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화된 공간의 이중성-5.16광장 & 여의도 공원
        2006년 03월 31일 11:3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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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리학적인 공간은 ‘빈 사이’라고 한다. 그에 비해 정치적인 공간은 엿보는 데 그치지 않고 들어가서 싸워야 할 대상이며 장소이다.

    최근 한국에서는 민주화가 되면서 독재시절 국가가 차지했던 공간이 점차 국민의 공간으로 바뀌고 있다.

    면적 23만㎡(7만평) 규모로 설계된 여의도공원은 공간의 민주화에 대한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 독재정권의 개발계획 아래 여의도 한 가운데에 건설한 이 어마어마한 공공적 공간은 처음에는 ‘5·16광장’으로 불리면서 군대행진 또는 국민동원 행사를 위해 사용됐다. 하지만 민주화가 되면서 1997~1999년에 여의도공원으로 개칭하여 산책, 인라인 스케이트, 자전거 등을 즐길 수 있는 진정한 공공적 공간으로 변했다.  

       
    ▲ 2002년 월드컵 당시 시청앞에 운집한 시민들이 거리응원전을 펼치는 모습(사진제공=서울시)

    여의도뿐인가. 국회 출입통제 완화, 시청 앞 서울 광장, 육교 철거와 횡단보도 설치, 고가도로 철거와 청계천 복원(?), 숭례문 개방, 광화문 앞 광장 마련, 대전차 방호벽 철거 등도 마찬가지다.

    개발독재의 산물이 사라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변화들이다. 하지만 이런 변화가 항상 밝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자칫하면 체제에 포섭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특별히 마르크스주의를 들지 않아도 제기될 수 있는 문제이다. 여기서 체제포섭은 길들여진다는 표현과 비슷한 의미로 쓰인다. 5·18 기념관은 좋은 사례이다.

    원래 망월동 묘들을 정부 당국은 언젠가부터 옆 터에 설립한 대규모 콘크리트 기념관에 옮기라고 협박하기도 하고 돈으로 회유하기도 했다.

    이것은 살아 있는 역사를 ‘기념 대상’으로 전화시키면서, 그 역사를 콘크리트 기념관 속에 매장해 버린 듯한 느낌을 준다. 그 기념관을 방문해 거대하지만 차가운 콘크리트 사이를 걷다보면 말 그대로 기가 죽는다. 그것이 5·18기념관의 본색이고 기념館보다는 기념官이며 기념棺이다.

    최근 들어 구리, 의정부, 파주 등에서 벌어지는 대전차 방호벽 철거 움직임은 공간의 민주화 경향의 이중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이다. 1973~1978년 사이에 만들어진 방호벽들의 철거운동은 인간다운 도시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것이며 동시에 시민과 부(富)를 유치하기 위한 것이다.

    군부는 “수도 방위라는 접경지역 부대의 임무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방호벽을 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대신 지하구조물인 대전차구, 즉 전차관을 설치할 수 있다는 대안을 내놓고 있다. 보이는 콘크리트 블록을 보이지 않는 콘크리트 관으로 바꾸겠다는 것인데, 내용은 똑같다. 아니, 의도를 숨김으로써 그 의미는 더 심각해진다.

    민주화로 확장된 공간은 ‘투쟁’보다는 ‘놀이’의 공간이 되어버린다. 국민이 이미 국가체제에 포섭된 까닭이다.

       
     ▲ 지난 2004년 5월 1일 시청 앞 광장이 잔디광장으로 탈바꿈했다. 당초 ‘보행광장’을 만들겠다는 서울시의 취지와는 달리 현재 잔디광장은 일반 시민들의 출입을 막고 있다.(사진제공=서울시)

    서울의 시청 앞 광장을 예로 들어보자. 독재의 억압 속에서 사람들이 모여 의사표현을 강력하게 했던 6월 항쟁의 주 무대였던 이곳이 오늘날 서울광장으로 바뀌었다.

    서울광장은 뜨거웠던 2002년의 붉은 열기를 기념하기 위해 잔디를 심어 교통을 아예 추방했는데, 잔디의 약한 성질 때문에 결국 시민들도 (차별적으로!) 추방되고 말았다. 민초가 밟을 수 없는 공간이 된 서울광장은 처음부터 시민의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번 월드컵을 앞두고 서울시가 한 대기업에게 팔았기 때문에 더 이상 서울의 것도 아니다.

    이것이 서울시장의 악의적인 의도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다 치더라도 이는 민주화, 인간화를 향한 돛단배의 돛에서 바람을 빼는 효과를 초래하고 있다. 즉, 투쟁 영역을 확대하기 위해 장악한 곳이 이제는 소위 문화와 전통을 소비(!)하는 공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공공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 시민 즉 권리 있는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의 정체를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명심하자. ‘평화로울 때가 가장 조심할 때‘이다. 민주화를 통해서 얻은 공간, 그것은 늘 싸워야 하는 공간이다. 공간은 우리가 끊임없이 경작을 해야만 억압의 바다가 그 공간을 다시 훔쳐가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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