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드, 우리 안에 살고 있는
        2006년 04월 04일 09:5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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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한미대사관의 외교관 그레고리 헨더슨은 젊은 장교들이 일으킨 군사쿠데타에 반대했다. 이 때문에 차기 주한미대사로까지 점쳐지던 그는 정권을 잡은 정치군인들과 불편한 관계가 됐다. 결국 박정희가 이끄는 군사정권은 1963년 봄, 헨더슨과 합동통신사 리영희 기자가 가진 인터뷰를 문제 삼아 사실상 추방했다. 주한미국대사관 정무참사관 그레고리 헨더슨은 한국에서의 ‘외교관 추방 제1호’로 기록됐다.

    본국으로 돌아간 헨더슨은 1968년 한국 현대사와 정치에 관한 책을 썼다. 그리고 <소용돌이의 한국정치(Korea : The Politics of the Vortex)>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책은 출간된 지 40여년 가까이 지났지만 지금도 여전히 국내외 학자나 언론들이 한국 정치현상을 설명할 때 인용하고 있다.

    헨더슨이 ‘소용돌이’라고 표현할 만큼 격동적인 한국정치 상황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리고 소용돌이의 가운데에는 항상 태풍의 눈처럼 적색에 대한 입장과 태도가 놓여있었다.

    빨강만큼 우리 현대사의 풍랑을 잘 보여주는 색은 없다. 빨강은 지금도 극단적인 평가를 오고가면서 한반도의 역사를 채워가고 있다.

    한민족의 색채감각

    이웃 중국의 문화에서 붉은색이 행운이나 길조의 상징으로 오래전부터 숭상 받아온 것과 달리 한반도에 자리를 잡았던 문화 공동체들은 중국처럼 하나의 색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백색을 우리 민족의 고유한 색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오히려 전통적인 단청문양의 색조합에서 보듯 우리의 문화는 지배적인 색상의 존재보다는 여러 가지 색깔의 어울림이나 조합을 선호했다.

       
    ▲ 화려한 단청 문양 ⓒ 대한불교수도원
     

    이처럼 다양한 색상을 선호하는 문화는 오방색이라는 형태로 체계화 됐다. 도교에 관련하여 중국의 음양오행설이 무속에 수용되어 소재나 색채에서 구체적인 형상과 의미를 내포하는 표현이 오방색이다. 오방색은 황, 청, 백, 적, 흑의 5가지 색을 말한다. 이 다섯 색이 음과 양의 기운, 방위 등과 맞물려 의미체계를 만들었다.

    오방색은 고구려 고분 벽화의 사신도에서 채색화의 시원으로 발견되었으며, 이는 이후 각 신분과 용도에 맞게 설정된 복식, 공예품, 왕궁과 사찰에서의 단청을 비롯한 전반적인 색채의식을 형성하는 근간이 됐다.

    오방색에서 적색은 남쪽, 여름, 태양, 생성, 창조, 정열, 욕망 등을 가리킨다. 잡귀를 쫓는 의미로 널리 쓰였는데 아이들 손에 봉숭아물을 들이고 동지에 팥죽을 먹는 것이 모두 액막이와 연관이 있는 풍습이다.

    오방색에는 속하지 않지만 한국인이 특히 선호했던 색은 홍색이다. 홍색은 활력과 젊음을 상징하는 반면, 수줍은 처녀의 아름다움을 뜻하기도 했다. 전통 회화에서 미인을 상징하는 색이기도 했다.

    복종과 지배의 단심

    조선 시대에 이르러 빨강은 처음으로 정치적 의미를 획득했다. 복식체계를 정비하면서 임금이 입는 곤룡포를 붉은 색으로 정했다. 붉은 색이 임금의 색이 된 것이다.

    그러나 임금의 붉은 옷에는 사대주의의 그늘이 드리워 있다. 조선은 중국의 제후국이기 때문에 제후의 상징인 붉은 곤룡포를 입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중국의 천자는 노란 곤룡포를 입었다. 그래서 고종임금은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하고 중국의 영향력이 약화되자 황제의 상징인 노란 곤룡포를 만들어 입었다. 그러나 임금의 옷을 바꾼다고 국운까지 바뀌지는 않았다.

    임금이 무슨 옷을 입건 한편에서는 붉은 색이 다른 정치적 상징을 만들고 있었다. 유교, 그것도 성리학이 국가의 근본이념으로 격상되면서 “충”이 조선의 새로운 지배 이데올로기가 됐다. 조선의 개국 세력들은 새로운 국가를 만들고 새로운 사회를 짜면서 그 근본 구성 원리를 “충”에서 찾았다. 그 충성심을 형상화한 것이 바로 단심, 즉 ‘임을 향한 붉은 마음’이다.

    임금은 붉은 옷을 입고 지배하고 신하들은 붉은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한다. 이것이 조선이라는 나라가 기반하고 있던 정치체제였다. 그러나 모든 이데올로기는 그 자체로서 허위의 이념이기도 하다. 조선의 정치사는 왕자가 왕자를 죽이고, 임금이 신하들을 죽이고, 신하가 임금을 죽이는 피의 역사였다. 나름대로 붉은 역사이기는 했다.

    외세의 상징

    조선의 국운이 쇠하면서 주변의 열강들이 앞다투어 한반도에 진출했다. 그러나 마지막 승자는 욱일승천기를 앞세운 일본제국주의였다.

    이후 40년 가까이 일본인들은 자기네 국기의 붉은 색으로 한반도를 지배했다. 시골의 작은 촌에도 일장기가 걸리고, 큰 행사마다 붉고 흰 상징물들로 장식됐다. 더 나아가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을 강제로 천황의 군대에 편입시켜 욱일승천기를 들고 중국과 남태평양에서 싸우게 했다. 붉은 색은 수탈과 압제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동아일보 이길용 기자는 청산가리 용액으로 손기정 선수 가슴의 일장기를 후벼 파듯이 지웠다. 그 대가로 총독부는 동아일보, 조선중아일보 같은 민족계 신문들을 정간하고 길들이기에 나섰다. 다급해진 조선인 신문자본가들은 총독부에 항복했고 이후 총독부의 기관지나 다름없는 친일신문을 찍어냈다.

       
    ▲ 지워진 일장기와 덧붙여진 일장기, 손기정 선수 가슴의 일장기를 지운 36년 8월 24일자 동아일보 사진과 일장기를 제호 위에 인쇄한 36년 1월 1일자 조선일보
     

    저항의 상징

    한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는 편도 붉은 색을 상징으로 삼았다. 좌우의 구분이 없던 초기 독립운동은 식민지배의 말기로 접어들면서 사회주의 색채가 강화됐다. 적색노조니 홍비(만주의 무장독립단체들을 일본경찰이 붉은 도적떼라 지칭한 말)니 하는 말들이 생겨나고 이들은 내지와 조선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황국신민들의 적으로 규정됐다.

    1925년 조선공산당이 국내에서 결성되기 이전에 수많은 사회주의 조직들이 해외의 망명지에서 결성됐다. 조선공산당은 결성될 때마다 일제 경찰의 탄압으로 무너졌다. 무너진 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한 마지막 조직적 시도였던 이재유의 ‘경성콤그룹’이 발행했던 기관지의 이름은 ‘적기’였다. (안재성, <경성트로이카>)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일제의 탄압을 피해 지하에 숨어있던 좌익 인사들이 하나 둘 씩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제국주의 지배세력의 패배와 조직도니 정치세력의 부재라는 상황 속에서 조선공산당을 결성하고 각종 대중단체를 결성해 빠른 속도로 정국을 장악해 나갔다.
    식민시대 말기 다수의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제국주의에 투항했다는 사실이 좌익의 주장과 활동에 정통성을 부여했다. 많은 대중들이 ‘인민공화국’의 깃발 아래 모였다.

    <동아일보> 1946년 8월 13일자를 보면, 해방 후 어떤 국가 수립을 원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 8,453명 가운데 70%(6,037명)가 사회주의를, 7%(574명)가 공산주의를 선호한다고 답했다. ‘적색’이 한국 사회에서 또 다른 정치적 의미를 획득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해방 후 정치공간에서 적색이 누렸던 이 지배적 위치는 불과 5년도 채 되지 않아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조선공산당, 인민당 등 적색을 지향했던 정치세력들이 남조선로동당으로 통합하고 이어서 지하로 들어갔으며 일부는 북한으로 또 일부는 지리산 자락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됐다. 그리고 전쟁이 벌어졌다.

       
    ▲ 현대자동차노동조합 간부들이 입는 ‘빨간 조끼’. 사회적 터부에도 불구하고 한국 노동운동은 빨간 색을 단결과 투쟁의 상징으로 삼았다. 그러나 2005년 현대차노조 비리사건이 터지면서 ‘빨간 조끼’는 또 다른 권력이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반공시대의 시작

    손호철 교수는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좌익편향의 정치질서가 우익편향의 정치질서로 순식간에 역전됐다고 분석했다. 한국정치에서 붉은 기운이 일순간에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이런 역전은 반공을 기치로 했던 이승만 정권이 전쟁 이후에도 계속 집권하면서 강화됐다.(<전환기의 한국정치>)

    붉은 것과 연관이 있다는 의심이 들면 무조건 사라져야 했다. 그래서 국가보안법이 만들어지고 좌익뿐만 아니라 이승만 정권의 입장에서 좌익이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도 마구잡이로 적용됐다. 이승만의 강력한 경쟁자였던 진보당의 대통령 후보 조봉암처럼 말이다.

    연좌제와 사회적 배제를 통해 위력을 발휘한 반공사냥은 좌익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조차도 무언가 붉은 기운이 도는 것만 보면 가슴을 쓸어내리게 만들었다. 이 대중적 피해의식은 레드 콤플렉스라는 이름을 얻었다. 하지만 레드 콤플렉스의 연원은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불원한 장래에 사어(死語)사전이 편찬된다고 하면 빨갱이라는 말이 당연히 거기에 오를 것이요, 그 주석엔 가로되, "1940년대의 남부 조선에서 볼셰비키, 멘셰비키는 물론, 아나키스트, 사회민주당, 자유주의자, 일부의 크리스찬, 일부의 불교도, 일부의 공맹교인(孔孟敎人), 일부의 천도교인, 그리고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들로서 사회적 환경으로나 나이로나 아직 확고한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잡힌 것이 아니요, 단지 추잡한 것과 불의한 것을 싫어하고, 아름다운 것과 바르고 참된 것과 정의를 동경 추구하는 청소년들, 그밖에도 000과 0000당의 정치노선을 따르지 않는 모든 양심적이요 애국적인 사람들(그리고 차경석의 보천교나 전용해의 백백교 등도 거기에 편입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사람을 통틀어 빨갱이라고 불렀느니라. (채만식 <도야지>)

    그러나 채만식의 전망과 달리 빨갱이라는 낙인은 죽은 말이 되기는커녕 그 후로도 꽤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면서 ‘반공국가’를 형성했다.

    이런 반공체제는 1960년 4월혁명으로 잠깐 숨통이 트이는가 했지만 뒤이어 벌어진 군사쿠데타로 인해 원점으로 돌아갔다. 아니 더 철저하게 강화됐다. 반공은 쿠데타를 일으킨 젊은 장교들의 거사명분이기도 했지만 한때 남로당원이었던 박정희의 전력을 덮기 위해 더욱 강화됐다는 분석도 있다. 심리학적으로 말하면 박정희가 자신의 좌익경력이라는 트라우마를 지우기 위해 더욱 폭압적인 반공체제를 선택한 것이다.

    ‘실미도’는 공산주의 찬양 영화?

    ‘실미도사건’을 일으킨 684부대의 유족들은 지난 2004년 12월 영화 ‘실미도’가 훈련병들을 용공분자로 묘사해 명예를 훼손했다며 영화사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영화 속에서 훈련병들이 북한 노래 ‘적기가’를 부르는 장면을 문제 삼은 것이다.

    소송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일부 우익단체들이 영화상영을 중지하라며 소동을 피우기도 했다. 모방송사는 이 영화를 TV방영하면서 적기가가 나오는 장면을 삭제하기도 했다.

    적기가는 해방이전부터 노동운동진영에서 널리 불려지던 노래였다. 서구의 노동가요인 ‘레드 플래그'(The Red Flag)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어 노래말이 붙고 1930년대에 식민지 조선에 유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방정국을 관통한 사람들은 모두 ‘적기가’를 한번쯤은 들어봤을 정도라고 하니 당시 이 노래가 얼마나 널리 퍼져 있었는지 짐작이 간다. 재야운동가 예춘호 선생은 94년 한 인터뷰에서 적기가와 관련한 추억을 회고했다.

    “제가 살던 동네는 부산의 영도였어요.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당시엔 조선소들이 운집되어 있던 공장지대였지요. 점심때가 되면 전평의 조직원들이 나와 노동자들을 집결시켜 놓고 적기가를 가르쳐 주고 함께 노래 부르지요. “압제와 수탈 밑에서 살아온 무산자들이여…”하는 투의 노래는 사람들의 가슴을 움켜잡기에 충분하였고 한번 집회가 끝나면 수십 명의 사람들이 조직 가입원서에 도장을 찍게 돼요.”

       
    ▲ 짐 코넬을 기념해 만들어진 부조

    적기가는 1889년 아일랜드 공화주의자인 짐 코넬(Jim Connell)이 만들었다. 그는 차링 크로스에서 뉴 크로스로 가는 기차 안에서 런던 부두파업, 아일랜드 토지동맹, 파리 꼬뮌, 러시아와 시카고 무정부주의자 등에 영감을 받아 이 노래를 써 내려갔다.

    오늘날에는 독일민요 ‘소나무'(탄넨바움, Der Tannenbaum)의 리듬에 맞춰 부르는 이 노래는 순식간에 국제노동운동의 찬가가 됐고, 1925년부터는 영국 노동당의 주제가가 됐다. 1945년 새로 선출된 노동당 하원의원들은 첫 등원 때 이 노래를 부르며 입장했다.

    노동당은 1999년 당대회 이후 이 노래를 금지하다가 2003년 당대회에서 부활시켰다. 그러나 블레어 총리를 비롯한 ‘신노동당’계 당간부들이 가사를 제대로 몰라 노래를 마저 부르지 못하는 모습이 언론에 포착되기도 했다.

    빨강은 나의 힘, 남한과 북한

    기나긴 군사독재의 시대는 반공이 도덕인 시대였다.

    학교 대문 머리맡에는 방공, 멸공 같은 표어가 붙어있고, 때마다 반공 웅변대회를 하고, 반공 포스터를 그리고, 가끔은 무슨 궐기대회를 위해 시민운동장에 동원됐다. 단순하고 반복적인 반공교육은 적색에 대해 태생적인 알레르기를 만들어 냈다. 그 위력은 엄청났다. 7·4 남북공동성명 후 남한을 찾은 북측대표단을 보고 “공산당은 얼굴도 빨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서” 놀라는 웃지 못 할 일이 여기저기서 벌어졌다.

    이승만 집권 때와 마찬가지로 연이은 군사정권은 적색에 대한 대중의 반감을 자신들의 반대파에게 덧씌워서 재미를 봤다. 유신의 철폐를 요구하거나, 노동운동을 하거나, 학원의 민주화를 요구하거나 모두 ‘빨갱이’로 묶어 버렸다. 심지어 대한민국의 국시는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 되어야 하지 않겠냐고 발언한 국회의원도 빨갱이로 ‘판명’돼 국회에서 제명됐다.

    빨갱이 사냥의 변형된 형태로 지금도 사라지길 거부하는 잔재는 ‘색깔론’이다. 색깔론의 특징은 이름처럼 후보들의 색깔을 놓고 다양한 토론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특정후보를 놓고 붉으냐 아니냐 만을 따진다는 점이다. 역대 선거 때마다 이 색깔론은 야당후보를 괴롭히는 무기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색깔론을 처음 고안해 낸 것은 1963년 대선에서 ‘야당’후보인 윤보선이 ‘여당’ 후보 박정희의 좌익 전력을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반공의 시대 빨강은 증오의 색이며 공포의 색이었다. 동시에 정권의 입장에서는 안 되는 것이 없는 도깨비 방망이였다.

    반면 북한에서 빨강이 정권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색이 됐다. 혁명가극 ‘피바다’와 ‘붉은기쟁취운동’처럼 붉은 것은 순수함과 올바름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런 붉은 정통성은 오직 조선노동당과 당의 지도자를 통해서만 재생산 될 수 있다. 말하자면 붉은 것은 북한의 인민이 아니라 위대한 지도자인 것이다. 결국 북한에서 빨강은 그 이전 시대와 비슷한 의미로 돌아갔다. 무한한 충성과 아버지와 같은 지도자의 이미지를 상징하는 색이 됐다.

    변화의 붉은 물결

       
    ▲ ‘좌파가 되자?’ 붉은 악마의 구호는 ‘한국논단’과 같은 우익잡지들이 밤잠을 설치게 만들기 충분했다.
     

    한국사회에서 빨강의 의미는 2002년을 거치면서 드라마틱하게 변했다. 반공이데올로기의 공포와 대중들의 마음 깊숙이 깔려있던 피해의식이 한 꺼풀씩 벗겨지는 조짐들이 보였다.

    우선 월드컵을 기점으로 전국을 강타한 붉은 악마의 열풍은 이념의 영역에 갇혀 사망 직전에 있던 빨강을 복권시켰을 뿐만 아니라 광장으로 불러냈다. 찬반론을 넘어 붉은 악마 열풍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존재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붉은 악마의 열풍이 반공이데올로기에 짓눌려 있던 빨강을 21세기에 다시 불러오는 씻김굿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2002년 대선에서는 색깔론이 거의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리고 좌파정당을 자임하는 정당의 후보가 TV토론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여과 없이 발표하기도 했다. 빨강의 사회적 복권은 시장에서도 이뤄졌다. <레드 마케팅>이라는 책이 나올 정도로 붉은 색은 상품, 광고, 기업이미지 등 여러 영역에서 활용됐다.

    40년 전 한 외국인의 눈에 비친 한국은 소용돌이치는 사회였다. 그리고 한국사회는 여전히 격렬하게 소용돌이 치고 있다. 그 소용돌이가 크게 한번 방향을 꺾을 때마다 빨강을 둘러싼 우리의 입장과 태도는 극명하게 바뀌었다. 그리고 지금 그 소용돌이가 다시 한번 방향을 꺾으려 하고 있다.

    앞으로 한국사회와 한국인은 적색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일까. 여전히 공포와 우려의 대상으로 남아있을까, 아니면 단결과 연대의 상징으로 바뀌어 있을까?

    눈에는 눈, 빨갱이에는 빨간 해병대?

    우익단체들의 집회를 보면 군복 입은 참가자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유독 빨간 스카프를 두른 사람들이 쉽게 눈에 들어온다. 바로 ‘해병전우회’다.

    한국전쟁 이후 빨강은 사회적 금기의 색이었다. 단체건 기업이건 붉은 색을 자신의 상징으로 삼는 것은 피해야 할 덕목이었다. 유일한 예외는 ‘해병대’였다.

    붉은 색이 금기시되던 시대에 해병대는 붉은 색, 그것도 공산당의 깃발과 똑같은 빨강-노랑의 조합을 상징으로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사회학자들은 이런 예외가 가능했던 이유가 사회를 지배하던 이념코드와 전쟁코드가 서로 다른 것이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학자들은 붉은 악마가 사회적으로 용인 된 것은 사회를 지배했던 이념코드가 약화되고 이와 전혀 상관없는 문화코드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라고 본다.

    역사를 보면 러시아혁명 이전에 붉은 색은 이념보다 전쟁의 의미로 사용됐다. 로마시대부터 붉은 색은 군신 마르스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로마의 군대가 붉은 색으로 치장하고 붉은 깃발을 들고 다닌 것은 마르스의 힘을 빌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전통을 빌어 영국과 프랑스는 1차세계대전 직전까지 자국의 군인들에게 붉은 색 군복을 입혔다. 여기에는 심리적인 흥분상태를 조장해 병사들의 전의를 북돋우려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참고로 해병대의 붉은 색은 피를 노란 색은 땀을 상징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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