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장 통제력, 노조와 자본의 대결
    “위장 취업자에서 늙은 노동자로, 어언 30년" (6)
        2018년 01월 26일 09:3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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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리 해고의 정치경제학 2: 살아남은 자들의 이야기

    정리 해고 사태가 발생하면 거리로 쫓겨난 정리 해고자들의 고통과 정리 해고를 자행한 자본에 대한 분노를 이야기하지,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모두 그들에게 해고된 자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연대하라고 호소하고 촉구하지만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은 바라보지 않는다. 해고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고, 그들처럼 공장에서 일하는 것이 정리 해고자들의 목표인데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이라니? 하지만 우리는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도 이야기해야 한다.

    쌍용자동차 정리 해고 후에 회사 정문 앞에서 규탄 집회가 자주 열렸다. 해고되지 않은 노동자들의 출근 모습을 보았다. 지하철 개찰구 모양과 똑같은 장치에 출입증을 대고 들어가면서 눈을 부라리고 있는 경비(혹은 용역 깡패)의 시선을 통과해야 한다. 퇴근하는 모습도 보았다. 회사 정문 밖에서 집회를 하고 있으면 안에서 통근버스가 나온다. 차 안에 있는 노동자들은 한결같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공장 안의 쌍용자동차 노동자 삶을 생각해 보았다. 이전보다 노동 강도는 엄청 강화되어 살아남은 자들이 해고된 동료들의 몫까지 일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쌍용자동차에 갈 때마다 나의 기억은 대우자동차의 2001년으로 빨려 들어갔다. 대우자동차 정리 해고 후에 공장에 공권력이 투입되고 노동조합은 산곡동 성당으로 쫓겨났으며, 공장에는 노동조합이 없었다. 그리고 노동조합은 정리 해고자 복직을 위해 투쟁하는 조직이지 공장에 남아 있는 노동자들을 위한 조직은 아니었다.

    노동 강도는 높아지고, 연월차 쓰는 것도 잔업 특근에 빠지는 것도 힘들어진다. 아침 30분 전에 출근해서 청소하라면 군소리 없이 해야 한다. 어떤 때는 작업이 끝나서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갑자기 잔업이 잡혔다면서 일을 하라고 해서 부랴부랴 다시 작업복을 갈아입고 라인을 탄 적도 있다. 여기에다 회사가 주도하는 집회에 꼬박꼬박 참석해서 ‘지금 중요한 것은 정리 해고자 복직이 아니라 회사를 정상화시키는 것이다’라는 말을 지겹도록 들어야 한다.

    거리로 쫓겨난 동료들은 공장에서 일하는 조합원들을 부러워하겠지만, 이들도 하루하루를 감옥살이하는 심정으로 보내야 했다. 노동조합이라는 보호막이 사라지고 자본의 자유로운 전횡이 허용되는 순간, 공장 기계는 순식간에 감옥 기계로 돌변한다. 이전에 친근했던 관리자는 억압자의 모습으로 귀환한다.

    쌍용자동차에는 금속노조 쌍용자동차 지부와는 별개로 공장 안에 별도의 기업 노동조합이 만들어졌다. 새로 만들어진 기업노조는 정리 해고자가 아닌 살아남은 조합원들을 대변하겠다고 했다. 대우자동차에도 회사 측 주도 아래 ‘대우자동차 정상화 추진위원회’라는 조직이 만들어졌다. ‘추진위’에는 해고되지 않은 대의원들, 전직 임원들 대부분이 회사에 의해서 거의 강제적으로 참여했다. ‘추진위’의 주장은 ‘GM이 하루빨리 대우자동차를 인수해서 대우자동차가 정상적으로 가동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살아남은 자들의 살 길을 찾자’는 것이다.

    아마도 이 당시에 기업 내 복수노조가 허용되었더라면 ‘추진위’는 기업노조로 전환되었을 것이다. ‘추진위’는 정리 해고자들, 살아남은 자들 모두가 싫어했다. 이후 모든 현장 조직들은 자기 조직 내에 ‘추진위’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전면에 세우지 않는 방식으로 ‘추진위’의 흔적을 지우고, 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회사에 대해 분노와 배신감을 가진 정리 해고자들이 복직하면서 이들을 중심으로 현장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억눌려 지낸 살아남았던 자들은 속으로 박수를 친다. 일방적으로 기울어져 있던 힘 관계가 현장에서부터 조금씩 바로 잡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자들은 어쩌면 정리 해고자들의 복직 그 자체보다 복직 이후 이 지겨운 공장 감옥의 상

    태에서 자신들이 풀려나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또 이 점이 자본이 정리 해고자들을 복직시키고 싶지 않은 가장 중요한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회사가 정리 해고자들이 복직해서 그동안 다잡았던 현장 규율과 통제력을 이완시키는 상황을 꺼려하는 것은 당연하다.

    공장은 움직이지 않으면 몸을 옥죄어 오는 기계와 같다. 노동조합이 없어지거나, 힘이 약해지면 자본은 이때다 싶어서 노동자들을 옥죈다. 하지만 노동조합은 귀환하고 조합원들은 다시 일어섰다. 시인 김수영이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고 노래했던 그 풀들처럼 말이다.

    현재 공장 관리 체계의 구조는 87년 이전과 별 다를 바가 없다. 노동자들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구조다. 어찌 보면 87년 이전보다 더욱 강화된 짜임새를 가지고 있다. 회사는 현장 조합원들의 강화된 투쟁에 대응하기 위해 현장 관리 시스템을 지속적으로 강화해 왔다. 노동조합도 이에 대응하기 위해 현장 조직력을 강화하는 데 모든 힘을 쏟아왔다.

    우리는 이를 ‘현장 권력’을 둘러싼 투쟁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러한 균형이 깨지는 순간이 온다. 노조가 패배하거나 쫓겨나는 순간이다. 현대나 기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기아자동차 위원장이 한국GM(당시 GM대우) 집회에서 발언한 적이 있다. IMF 전후로 구조조정의 공포에 시달리던 기아자동차에서 한 나이든 노동자가 관리자에게 화장실 간다는 말도 못하고 라인을 뜨지 못해 그 자리에서 오줌을 지렸다고 했다. 현장에서 힘의 균형이 무너지면 노동자 개개인이 얼마나 무력해지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한국GM뿐 아니라 현대나 기아 사측도 노동조합의 현장 통제력이 너무 강해서 회사의 생산 관리가 너무 힘들다는 불만이 많다. 그런 면이 있을 수도 있으나 모두 다 자신들의 업보다. 노동조합 힘이 빠졌다 싶으면 통제와 억압의 발톱을 드러내는 것을 수도 없이 겪었는데 어떻게 조합원들이 현장 통제력을 강화시키려 하지 않겠는가? 해외 진출한 한국 국적의 자본이 현지

    에서 보여주는 노동조합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보면 한국의 대다수 자본은 여전히 노동조합에 대한 적대적 시선과 태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힘이 있는 노동조합을 상대할 때만 어쩔 수 없이 양보와 타협을 하는 것이다.

    노동조합에 대한 적대적 시선을 거두고, 노동조합 필요성을 학교 정규 교과 과정에서 가르치고, 대통령이 나서서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말하는 그런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작업장 내 힘의 관계와 체계가 민주화되어야만 우리는 공장 감옥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한국GM 사무직 노동자운동

    <한겨레>에서 기획한 ‘좋은 일자리 프로젝트’에 한국GM이 소개된 적이 있다. 기사 내용 중 일부다.

    ‘국내 제조업종의 대기업 중’ 일과 삶의 균형 면에서 직원의 높은 평가를 받는 기업이 있다. 한국GM이다.’

    <한겨레>에서 말하는 직원은 한국GM 사무직 노동자를 말한다. 한국GM 사무직 노동자는 정년도 보장되어 있고 특히 일하는 분위기가 자유롭고 남녀 간 차별이 거의 없다. 취준생인 큰딸은 주변에서 한국GM을 ‘숨어 있는 보석’이라고 부른다고 내게 말해 준다. 여성들에게는 정말 좋은 직장으로 인식되나 보다.

    그런데 <한겨레>는 이런 근무 환경을 만든 원인을 ‘글로벌 GM의 기업 문화’라고 보도했다. 이 판단은 반은 맞고 반을 틀리다. 남녀 간 차별이 없는 것은 GM의 기업 문화 영향이 크다. 하지만 근무 환경이 전반적으로 좋아진 것은 GM의 기업 문화 때문이 아니라 바로 노동조합 때문이다.

    노동조합이 없을 때 한국GM 사무직은 ‘자동차 산업의 사관학교’로 불렸다. 동종 업계 사무직에 비해서 임금도 낮고 근무 환경도 좋지 않기 때문에 젊고 유능한 연구기술직, 사무직 노동자들이 한국GM에 입사해서 어느 정도 경험을 쌓으면 조건이 더 좋은 회사로 이직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사무직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고 회사와 투쟁하면서 내걸었던 구호가 ‘차별 철폐’였다. 누구와? 바로 생산직과 차별을 철폐하라는 것이다. 87년 이후 생산직 노동자들은 일관되게 사무직과 차별 철폐를 요구했다. 89년에 내가 대우자동차에 입사했을 때만 해도 생산직과 사무직은 명찰 색깔도 다르고, 임금 수준도 차이가 많이 났다. 그런데 지금은 사무직 노동자들이 생산직과 차별 철폐를 외친다.

    회사는 실제로 생산직과 사무직을 차별했다. 회사는 노동조합과 단체교섭을 통해 합의된 내용의 일부를 사무직에 적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비용을 절감하곤 했다. 한 예로 2011년에 생산직은 700만 원의 성과급을 받았지만, 사무직은 250만 원밖에 받지 못했다. 또한 회사는 사무직 임금 인상과 성과급을 인사고과에 따라 차별적으로 정하는 성과연봉제를 실시했다. 예를 들어 A등급을 받으면 10% 임금 인상, C등급은 임금 인상이 0%가 되는 식이었고 성과급도 차등 지급하였다. 이러한 자본에 의한 차별과 경쟁을 통한 통제에 대한 저항이 사무직 노동자들을 노동조합으로 결집하게 만든 힘이었다.

    또한 회사가 생산직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관리하는 데 동원되면서 느꼈던 사무직 노동자들의 굴욕감이 노동조합을 만든 힘이 됐을 것이다. 대우자동차 시절부터 회사와 노동조합 간 싸움에서 사무직 노동자들은 구사대 역할로 동원되었다. 91년 대기업 연대회의 사건으로 위원장과 노동조합 간부들이 대거 구속, 해고됐다. 그러던 어느 날 해고된 노동조합 간부 몇 명이 공장 담을 타고 넘어 들어와 공장 라인을 돌며 조합원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수많은 사무직들이 어디론가 뛰어가고 있었다. 바로 도장부 건물이었다. 조합원들이 도장부를 점거할 것을 우려한 회사는 사무직들을 동원해서 인의 장막을 만들었다. 정리 해고 투쟁 당시에도 사무직 노동자들은 도장부 건물에 들어가 같은 행동을 했다.

    대우자동차 해외 매각 반대 투쟁 당시에 회사는 조합원들이 공장 안에 설치한 농성 천막 철거를 시도했다. 이때도 사무직 노동자들이 동원되었다. 농성하고 있던 조합원들과 몸싸움을 한 사람들은 노사협력부 직원 몇 명에 불과했고, 다수의 동원된 사무직들은 굳은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이후 나는 몇몇 사무직 노동자들한테 이때 뿌리 깊은 굴욕감을 느꼈고 ‘반드시 노동조합을 만들겠다’는 결심을 굳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무직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려는 시도는 여러 번 있었지만 그때마다 회사의 탄압과 생산직 노동조합의 비협조와 무관심 때문에 좌절되곤 했다. 1999년부터 대우자동차가 워크아웃 대상이 되면서 구조조정의 파도가 밀려들고 사무직 노동자들이 고용 불안이 커지자 노동조합에 대한 요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요구가 너무 거셌기 때문에 회사는 그 물길을 정면에서 막으면 둑이 터져 버린다는 것을 알고, 터지지 않을 정도의 물길을 내어 준다. 당시 사무직들의 동호회 모임이었던 ‘대우자동차 사무노동 직장발전위원회’(일명 사무노위) 위원장을 직선제로 선출하고, 상근자도 보장해주는 일종의 준노조 성격으로 만들어서 노동조합에 대한 사무직 노동자들의 열망을 달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사무직 노동조합의 건설에 대한 의지는 꺾이지 않았고 결국은 사무노위는 해산되고 금속노조로 직접 가입한 사무지부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회사는 사무직 노동조합을 교섭 상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2012년 사무직 노동조합이 생산직 노동조합과 통합되면서 사무직 조합원의 수는 몇 백 명에서 순식간에 4,000명까지 늘어나게 된다.

    사무직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으로 결집하면서 회사는 고립됐다. 회사 편은 소수 임원과 노사협력부 직원들뿐이었다. 회사는 노동조합원들의 바다에 고립된 섬이 되었고 이들은 단지 노동자들 내부 분열의 틈바구니에서만 살아 남을 수 있게 됐다.

    요즘 50대 중반이 돼 동창모임에 나가면 대기업이나 금융권에서 사무직으로 일하던 친구들이 직장을 잃은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대기업 임원을 하는 한 친구가 나에게 정년이 몇 살인지 물었다. 60세라는 나의 대답에 상당히 부러워한다. 그 친구는 국내 굴지의 재벌 기업 임원인데 그곳은 40대 임원이 대세란다. 50대인 자기는 그냥 붙어있는 것이 눈치가 보인다고 한다.

    그나마 임원에 오르지 못한 사무직 노동자들은 그 전에 탈락해서 밀려나기도 한다. 한국의 자본은 사무직 노동자들을 경쟁이라는 맷돌에 갈아서 고혈을 쪽 빨아먹은 다음 쓸모없다고 내다 버린다. 밖에는 능력 있는 젊은 피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기에 내다 버려도 아까울 것이 없다. 어릴 때부터 서열화된 대학의 높은 고지에 오르기 위해 입시 경쟁에 시달리고, 취업 경쟁에서 나름 성공해서 대기업이라는 문턱에 진입했지만 본전도 못 뽑고 버려지는 것이다.

    2012년 한국GM 노조 집회 한 장면(출처=뉴스셀)

    나는 노조 집행 간부로 있었던 2012년, 사무직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의 한 식구가 된 후 첫 번째 ‘단체교섭 투쟁 전진대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 광장을 꽉 채운 조합원들, 특히 끝없이 밀려들어오는 사무직 노동자들의 행렬은 감동 그 자체였다. 사무직 노동자들의 억눌렸던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그해 단체협약 잠정 합의안은 찬성 18.7%, 반대 81.3%라는 사상 초유의 비율로 부결됐다. 진원지는 사무직 노동자들이었다. 사무직 노동자들은 잠정 합의안에 단지 8.4%만이 찬성표를 던졌다. 임금과 성과급을 인사고과에 따라 차등 지급하는 성과연봉제와 성과급 차등지급제 폐지가 잠정 합의안에 들어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노동조합은 자본의 경쟁 원리를 극복하려는 사무직 노동자들의 열망을 과소평가했던 것이다. 여기에 주간 연속 2교대제에 대한 불충분한 잠정합의안에 대한 생산직 노동자들의 불만이 보태졌다. 압도적 부결 후에 노동조합은 투쟁을 지속해서 인사고과에 따라 임금과 성과급을 차등 지급하던 성과연봉제와 성과급 차등 지급제를 폐지했다. 그리고 주간연속 2교대제의 시행 시기를 확정했다. 두번째 잠정합의안은 60% 찬성으로 가결됐다.

    한국GM 사무직 노동자들은 자본이 강요하는 경쟁 구조를 노동조합을 통해서 극복해 냈고 사무직 노동자들이 왜 노동조합으로 단결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었다. 나는 한국GM 사무직 노동조합의 활동이 한국 사회 사무직 노동운동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 의미가 과소평가되고 있다고 늘 생각해 왔다. 한국GM의 사례는 전국의 사무직 노동자들에게 하나의 모범으로서 널리 퍼져 나가야 한다.

    한국 사회는 오래전부터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간 차별과 학력에 따른 차별이 심한 나라로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87년 이후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으로 단결하고 투쟁한 결과, 이러한 차별은 많이 극복되었다. 한국GM을 비롯한 대기업 생산직 노동자들의 가장 큰 자부심은 아마도 사무관리직과 임금 차이가 별로 없다는 데서 나온다.

    그런데 정규직 노동자들의 상대적 고임금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주로 생산직 노동자들을 향한다. 그리고 “우리는 뼈빠지게 공부해서 대학을 가고 스펙을 쌓았는데, 어떻게 단순노동을 하는 노동자들 월급이 우리와 비슷하거나 더 많이 받을 수 있어”라는 말들이 나오기도 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뿌리에는 대학을 나오고, 시험을 쳐서 어려운 관문을 통과한 사람은 고임금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 단순노동에 종사하는 생산직 노동자는 낮은 임금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뿌리 깊은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간 차별 의식, 학력 차별 의식의 잔재 때문 아닐까?

    권력을 가진 자들이나 언론인, 학자들은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을 비판할 때, 항상 비정규직을 위한 듯이 포장한다. 그리고 유독 현대자동차 정규직을 필두로 주로 정규직인 대기업 생산직 노동자들을 비정규직을 외면하는 집단으로 공격한다. 비정규직 문제는 한국 사회 보편적인 문제이고 자기 옆에는 어디든 비정규직 노동자가 있다. 정규직 노동자들의 이기주의를 한탄하는 교수들은 정교수로서의 지위와 안정적인 수입이 시간강사, 조교들의 연구 노동을 착취한 결과는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정규직 이기주의를 비난하는 언론도 마찬가지다. 언론사의 데스크나 기자들 생활수준은 언론계 내부 무수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희생에 의해서 뒷받침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기 옆의 비정규직에 대한 태도를 분명히 하지 않고 비정규직 문제를 논하는 것은 위선이다.

    그리고 배제된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의 뿌리에는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차별에 대한 의식이 깔려 있다. 국민의 당 이언주 같은 사람이 ‘아무나 할 수 있는’ 노동, ‘밥이나 하는 동네 아줌마’ 노동이라고 말한 것처럼, 육체노동, 특히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에 대한 비하와 평가절하가 배제된 노동자들의 저임금, 착취 구조를 재생산하는 토대가 아닌가

    한국GM에서 생산직 노동자와 사무직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으로 단결한 것은 이 두 그룹이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평등, 같은 노동자로서의 연대를 이뤄냈다는 것을 뜻한다. 문제는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차별 극복이 소수의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에만 국한된 채 사회전체로 확산되고 있지 못하다는 데 있다.

    앞 회의 글 “정규직 노동자의 삶과 꿈 ②정리해고 : 죽은 자들의 이야기”

    필자소개
    노동자. 한국GM 도장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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