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 속의 레드 - 권력의 상징에서 혁명의 상징으로
        2006년 04월 03일 07:3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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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사회에서 각각의 정치 이념들은 색깔로 구분된다. 나라별로 차이는 좀 있지만 대체로 청색은 보수주의, 녹색은 생태주의, 흑색은 무정부주의 혹은 파시즘을 상징한다. 적색은 사회주의와 좌파의 상징으로 굳어진 지 오래다.

    그러나 태초부터 사회주의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빨강 색의 정치적 의미는 역사의 매 시기마다 달랐다. 크게는 권력과 지배의 상징에서 혁명과 반역의 상징으로 변천했다.

    권력의 상징

    고대 로마가 아직 공화국이던 시절 정치인들은 자신의 몸에 붉은 천을 둘러 평민들과 구분했다. 실제로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같은 라틴계 언어에서 왕과 빨강을 뜻하는 단어들은 형태가 유사하다. 아마도 로마가 초기 부족국가이던 시절 이 지역의 족장들은 붉은 장식을 즐겼던 모양이다. 하지만 공화국을 무너뜨린 정치군인들이 붉은 색으로 로마를 치장한 이유는 따로 있다.

    고대 로마에서 붉은 색은 전쟁의 신 마르스를 상징했다. 로마의 장군들은 출정하기 전에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 마르스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그 피를 얼굴에 바르는 의식을 치렀다. 그리고 자기의 부대를 붉게 장식해서 신의 보살핌이 함께 하기를 기원했다.

    제국이 확대되고 군인이 증가하면서 군인들이 권력을 잡게 되고 자연스럽게 붉은 색은 로마의 상징이자 권력의 상징이 됐다. 카이사르 이후 로마의 황제들은 붉은 색 천을 몸에 둘러 신성함과 고귀함을 나타내고자 했다.

       
    ▲ 카이사르의 개선 행진. 사진은 TV드라마 <로마>의 한 장면이다. 히틀러는 로마 시대의 개선행진을 모티브로 삼아 1934년 나치당의 뉘른베르크 전당대회를 치렀다. ⓒ HBO
     

    후에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로마의 종교로 받아 들였을 때 황제의 붉은 권위는 교황의 상징으로 대물림됐다. 지금도 교황과 추기경은 붉은 색 사제복을 입는다.

    로마 이후 유럽에서 빨강은 왕과 귀족의 색이었다. 지배계급의 색이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심리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경제적인 이유가 더 컸다. 당시 염색 기술이 발달한 동방과 달리 유럽에서는 빨간 색 염료가 가장 비쌌다. 또한 노동집약적이었다. 빨간색 염색은 다른 색과 달리 많은 인력이 동원되고도 일주일 작업을 해야 됐다.

    따라서 붉은 색 옷감은 경제적 능력과 권력을 모두 가진 계급만이 소유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아예 신분이 낮은 이들이 붉은 색 의복을 갖춰 입는 것을 금지했다.

    붉은 색은 높은 신분과 낮은 신분을 나누는 상징이 됐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빨강은 오래 전부터 단결의 상징으로도 사용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종교와 빨강

    현재 남겨진 역사 기록 중 종교와 빨강의 관계를 언급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이집트에 있다. 이 기록에 보면 태양의 열기가 생명을 위협하는 이집트에서는 빨강을 악마의 색으로 여겼다. 그래서 빨갛게 만든다는 말이 죽인다는 협박의 의미로 사용됐다고 한다. 고대 이집트의 마법사들은 이시스신에게 빨간 것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달라고 기도했다.

       
    ▲ 백인 인종주의단체인 KKK의 리더는 흰망토 대신 붉은 망토를 입는다. 혐오스러운 레드의 대명사다.

    기독교에서 빨강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상징한다. 기독교의 교리에서 빨강은 구원을 위해 예수가 흘린 피다. 카톨릭에서 미사 때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성스러운 피를 받아마시는 의식이다.
    그러나 바티칸의 독특한 교계제(Hierarchy)에서 사용하는 붉은 색은 예수의 고난이 아니라 로마 황실의 전통에서 비롯됐다.
    참고로 지금 우리가 익숙한 산타클로스의 이미지는 코카콜라의 판촉물을 통해 형성됐기 때문에 산타의 붉은 옷도 코카콜라사의 붉은 로고와 연관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산타의 붉은 옷은 산타클로스의 모델이 된 성 니콜라스가 주교였기 때문에 당시 주교들이 입던 붉은 주교복에서 유래됐다.
    불교에 경우 소승불교라고도 하는 남방불교의 경우 붉은 색은 승려를 상징한다. 지금도 동남아시아 불교국가의 승려들은 붉은 사리만을 입는다. 남방불교의 영향을 받은 티벳불교와 라마교도 승려들은 붉고 노란 사리를 입는다.
    이슬람은 특별히 붉은 색에 신성한 기운이나 혹은 부정적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을 겪은 이후 붉은 십자가에 대한 공포를 가지게 됐다고 한다. 국제적십자의 경우 이슬람권에서는 붉은 십자가 대신 붉은 초생달을 사용한다.
    그러나 같은 이슬람권이라 하더라도 터키처럼 뒤늦게 이슬람을 받아들인 경우 자기네 전통 문화속의 붉은 색과 이슬람 교리를 결합시키기도 했다.

    반란의 상징

    8세기 후반 지금의 이란에서 일어난 고르칸 폭동(778∼779년)에서는 농민들이 붉은 깃발을 들고 싸웠다. 또한 896년 통일신라의 서남부 지방에서 ‘적고적(赤袴賊)’이라는 도적떼가 발생했다는 기록이 있다. 적고적은 단결의 표시로 붉은 바지를 입은 데서 비롯된 이름으로 이들은 모두 농민반군이었다. 중국의 홍건적들도 붉은 수건을 단결과 저항의 상징으로 삼았다.

    문화사 학자들은 초기 농민봉기에서 붉은 깃발이 자주 사용된 이유가 다른 색에 비해서 잘 바래지 않기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전통적인 역사학자들은 붉은 색이 주는 강렬한 인상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서유럽에서도 16세기 폭동을 일으킨 독일의 농민들이 붉은 깃발을 사용한 것을 비롯해 1760년대 서인도제도를 무대로 활동하던 여자해적들은 꼬뮌을 건설하고 적기를 내걸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해적들은 이 깃발을 프랑스어로 졸리 루지에(붉고 아름답다는 뜻)라고 부르면서 자유를 위한 투쟁의 상징으로 삼았다고 한다.

    프랑스에서는 1792년 라 파예트에 맞선 시민들이 ‘왕족들의 반항에 대한 인민의 계엄령’이라고 적힌 붉은 깃발을 들고 나왔다. 같은 해 자코뱅 당원들도 붉은 깃발을 자유의 깃발로 선언했다.

       
    ▲ 파리 꼬뮌을 기념하기 위해 제1차 인터내셔널에서 만든 판화들
     

    적기는 이미 1797년에 노동자들이 저항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영국해군 기함인 퀸 사롯트 호의 선원들이 포츠머스항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투쟁기간 동안 적기를 게양했는데 이것은 원래 공격을 의미하는 영국 해군의 신호였다.

    이 함대의 제독은 마침내 선원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약속했으나 이 반란의 주동자인 발렌타인 죠이스는 선원들에게 킬로든 호를 기억하라고 경고 했다. 킬로든 호의 반란은 처음에는 성공적으로 보였으나 선원들이 다시 일터로 돌아갔을 때 당국에서 주모자 열명의 목을 매달아 버렸던 것이다.

    발렌타인 죠이스는 자기들이 다시 일터로 돌아가기 전에 처벌하지 않겠다는 내용을 보장하는 국회 법안을 만들어 양원을 통과시켜 줄 것을 요구 했다. 해군의 상황이 당시 너무 절박했으므로 수상인 윌리엄 피트는 영국 왕 조지 3세를 협박해 서명하게 함으로써 이 법안은 48시간만에 통과되었다. 180건 이상의 유사한 반란이 넬슨 경의 해군에서만 일어났다. (파츄스카 안나 <사회주의>)

    좌익의 상징

       
     

    붉은 깃발이 프롤레타리아혁명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것은 1871년 파리꼬뮌이 성립된 이후다. 프랑스 대혁명 때도 붉은 깃발이 등장하기는 했지만 당시 프랑스인들이 혁명의 상징으로 여긴 것은 자유, 평등, 박애를 의미하는 삼색이었다.

    꼬뮌의 붉은 깃발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주도로 1867년 결성된 제1차 인터내셔널을 통해 국제 노동계급 운동의 상징으로 채택됐다. 이 때부터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하면 붉은 깃발을 떠올리는 전통이 시작됐다.

    하지만 사람들의 머릿속에 붉은 깃발의 이미지를 강력하게 심어준 것은 50년이 지나 러시아에서 일어난 볼셰비키 혁명이다. 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탄생한 노동자 국가는 온통 붉은 것들 일색이었다. 붉은 깃발, 붉은 별, 붉은 군대 심지어는 붉은 광장까지. 자본주의 국가의 적색알레르기도 이 때 시작됐다.

    적색은 노동운동의 상징이기도 하다. 1834년 프랑스 리옹에서 비단 직조공들이 봉기 했을 때 붉은 깃발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라틴 아메리카나 아시아에서 노동운동이 붉은 색을 선호하는 것은 사회주의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일찍이 기독교계 노동운동이 발달했던 유럽에서는 사회주의라는 의미와 별개로 붉은 색을 단결의 상징으로 삼았다. 지금도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 남아있는 기독교계 노총들 역시 붉은 색 로고와 깃발을 사용하고 있다.

    붉은 광장은 붉지 않다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은 사람들의 상상과 달리 전혀 붉지 않다.
    옛 소련 시절 크렘린 궁전 앞의 붉은 광장을 관통하는 소련 군대의 이미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1917년 혁명 이후 볼셰비키들이 혁명의 승리를 자축하며 붉은 광장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붉은 광장은 러시아 혁명 훨씬 이전부터 ‘붉은’ 광장이라고 불렸다. 전혀 붉지 않은데도 말이다.

     
    ▲ 모스크바 붉은 광장 전경
     

    그 비밀은 러시아어에 있다. 붉은 광장은 처음에는 상업광장, 화재광장 등의 이름으로 불리다가 17세기 말부터 크라스나야(krasnij) 광장이라고 불리게 됐다. 러시아어의 크라스나야는 아름답다는 뜻이다. 즉 아름다운 광장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러시아어의 크라스나야는 붉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영어로 옮겨지면서 아름다운 광장 대신 붉은 광장으로 소개됐다.

    공포의 상징

    옛 사회주의 국가의 붉은 색이 항상 같은 의미였던 것은 아니다. 스탈린 독재가 시작된 후 소련에서 빨강은 혁명과 사회주의의 상징이라기보다 애국의 상징이 됐다. 결정적인 계기는 히틀러와 맞서 싸운 독소전쟁, 러시아식 표현으로는 조국전쟁을 거치면서부터다.

    모스크바가 함락될 위기를 넘기고 스탈린그라드의 참혹한 공방전을 겪으면서 노동자 국제주의는 조국방어로, 혁명의 지도자는 자애로우면서도 불가능을 모르는 전능한 아버지의 이미지로 교체됐다. 붉은 군대는 파시스트들로부터 조국을 구한 신성한 영웅이 됐다.

    박노자 교수는 한 기고문에서 “위대한 소비에트연합과 빨간 깃발에 충성을 다짐하는 것이 훌륭한 삶”이라고 배웠던 옛 소련에서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그때의 죽마고우들 중 비판적 지식인을 부모로 둔 친구들조차도 ‘조국의 부름을 받아 총을 드는 것’을 신앙생활처럼 여겼다고 회상했다.

    스탈린 시대에 무자비한 숙청을 통해 희생된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이후 소련을 지배했던 스탈린주의 관료들이 저지른 탄압과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옛 소련에서의 빨강은 애국과 죽음을 강요한 적색이었다.

       
    ▲ 마오주석만세! 마오주석어록을 들고 문화혁명의 승리를 다짐하는 홍위병들을 그린 중국인민화
     

    이는 중국도 마찬가지다. 문화혁명의 시대에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는지는 지금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결국 사회주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실험이라고 자평했던 문화혁명은 홍위병들이 패거리를 나눠 내전을 벌이는 지경에까지 가서야 문화적이지도, 혁명적이지도 않다는 것이 드러났다. 중국 현대사에 깊은 상처를 남긴 문화혁명 시대의 붉은 색은 광기의 홍색이었다.

    그러나 혁명의 의미를 퇴색시킨 네거티브 레드의 절정은 캄보디아의 폴 포트 정권이다. 1975년 혁명으로 집권한 폴 포트는 1979년까지 150만명에서 200만명을 학살했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다. 농민 공동체 사회를 건설한다는 이유로 지식인과 도시민들을 무차별로 학살했다. 안경을 쓴 사람은 지식인으로 취급돼 무조건 처형됐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쯤 되면 절망의 레드라고 부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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