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박주영이 싫다. 왜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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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4월 01일 05:5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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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영은 분명 한국 축구가 소중하게 키워가야 할 유망주이다.

그의 공격수로서의 자질과 능력은 어디서나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가 스타로 등극한 것은 다른 축구 스타들과 마찬가지로 청소년 시절부터였다.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 대회 때, 중국과 시합에서 여러 명의 수비수를 이리 저리 끌고 다니다가 골을 넣었던 장면은 그야말로 환상이었다.

쉽사리 볼을 뺏기지 않는 볼 보유 능력, 유연하고 안정적인 드리블링, 순간적으로 방향을 꺾어 쏘는 터닝슛, 보기 좋게 휘어 들어가 골로 연결되는 프리킥. 적어도 기술적 측면에서 그는 (1920년 창립된 축구협회기준으로도) 100년이 다되어가고 있는 한국 축구의 역사를 빛냈던 그 어떤 스타 선수들과 비교했을 때에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아니, 그들을 뛰어넘는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고까지 평가받고 있다. 게다가 그의 이러한 기술적 능력들은 종종 절체절명의 순간에 골을 넣어 팀을 위기에서 구해내는 것으로까지 연결된다.

지난 2005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 대회 나이지리아와의 경기에서 우리는 이를 확인한 바 있다. 그의 스타성은 바로 여기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그의 능력은 비단 청소년급 경기 때만이 아니라 성인급 경기에서도 간간히 증명되곤 한다.

   

▲  카타르 청소년 축구대회 한국-우크라이나 경기에서의 박주영 (사진=연합뉴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박주영이 싫다. 왜냐고? 난 그에게서 상대방 선수들은 물론 자기팀 선수들, 그래서 시합 전체를 지배하는 ‘카리스마’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에게 그는 단지 ‘재능 있는 슛쟁이’일 뿐인 것이다.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와 <로마인 이야기> 등으로 유명한 시오노 나나미는 축구를 사랑하고 축구에 대해 대단히 해박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실제로도 그렇다. 그녀에게 축구는 ‘한 편의 휴먼다큐멘터리’이고, 그것은 나에게도 그렇다. 이런 이유로 그녀는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정몽준 한국축구협회 회장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한 바도 있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2000년 9월, 일본의 유명 스포츠 잡지인 <넘버플러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바 있다. “적극적인 뜻의 ‘카치베리아(cattiveria: 악의)’가 인간을 신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영국 프리미어리그와 함께 세리아A로 유럽축구의 양대 지존을 이루고 있는 이탈리아에서는 아쉽게 진 경기를 곧잘 카치베리아가 결핍되었다고 평한다고 한다.

시오노 나나미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카치베리아는 ‘궁극의 자기중심성’으로 스스로를(자기 자신이든 팀이든 간에) ‘싸움터의 주인’으로 만들어내는 힘이다. 그녀는 “스스로를 싸움터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전투에서는 언제나 승자가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박주영에 대해 난 이 지점에서 완전히 ‘꽝’이라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자질을 갖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워한다. 그는 아쉽게 진 경기를 너무나 많이 해왔고 하고 있다. 게다가 승리를 향한 오기어리고 무언가 집요한 눈빛과 꽉 다문 입술과 같은 단호하고 확신에 찬 표정과 제스처를 찾아내기도 힘들다.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을 주는 ‘정복자로서의 품새’를 눈 씻고 찾아봐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이 점에서 박주영은 박지성을 결코 뛰어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자질과 능력을 그 자체로만, 즉 ‘현란한 기술’의 차원에서만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난 박주영이 ‘악동 루니’가 되기를 바란다.

루니가 골을 넣은 경기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지지 않는다. 루니는 자기중심적 플레이를 한다. 하지만 결국 그것이 자기팀이 시합을 지배하게 하고 승리를 거두게 한다. 루니는 한마디로 강력하고 아름답다는 인상을 준다.

그의 플레이는 그의 표정과 움직임 하나하나가 함께 어우러져 ‘전사’의 풍모를 자아내며, 그만의 ‘아우라(aura)’를 형성한다. 팀의 다른 선수들은 그런 루니를 신뢰한다. 나는 공을 잡고 상대편 진영으로 질주하는 루니를 보면 전율을 느끼기까지 한다. 바로 그 순간 나는 축구의 미학을 체감한다. 축구의 존재가치를 그리고 그것의 위대함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난 적어도 한 나라를 대표하고 그 나라의 미래를 지고 나갈 유망주라면 단지 ‘본 조카토레(Buon Giocatore:좋은 선수)’가 아니라 ‘포리 클라세(fuori classe: 급수를 뛰어넘는 초급 선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오노 나나미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런 그녀는 간간히 케사르와 같은 영웅을 갈구하거나 혹은 영웅이 되고자 하는 ‘마초적’ 관점을 갖고 있다고 비난받는다. 난 설사 그렇다고 하여도 그런 그녀를 더 가깝게 느낀다.

그간 살아온 나의 삶이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며,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 간직할 내 삶의 철학이 그러할 것이다(그러다가 부러져 죽음에 이를지도 모르지만). 중학교 시절에 내 책상 앞에 붙여두었던 나만의 경구가 있었다. “‘약한 자의 슬픔’ 보다는 ‘강한 자의 고뇌를’”이 그것이다.

난 강한 자의 고뇌가 약한 자의 슬픔보다 훨씬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약자도 강할 수 있다는 여지를 간직하고 있다는 말은 해두고 가자). 박주영이 고뇌하되 강해서 아름다운 선수, 남자, 그리고 더 나아가 인간이 되기를 바란다. 하루 빨리 ‘카치베리아’를 가진 ‘포리 클라세’가 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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