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호소통과 설득 포함,
    노조의 장기적·전략적 실천 시작돼야
    [노동자 내전·갈등⑦] 원칙, 가치 문제로 봐선 안 돼
        2018년 01월 23일 10:05 오전

    Print Friendly, PDF & Email

    1.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에서 ‘노동자 내전(內戰)’이란 표현은 너무 과하다. 노동자들 간의 이해관계 상충이나 각종 갈등은 노동현장에서 편재적인 것이며 어느 정도 자본주의 노동정치의 정상적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를 ‘전쟁’으로 표현하는 것은 자칫 극복할 수 없는 적대를 함축하므로 문제가 된다. 심지어 이런 표현은 자본의 노림수일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정규직 비정규직 간에 벌어지고 있는 갈등 상황은 자본주의 일반의 시장경쟁에 더해 노동자 간 경쟁을 내면화하고 제도화한 지배 장치, 곧 신자유주의 경쟁체제의 소산이다. 이런 의미에서 노동체제 전환기에 상당 정도 필연적인 것이며 운동으로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출발점이 된다.

    이 글은 여러 현장이나 사업장에서 부딪히는 노동자 간 갈등의 엄중함이나 심각함을 무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의 극복을 위해서는 보다 거시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의 인식 혹은 상호 이해가 필요함을 드러내고자 한다. 장기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의 전략적 실천 없이 개별 사업장이나 개별 사안에 대해 손쉬운 해결책을 찾기는 어렵다는 점을 강조할 것이다.

    먼저 이 문제를 ‘옳고 그름의 문제’나 ‘원칙의 문제’로 이해하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과 반대로 이 문제도 근본적으로는 ‘이해관계의 문제’나 ‘전략적 선택지들에 대한 합리적 선택’의 문제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이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은 정규직 입장에서 상당한 이해관계 위기나 그 가능성을 의미한다. 그 이해(interest)에는 장기적 단기적 차원에서 임금 및 고용안정성에 대한 부정적 효과, 노조 간 향후 교섭대표 지위를 둘러싼 경쟁, 채용절차의 공정성 및 형평성 문제로 인한 사기 저하 등이 포함될 것이다. 또 사회적 수준에서 공공부문 입사대기자 즉 수험생들의 불만, 그리고 상당한 과장이지만 국가재정 확대와 담세 부담 증가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반발도 내부자들의 이해관계 대립에서 한 요소로 작동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더 나아가서 생각하면 이 문제에는 비정규직 문제를 둘러싼 우리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지형의 특수성이 반영되어 있다. 비정규직 운동이나 민주노조운동이 확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념적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왜곡된 이데올로기 지형이 강하게 상황을 규정하고 있다. ‘사회적 대세’인 공개채용 경쟁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이들의 정규직 전환은 부당하다는 인식이 그것이다. 냉정하게 보면 현재 우리 사회에서 다수의 ‘원칙’이나 ‘옳은 일’은 ‘공채를 통과하지 않은 이들의 정규직 전환은 부당하다’라는 인식일 것이다. 비정규직들이 오래 감당한 부당한 처우문제, 혹은 그들의 뛰어난 업무 능력이나 장기 근속기간과 실질적 기여 등은 별로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특히 불행하게도 경쟁에 매몰되어 있는 청년들에게 더 그러하다. 그 적나라한 현실은 사회학자 오찬호의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개마고원, 2013)라는 책에 잘 나타나 있다.

    다른 한편에서 보면 이 문제는 별로 새로운 것도 아니다. 현재 공공부문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은 이미 민간부문에서 오래 전부터 발생했던 노동자 간 갈등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것이다. 민간부문에서 그것은 20년 전부터 발생했음. 공공부문이었던 1990년대의 한국통신 사례를 필두로 2000년대 이후 대우캐리어, 현대중공업, GM대우, 현대 기아자동차 등에서 발생했던 정규직 비정규직 갈등들은 본질적으로 현재 공공부문 사태와 다르지 않다.

    민간부문 비정규직 갈등에서도 임금, 고용안정성을 둘러싼 이해관계 대립이 가장 중요한 쟁점이었다. 물론 채용과정의 공정성과 합리성이나 직무의 특수성 등에서 양자의 차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주지하듯이 민간부문 대사업장의 다수 정규직 노동자들은 지난 20여 년 민주노조운동의 ‘연대 원칙’과 대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정규직 전환을 실질적으로 반대해왔다. 그 반대가 현실에서 일정하게 관철될 수 있었던 것은 이 문제에 관한 한 정규직 노동자들이 대자본 사측과 이해관계를 공유했고 국가권력과 보수적 사회여론의 은밀하거나 노골적인 지지를 받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현대 기아자동차 등에서 사내하청노동자들의 정규직 전환이 ‘제한적’ 수준에서나마 ‘비 원칙적인’ 방법으로 진행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 전환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운동의 원칙’이나 ‘법원 판결’ 이전에 노자 간의 현실적 힘 관계였다. 그리고 그 힘 관계의 변형은 신자유주의 축적체제의 모순적 결과인 비정규 노동에 대한 가혹한 착취, 사회적 양극화와 빈곤의 심화 그리고 비정규노동자들의 자연발생적인 극한투쟁에 의해 구조적인 수준에서 추동되었다.

    현대·기아차 사내하청 불법파견 소송 관련 경영계 탄원서 규탄(사진=금속노조)

    특히 중요한 지점은 조직운동 내부에서 정규직 노동자들의 방해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난 20년 노동운동 일반의 비정규 연대투쟁, 주체적 실천이 지속되었다는 사실이다. 민주노조운동은 빈발하는 비정규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하는 노력을 계속했고 형식적인 차원에 머무르는 한계가 있었지만 산별노조 전환, 노동자 정치세력화 등의 운동과정을 통해서 이를 제도화한 바도 있었다. 기업별노조를 산별조직으로 발전시키고 비정규노동문제가 가장 중요한 운동적 과제라는 정치적 인식을 제고하는 노력이 장기간 계속되었다. 그래서 최소한의 비정규직 연대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 중 하나가 일부 사내하청노동자의 정규직 전환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또 외환위기 이후 일차적으로 민간부문에서 시작되었던 비정규노동자 확대는 노무현 정부를 전환점으로 해서 공공부문에서도 급속히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명박 박근혜정부 시기에 성과연봉제 반대투쟁 등 각종 공공부문투쟁, 특히 학교비정규직 투쟁으로 나타났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재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에서 중요한 두 가지 쟁점은 정규직노동자의 반대와 전환비율 및 방식, 즉 무기계약직과 자회사 방식의 전환이다. 두 가지 문제는 상호 간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나 그 관계는 논리적이기보다 정치적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즉 정규직 노동자의 반발과 그 강도는 전환 비율 및 방식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나 최종적인 결과는 노자 간의 힘 관계, 곧 헤게모니 세력관계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인천공항이나 서울지하철 사례는 그 함수가 복잡하지만 현실적으로 매우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규직 교원노동자들의 강력한 반발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공공부문의 갈등이 더욱 첨예한 것은 공공부문 일자리의 고용안정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신도 모르는’이라거나 ‘신이 숨겨놓은 직장’이라는 특권적 위상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런 일자리를 확보하고 있는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쉬운 정규직 전환’은 감정상의 불만이기보다 현실적인 위협으로 다가온다. 실현되지 않았지만 현재의 합리적인 계산법에 따르면 정규직에게 그 위협은 매우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것이라는 뜻이다. 정권 변동이나 국가재정상황 악화에 따라 임금의 상대적 삭감이나 일자리 불안이 충분히 야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가 약속한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의 실현 양태는 ‘가치담론’의 쟁패문제이기보다 실제 이데올로기적 조직적 역관계의 결과로 사업장마다 혹은 시기 별로 천차만별로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인천공항이나 서울지하철 혹은 학교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사례에서 민주노조운동이 사용자나 정부 혹은 서울시의 태도나 방침을 문제로 삼는 것은 언제나 타당하다. 무기계약직이나 자회사 방식은 또 다른 방식의 비정규노동자 재생산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만적 전환이 정당화되는 것에는 정규직 노동자들의 반발이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 정치적 대립지형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 민간부문에서 다른 형태로 20년 전부터 지속되었던 것임을 다시금 확인해야 한다. 정규 비정규 대립을 객관적인 권력자원으로 만들고 이를 동원하는 지배블록의 태도는 변수라기보다 상수이다. 이제는 그 변수가 민주노조운동 주체라는 보다 진전된 인식이 필요하다.

    여기서 ‘경영성과 평가’, ‘성과연봉제 실시’, ‘외주화와 비정규 확대 등 노동유연화’로 일관했던 공공부문 사용자, 국가가 갑자기 비정규직 제로’정책으로 전환한 배경에 대해 잠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촛불혁명과 문재인 정부 출범이 정책 전환의 결정적 배경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보수 세력이 과거 공공부문 시장화의 초기 설계자였고 주창자였던 점을 생각하면 이는 놀라운 변화이다. 또 현재 공공부문 사용자나 정부가 자회사 설립이나 무기계약직을 정규직전환이라고 주장하더라도 이는 과거에 비해 진보적인 방향의 정책 전환임을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다만 그것은 문재인 정부의 선의가 아니라 촛불혁명을 주도한 민주노조운동의 성과라는 점도 분명하다. 따라서 민주노조운동이 ‘상시 지속적 업무의 직접고용 정규직 전환’ 원칙을 실행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매우 타당하다. 문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데 있다. 과거 민간부문과 마찬가지로 이는 다시금 조직 노동 내부에서 갈등과 혼란을 불러오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현재의 문제를 갈등하는 각 사업장 내의 양 당사자 간의 문제 혹은 양 주체의 전략적 태도의 문제로 볼 때 해결점은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 그것을 원칙과 가치의 문제로 보아선 안 된다. 현재의 틀 안에서 실질적 전환 형태는 사업장 단위의 특성, 내부 정규직 노조의 속성, 정부 사용자의 기회주의적 태도, 비정규노동자들의 투쟁 등 다양하지만 예측 불가능한 변수들의 작용에 의해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비정규직 제로’이나 무기계약이나 자회사 간접고용 비정규직 형태가 상당히 나타날 것이고 일부 개선 완화되겠지만 새로운 차별과 격차가 발생할 개연성이 매우 크다.

    6.

    여기서 지난 역사를 돌이켜 가정해볼 필요가 있다. 2005년 민주노총 내부에서 발의되었던 이른바 ‘정규직 양보’에 기초한 ‘사회연대전략’이나 ‘1사 1조직’ 및 ‘지역지부’ 원칙의 산별노조 전환이 2006년 이후 실현되었다면 현재 민간부문 대사업장 사내하청문제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이후 10년 넘게 이런 원칙으로 민주노조운동이 정규직 노동자들의 연대의식, 정치의식을 개선하였으면 현대 기아차 사내하청문제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진행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이다.

    불행하게도 민주노조운동의 지난 10년은 수세기의 후퇴국면이었다. 그 결과 최소한의 조직형식 전환으로 산별노조운동은 중단되었다. 또 조직 외부의 자연발생적 비정규직 투쟁에는 제한적으로 연대하지만 내 사업장의 비정규투쟁은 외면하거나 거부하는 추상적 연대의식이 지배하게 되었다. 촛불혁명 직후 금속노조 기아차지부가 비정규노동자들을 조직에서 몰아내는 결정을 해도 민주노조운동이 어떤 유의미한 대응도 하지 못하는 극단적 상황이 연출되었다. 공공부문에서도 지난 10년 이상 사용자 주도의 비정규노동자 확대정책을 정규직 조직노동자가 방치했던 결과가 최근의 조직 내 갈등으로 분출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현재 공공부문의 정규-비정규직 간 갈등을 쉽게 해결할 왕도는 없다. 정규직의 협소한 이기주의를 비난할 수는 있으나 그것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가치나 이념에 호소할 것이 아니라 온전한 정규직 전환이 현재의 정규직 노동자들의 이해에도 부합한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예컨대 장기적 경제적 이해의 논리나 정치적 이해의 논리를 동원하는 것이다. 실제로 공공부문 비정규직을 없앤다면 성과평가나 경쟁 압력을 낮추어 구조적인 수준에서 고용안정성을 지금보다 더 높이고 나아가 정규노동자들의 자녀 세대들이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실질적 연대체제를 구축한다면 원천적으로 비정규노동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 노동체제 전망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노동복지를 포함해서 새 체제의 혜택은 정규 비정규를 넘어 모든 노동자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또 정치적 설득을 포함해서 공공부문 노조의 장기적 전략적 실천이 지금부터라도 시작되어야 한다. 가칭 ’공공부문 사회연대전략’과 각종 ‘정규 비정규 연대사업’, 그리고 ‘비정규노동자 전략조직화’ 사업 등을 산별노조의 일상적 사업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이런 일들은 이미 공공부문 산별노조들이 오랫동안 고민하고 검토해왔던 전략 사업이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이를 과감하게 실행하는 일이다. 이는 촛불혁명이 열어놓은 노동체제 전환의 과제를 실현하는 일이기도 하다. 문재인 정부나 공공부문 사용자들의 태도만을 문제로 삼을 수는 없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촛불혁명의 요구에 걸맞는 새로운 실천을 준비하지 못하는 민주노조운동 주체에 있기 때문이다.

    기획 앞 회의 글 “촛불 민심으로 돌아가자, 비정규직 오·남용 적폐 청산의 과제”

    필자소개
    한신대 교수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