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정규직 파업현장 북파공작원 투입
        2006년 04월 17일 12:3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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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자 투쟁현장에 북파공작원이 투입됐다는 한 북파공작원의 증언이 나왔다. 북파공작 특수임무수행자 동지회 ㅈ씨는 최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지난 해 10월 12일부터 광주지부 소속 20명이 군산공장에 들어갔고, 최근까지 일하고 있다가 잠시 인원을 뺐다. 일이 생기면 또 돌아올 것이다."

    최근까지 그들이 들어가 있는 곳은 자동차시트를 만드는 케이엠엔아이(KM&I)라는 회사. ㅈ씨는 그와 가까운 친구인 금속노조 관계자의 부탁을 받고 동지회 지역 지부를 통해 이런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그는  "그 회사가 광주지부와 용역계약을 맺었고, 회원 60∼70명 중에서 직장이 없는 사람들 20여명이 거거기로 나갔다"고 말했다. 

       
     
    ▲ 2005년 11월 10일 케이엠엔아이 군산공장 앞에 누워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용역경비들이 끌어내고 있다(사진 금속노조)
     

    일당 16만원 지급 … 회사는 발뺌

    조씨는 "사설경비업체는 일당 10만원이면 되는데, 북파 공작원의 경우 처음에는 더 받았을 수도 있는데 장기간 상주하면서 지금은 일당 16만원씩 받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회사 쪽은 북파공작원을 고용한 사실에 대해 발뺌을 했다. 지난 4월 6일 금속노조와의 교섭에서 노조 교섭위원인 전송철 부위원장이 북파공작원을 고용 여부를 묻자 회사쪽 관계자는 "왜 우리가 그 사람들하고 계약을 하나.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북파공작원의 지휘를 받은 용역경비들의 폭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지난 해 11월 한 달 동안 80명의 노동자들이 용역경비들에게 폭행을 당했다. 코뼈가 내려앉고 갈비뼈가 부러지고 허리를 심하게 다쳤으며 얼굴이 만신창이가 되기도 했다. 전치 3주에서 8주 진단을 받은 조합원들이 20명에 이르렀다.

    케이엠엔아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회사가 금속노조와 합의한 최저임금을 맞추기 위해 상여금을 삭감하자 이에 격분해 노동조합을 만들었고, 직장폐쇄로 길거리로 쫓겨나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기자.  "제가 서너 차례 군산공장에 내려갔는데 여러 조합원들이 깁스를 한 채 집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눈뜨고 못 볼 정도였다.".

    북파공작원. "그 친구들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움직이는 사람인데 임무가 떨어지니까 죽기살기로 막은 거겠죠.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들이)회사에서 불합리한 대우를 받고 쫓겨나고 힘든 가정생활을 하고 계실텐데, 그 사람들이 다시 회사로 돌아가서 일하고 화목한 가정을 꾸려가길 바라겠습니다. 본의 아니게 불상사가 있었는데 다치신 분들의 쾌유를 빌고 정상적인 회사생활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 내가 생계 책임질 수도 없지 않은가"

    그는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런 일을 하고 있는 동료들에 대해 안쓰러운 마음을 여러 차례 표현했다. "광주에 있는 우리 선후배 일부가 거기에 들어갔는데, 그 사람들 개인으로 봐서는 생존을 위한 것입니다. 가정도 있는데 정상적인 회사생활을 못하고 먹고는 살아야하는데 돈을 많이 주니까 거기에 눈을 돌린 거죠.  광주에 있는 후배들에게 비정규직 노동자들한테 그런 행동을 하면 되겠냐고 얘기 못합니다. 자기 생계를 위해 하는 일이고, 제가 생계를 책임져줄 수도 없지 않습니까?"

    그는 이야기를 하면서 연거푸 소주를 마셨다. "동지회가 회원을 대상으로 가정 실태조사를 한 적이 있는데 70∼80%가 이혼을 했고, 정상적인 가정을 꾸려가는 사람들은 20∼30%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경찰특공대 같이 공무원으로 채용된 사람들뿐이었습니다."

    ㅈ씨는 현재 서울 삼성동 건설현장에 나가고 있다. "아내와 아이 둘을 먹여 살려야 하는데 나이도 있으니까 취업은 안되고, 할 수 있는 일이 노가다밖에 없는 거죠. 몸이 정상적인 사람이 거의 없어요. 다들 어디 다쳐서 병신이거나 병을 앓고 있습니다."

    "생계가 보장되면 노동자들 두들겨패는 곳에 누가 가겠습니까?"

    2004년 12월 ‘특수임무수행자 지원에 관한 법률’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일부만 보상이 됐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는 모두에게 동일하게 보상을 해주고, 지원 처우를 개선해달라는 요구를 걸고 이 달 안에 집회를 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조직이 통합되고 수익사업의 통로가 열려서 생계가 보장되면 이권개입하는 일 안 할 겁니다. 와이프들이 100만원만 벌어도 되니까 남들처럼 출퇴근하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얘기해요. 그런데 노동자들 두들겨패는 그런 곳에 누가 가겠습니까?"

    케이엠엔아이의 경우 하루 16만원이면 한 달에 500만원을 받는 건데 회원들이 그런 유혹에 빠지지 않겠냐고 묻자 그는 단호하게 말한다. "앞으로는 그런 일 안하게 될 거고 못하게 할 겁니다. 생계문제가 해결되면 이런 일은 없을 거구, 이런 일 생기면 조직 차원에서 방치하면 안되겠죠. 우리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다 인정하고 있습니다."

    2003년 6월 공공기관이 북파공작원 투입해 노동자 폭행

    그는 2004년 4월 포항에 있는 대경이라는 회사에서 북파공작원을 고용했던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소문만 있었던 코오롱에 대해서도 그는 "아마 코오롱에도 들어갔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가 직접 투입됐던 사건을 얘기했다.

     "2003년이었을 겁니다. 어떤 회사에서 농성하고 있는 사람들 끌어내는 일이 있으니까 가자고 해서 저도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갔습니다. 본사 앞에서 텐트치고 농성하고 있었는데 우리들이 가서 순식간에 들고나와 감금시켰습니다. 나중에 알게 됐는데 그 농성하는 사람들은 다 카이스트 출신의 석박사들이었고, 공공기관에서 우리 동지회쪽과 직접 계약을 한 거였습니다."

       
     
    ▲ 2003년 6월 21일 새벽 4시 30여명의 청년들이 나타나 한국시설안전기술공단 앞 노동조합 농성장을 부수었다.(사진 공공연맹)
     

    그는 몇 번 이름을 되뇌더니 "아마 한국시설안전기술공단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랬다. 2003년 6월 21일 새벽 4시. 정부출연기관인 한국시설안전기술공단 앞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던 농성장에 30여명의 괴한이 나타나 천막을 철거하고 당시 농성장에서 자고 있던 곽장영 수석부위원장 등 노조간부 5명이 30여분간 집단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었다.

    당시 공공연맹과 과기노조는 "30대 건장한 청년들인 용역깡패들은 주로 재개발지역 철거를 담당해온 전문 폭력배들로 추정된다"고 말했는데 이들이 북파공작원이었던 것이다.

    "비정규직 복직되면 북파공작원도 좋아할 것" 

    빈 소주병이 일곱 병을 넘기고 시간이 열한 시를 넘어갔다. 그는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졸업도 하지 않고 북파공작원으로 갔다. 그가 들려준 얘기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았다. 군사정권이 이들에게 저지른 범죄행위는 어떤 형용사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잔혹하고 끔찍했다. 비보도 요청을 전제로 그가 쏟아놓은 말은, 보도를 하라고 해도 하기 어려울 정도의 얘기들이었다. 그는 "국가가 사기를 쳤다"고 말했다.

    그런 국가의 피해자들이 군산공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싸움을 하고 있다. 기자가 "국가의 피해자와 자본의 피해자와 서로 주먹을 휘두르며 싸우고 있는 거 아닌가요?"라고 말하자 그는 "맞다"며 빨리 이런 모순이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빈 소주병은 계속 늘어나고 그가 들이키는 잔 수도 빠른 속도로 늘어났다. 그가 술잔을 입술로 가져가는 횟수보다 더 자주 되풀이한 얘기가 있다. 

    "해고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복직되면 경비하러 가 있는 우리 선후배들도 좋아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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