지 못하는 것을 감지할 수 있는 문화적 역량을 함께 생성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주변부(혹은 반주변부) 지식인/비평가의 특수성이라 부른다. 이러한 특수성이 보편적 삶의 가치를 구현하는 ‘특이성(Singularity)’의 창안으로 이어질 때, 동시대의 비평은 크게 융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변부 문학비평의 가능성은, 여전히 실제 텍스트의 성과로 증명되기보다는 담론이 앞서 내딛고 달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기대와 전망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해서도 안된다. 그저 묵묵히, ‘부산이라는 시좌’에서 비평적 ‘실험’을 진전시켜 나갈 뿐이다.

    조금은 다행스럽게도, 부산에는 『오늘의 문예비평』이라는 단단한 비평적 기반이 있다. 부산을 비평의 도시라고 부르는 까닭이기도 하다. 물론 역사와 전통이 있는 문예지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잡지 운영을 파국으로 몰아넣는 이런저런 소란과 재정 절벽의 위기는 차치하더라도―, 최근의 비평/매체가 처한 상황은 분명 녹록치 않다. 굳이 『악스트』나 『릿터』, 그리고 『문학3』 등의 창간 의미를 재론하지 않더라도, 변화하는 미디어 환경과 출판 생태계는 깊이 있는 비평의 역할을 위축시키고 있다.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역사의 사유”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시작된다”고 하였지만, 지금 내가 선 이곳이 과연 그러한 사유/비평의 출발점인지는 확언할 수 없다. 다만, 비평적 시좌의 갱신과 통찰을 통해 이 무력한 글쓰기를 이어나갈 뿐이다. 새로운 비평의 가능성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으로부터 시작된다. 나는 그것을 잊지 않을 뿐이다.

    필자소개
    문학평론가, 부산외대 한국어문화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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