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순환선'
    2호선 기관사의 이야기
    [단편소설] 신도림에서 신도림까지
        2018년 01월 22일 12:18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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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명호씨의 ‘단편소설’이다. 서울지하철 2호선 기관사의 생활, 노동과 동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가장 낯익고 자주 접하는 노동자들이 지하철 기관사들이기도 하지만 또 어떻게 보면 그들의 노동과 삶에 대해 우리가 아는 건 별로 없다. 하나의 사연이 중심이지만 기관사들의 삶과 노동을 잠깐이라도 엿볼 수 있는 글이다. 기고해준 나명호 씨에게 감사 드리며 레디앙은 어떤 형식의 기고도 환영한다는 말을 다시 한 번 드린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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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극 얼음판 위에 무리를 지어 늘어선 황제펭귄들처럼 사람들이 2호선 신도림역 승강장에서 우두커니 서서 열차를 기다린다. 지금 시각은 오전 8시 3분. 승강장에는 승객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나 또한 한 쪽 귀퉁이에서 교대할 열차를 기다리고 있다. 5분 뒤면 내가 운전해야 할 열차가 나타난다. 후우-후우. 심호흡을 길게 여러 번 해본다. 분을 삭이고 마음을 진정시켜야 한다. 오늘 아침, 이기호는 또 나에게 심한 모욕을 주었다. 후배들 여럿이 보는 앞에서, 마시던 종이 커피 컵을 나에게 냅다 집어던졌다.

    “야, 너 따위가 뭔데 까불어.” 하며 소리를 질렀다. 컵은 얼굴에 맞았다. 근무복 상의로 뜨거운 커피 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이유도 모르고 당하는 횡액이었다. 휴게실에서 그의 얼굴을 한 번 쳐다본 것 말고는,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는 일방적 보복이었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이기호와는 입사 동기라는 목줄이 걸려있는 데다, 평형감을 잡아주는 녀석의 양쪽 달팽이관에 이상이 생긴걸 아는, 내가 참을 수밖에 없었다. 달팽이관이 문제다. “그래, 너 잘났다. 새꺄.” 하고는 휴게실을 황급히 빠져나왔다. 후우-. 다시 심호흡을 길게 한다. 이른 아침, 물안개가 피어오를 때 고요한 저수지의 물처럼, 내 마음도 잔잔하고 차분해져야 한다.

    지금 시간은 승객이 가장 많을 때다. 200미터 길이의 열차에, 3000명 정도 승차한다. 객차는 총 열 칸이다. 객실은 시루 속 콩나물처럼 한 치 공간의 여유도 없이 승객들로 꽉 찬다.

    2호선은, 시청을 기점으로 타원형을 그리며 도심 곳곳을 지나고, 연장거리는 50km이다. 43개 역이 연결되어 있다. 1순환하는데 90분 정도 소요된다.

    승객들은 각 역에서 쉴 새 없이 내리고, 또 내린 만큼 다른 승객들이 승차한다. 그들은 직장으로, 학원으로, 혹은 어딘가의 목적지로 흩어진다. 목적지가 없는 극소수의 사람들은, 의자에 웅크리고 잠에 곯아떨어져 있기도 한다. 나는 2호선 두 바퀴를 세 시간에 걸쳐, 사고 없이 운전해야 한다.

    “아-아. 선배님, 잘 들리시죠. 수고하세요.”200미터 후부 운전실의 차장이 말한다.

    “어, 그래 좋아. 수고하셔.”우리는 승무원 통화 기능 시험 겸,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신도림역을 출발했다. 열차는 직사각형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콘크리트 사각기둥들이 촘촘히 견고하게 늘어서 있다. 터널 천정에는 전차선이 이어져 있고, 바닥에는 두 줄기 레일이 평행선을 그리며 뻗어 있다. 레일은 완만한 곡선을, 왼쪽 ․ 오른쪽으로 번갈아 가며 그린다. 직선으로 쭉 뻗기도 한다. 그 위를 열차는 달린다. 일정한 간격으로, 신호기가 설치되어 있다. 신호기는 나에게 속도를 얼마나 내어도 되는지, 끊임없이 지시한다. 사장의 지시이기도 하다. 진행· 주의· 경계· 정지 등 신호기는 색깔을 달리하며 열차 속도를 맞출 것을 지시한다. 그에 따라, 나는 속도를 충실하게 맞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전방 열차와의 거리를, 신호기가 표시하고 있다. 열차는 몸체를 좌, 우로 틀기도 하며 레일 위를 부드럽게 달린다. 2분여 뒤, 나는 문래역 승강장의 정해진 위치에 정차한다. 열차 오른쪽 출입문 40개가 동시에 열린다. 뒤이어 승강장의 스크린도어 40개도 같이 열린다. 각 출입문에서 승객들이 쏟아지듯 빠져나간다. 다음에 두 줄을 서 있던, 승강장 승객들이 우르르 밀려들어 온다. 잠시 뒤, 열차의 출입문 40개가 닫힌다. 승강장의 스크린도어 40개도 닫힌다. 삐익-. 차장이 누르는 발차부저전호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신호를 확인하고, 열차의 출력을 낸다. 스르르, 열차는 날렵한 뱀처럼 문래역을 빠져 나간다.

    스크린도어, 승강장과 선로를 차단하는 안전문이다. 이게 생기기 전에는, 한 해에 수십 명의 사람이 선로로 뛰어내려 열차에 치였다. 끔찍하게 부서지고 찢긴 채 비참한 생을 마감하였다. 지금은 사상사고가 없어졌다. 그러나 세상에 완전한 것은 없다.

    나는 영등포구청역으로 운행한다. 출력을 내고 제동을 잡고 조건에 따라 반복적으로 조작한다. 운전 중에 딴생각을 하는 건 금물이다. 오로지 운전업무에만 전념해야 실수가 없다. 그러나 그게 마음먹은 대로 되는 건 아니다. 응어리져 잠복해있던 상념들이 불시에 불쑥 튀어나온다.

    ‘아, 이기호. 이 녀석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요즘 들어 더 길쭉해진 듯한 얼굴에, 눈은 늘 충혈되어 있다. 늑대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상대에게 적의를 보이듯, 기호도 무시로 기분 나쁘게 웃으며 내게 덧니를 드러내 보이곤 한다. 사업소 내 동료 중 그나마 우군인 나를 도무지 분별해내지 못하고, 걸핏하면 나를 무시한다. 어떤 때는 나의 약을 올리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행동한다.

    ‘허, 달팽이관이 문제다.’

    그의 양쪽 달팽이관 중 어느 게 이상이 생긴 게 분명하다. 실제로 상처가 나거나 고장이 생기면, 어지럼증으로 서 있지도 못한다고 한다.

    나와 기호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한 때는, 두 달 전이다. 그 여자에 대해,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고 넌지시 말한 게 화근이 되었다. 그때, 기호 녀석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고 몸을 부들부들 떨기까지 했다. 그 이후, 녀석은 나를 벌레 보듯 하며 노려보기도 하고, 알은 체를 일절 하지 않는다.

    열차는 지하구간을 빠져나간다. 오르막을 가볍게 치고 올라 당산역에 도착한다. 바깥은 한여름 햇빛이 내리쏟아지고 있다. 그 열기로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나는 운전실 측창문을 열고 강바람을 맞는다. 잡쳤던 기분이 조금 풀리는 듯하다. 열차 속도를 줄여 천천히 당산철교를 지나간다.

    오른쪽으로 돔형 지붕을 앉힌 국회의사당이 보인다. 강 위에는 요트가 몇 척 정박해 있다. 강물이 잔잔하게 일렁이고 있다. 강변 순환도로에 자동차 행렬이 엉금엉금 기어가는 게 보인다. 당인리 화력발전소 굴뚝 위로 수증기가 목화송이 모양으로 피어오른다.

    절두산 벼랑이 다가온다. 그 위로 순교기념탑이 솟아오른다. 탑은 점점 커진다. 갓과 칼자루를 형상하는 건물이다.

    ‘절두산, 누구의 목을 친 형장인가.’

    또다시 지하구간이다. 뱀이 아가리를 벌린 모양의 입구가 빠르게 다가온다. 열차는 용트림하듯 오른쪽으로 길게 선회하며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1년 전의 일이다. 이기호는 신도림역에서 교대해 사당역 방면으로 운행하는 외선 열차를 운전하고 있었다. 출근시간대였으므로 객실은 승객들이 들어차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가 봉천역에서 열차를 정차하고, 무심코 승강장 쪽을 보니 승객 한 사람이 열차에 타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는 게 보였다. 한 쪽 다리를 몹시 저는 체구가 작은 젊은 여자였다. 기호는, 승객들 틈을 비집고 승강장으로 나가 그 여자를 데리고 운전실로 돌아온다. 열차 운전을 계속하면서 그녀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자기 집은 봉천동에 있는데 잠실나루역 근처 직장으로 출근한다’ 했다 한다. 또, ‘다리가 불편한 자신은 출퇴근 시간대에 열차 타는 게 무섭기까지 하다’ 했다 한다. 기호는, ‘아, 그렇네요.’ 하며 연신 안타까워했고, 내일도 이 시간대에 자기가 운전하니 그 자리에서 기다리라고 약속했다. 잠실나루역에 도착해서는 승강장까지 안내해주고 그녀를 떠나보냈다.

    다음날, 기호는 물론 약속을 지켰다. 그뿐만 아니라 동료들에게도, 그 여자를 운전실에 태워줄 것을 간곡하게 부탁했다. ‘그러지, 뭐.’ 처음 한두 번은 동료들이 기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기호는 나에게도 여러 번 말했다. ‘봉천역에 가면, 주로 분홍색 스웨터를 걸친 다리 불편한 젊은 여자가 있다. 운전실에 태워 잠실나루역까지 가달라’고 했다. 말할 때, 기호의 태도는 사뭇 진지했다. 부탁을 거절했다가는 무슨 사단이 날 것 같았다. 운전실에 누군가를 태우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먼저, 운전실에서 객실로 통하는 통로 문을 열고, 승객들 틈을 비집고 승강장으로 나간다. 누군가를 데리고 다시 사람 숲을 헤치고 운전실로 돌아온다. 시간도 족히 2분 정도 소요된다.

    다른 문제도 있다. 회사의 작업내규상, 운전실에 외부인을 승차시켜서는 안 된다. 회사는 열차 운전에 방해되는 요소를 차단 금지하고 있는 것이다. 기호의 인간적인 배려는 발 디딜 틈이 별로 없는, 현실 장벽에 결국 부딪혔다. 상황은 그랬지만, 기호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예 동료들과 근무를 바꾸어서 자신이 8시에 봉천역을 출발하는 열차를 운전했다. 어디서 구했는지, 접이식 간이의자를 옆구리에 끼고서는 승무 교대를 했다. 봉천역에서 그녀를 태우고 의자에 앉혀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주기 위함이었다. ‘저러다 말겠지.’ 나는 그냥 지켜보았다. 아니었다, 기호의 선행은 계속 이어졌다.

    문득,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입사 3년 차가 되었을까 기호와 단둘이 술을 먹은 적이 있었다. 어느 순간, 기호 녀석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짬짝 놀라 왜 그러냐고 물었다. 어렸을 때 사고사를 당한 여동생이 생각난다 했다.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울먹이며, 소아마비를 앓던 여동생과 이별한 사연을 이야기했었다. 그렇다. 기호는 분홍색 스웨터를 입는 그 여자를, 어렸을 때 사별한 동생 대하듯 하는 게 분명했다. 이것을 깨달은 나는 그를 말릴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기호가 근무를 잘 바꿀 수 있도록 묵묵히 음으로 양으로 여러 조치를 했다.

    동료들도 각자 계획이 있는 생활인인데 자기 근무를 바꾸어주는 게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기호와 동료들 간에 약간의 마찰은 불가피해 보였다. 나는 그들에게 밥을 사기도 하고 커피를 권하기도 하며 갈등을 무마하고자 했다. ‘그래, 알았다 알았어.’ 하며 동료 대부분이 수긍해주는 듯했다. 돌발 상황만 생기지 않으면 기호의 선행은 지속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게 간단하지 않았다.

    열차는 대학교가 연이어 있는 구간을 지나 시청역․ 을지로 구간으로 진입했다. 지금 시간은 8시 30분. 신도림역을 출발한 지 22분 정도 지났다. 을지로3가역에 도착했다. 객실 출입문이 열리고 스크린도어가 열린다. 우르르 꽝꽝-. 승객들이 한꺼번에 눈사태처럼 내리는 소리가 운전실로 들려온다. 열차의 몸체도 뒤뚱거리며 조금 흔들거린다. 나는 잠시 운전실 측창문을 통해 이동하는 승객들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몇 시 몇 분까지는 어디 어디엔가 도착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삐이익-. 운전실에서 고음의 소리가 난다. 나는 깜짝 놀란다. 객실 비상통화부져 소리다.

    “씨팔, 이거 왜 이렇게 더워. 히터를 틀었나. 에어컨, 풀로 틀어요. 풀로.”화를 내는 남자의 거친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도 덥다, 더워.’ 나는 속으로 말한다.고 데시벨의 객실 비상통화부저 소리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매번 놀란다.

    “선배님, 어떡하죠. 지금도 풀인데요.”

    200미터 후방에서 차장이 승무원 통화로 묻는다. “그러게, 방송 한번 하면 되겠네.”곧이어 객실 안내방송 소리가 들려온다. “안내 말씀드립니다. 우리 열차는 지금 냉방을 풀가동하고 있사오나, 객실이 매우 혼잡한 관계로 다소 덥습니다. 이점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차장의 멘트였다. 그는 두 바퀴를 도는 동안, 같은 내용을 여러 번 방송해야 할 것이다. 열차는 가다가 서고 서다가 가고를 계속한다. 승객들은 타고 내리고를 반복한다. 승강장에는 사람들이 그득해서, 마치 강물이 유유히 흐르듯 조금씩 움직인다. 나는 전방 선로를 주시하며 끊임없이 신호를 확인한다. 운전실 의자에 앉아, 왼손으로 견인전동기 출력을 내고 오른손으로는 제동을 잡아, 차륜에 밀착된 제륜자에 공기압력을 보낸다. 이번 역이 지나면 다음 역이고 또 다음 역이 나타난다. 뱀의 땅굴 같은 지하구간을, 열차는 몸체를 휘며 계속 전진한다. 차체 중량과 수천명의 몸무게도 너끈히 감당하고 속도를 낸다. 말 5000마리가 동시에 달릴때, 그 끄는 힘과 맞먹는 동력을 하부에 장착된 견인 전동기가 열차에 공급한다. 조금씩 지쳐가는 건 운전하는 사람일 뿐, 열차는 항상 쌩쌩하다.

    언제이던가, 기호와 우스갯소리를 한 적이 있다.

    “명철아, 만약에 말이야. 지금이 조선시대라면 우리 직업은 뭐에 해당할까?” 기호가 물었다. “글쎄, 뭘까. 모르겠네.” “아니, 마차 모는 마부가 아니었을까? 패랭이 쓰고 마부석에 떠억 앉아 한양 대로를 달리는 그런 거 아니었을까?” “엉, 푸하하. 웬, 마부냐. 그때 마차가 있었냐!” “음, 그런가.” “소달구지는 있었던 것 같으네.” “그으래. 그럼, 소달구지 몰지 뭐. 시골길을 터덜터덜 걷고 말이지. 그거 좋겠다.”기호는 신이 난 듯 목소리에 생기가 돌았다. “흐흐흐, 양반 나으리께 매여 기껏 곡식이나 나르고 했겠지. 일꾼들 태워 논밭으로 실어 나르기도 했겠다. 흐흐.”

    결국 우리는 전생에 소달구지를 몬 것으로 낙착을 보았다. 기호는 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명철아, 도대체 우리는 가도 가도 끝이 없냐?” “엉, 뭔 소리야.” “신도림역을 출발하면 되돌아오고, 결국 신도림역이잖아. 뺑뺑이를 20년 돌았지만 항상 제자리다, 이거지. 답답하다, 답답해.” “2호선 땅굴이 지겹냐. 왜, 열차 끌고 시베리아 대륙까지 가보고, 싶으냐?” “아니, 부산 해운대까지라도․․․․․” “그으래. 그럼, 4호선 전출가면 되겠다. 안산 지나고 오이도까지는 간다.” “아니,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굳이․․․․․․․․․․”우리는 이것도 굳이 다른 호선으로 전출 갈 필요까지는 없는 걸로 낙착을 보았다. 그때, 20년이 아니라 살아온 나이만큼 뺑뺑이를 돌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생략했다.

    이제 우리 열차는 한양대역을 발차한다. 미로 같은 지하구간을 서서히 벗어나고, 지상 고가구간으로 천천히 올라간다. 여름 햇빛이 작렬하고 있다. 누가 하늘에서 내려 본다면, 길쭉하고 시퍼런 큰 뱀 한 마리가, 땅굴에서 막 기어 나와 일광욕 가는 모습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폐 속 탁한 공기를 신선한 것으로 바꾸고 몸뚱아리에 묻은 먼지도 떨어내는 중이다. 중랑천, 동부 간선도로 위를 지나간다. 왼쪽 방향으로 길게 휘어지며 기지개를 키듯 몸체를 쭉 늘어뜨린다. 끼이익~. 차륜에서 나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연속해서 들린다. 향군회관, 방통대 건물을 지나 뚝섬역에 도착한다. 8시 50분이다. 지금 객실 승객 수는 거의 변함이 없다. 각 역에서 내린 만큼 타고, 탄만큼 내리고 다시 타고를 반복했기에 여전히 매우 혼잡하다. 마치, 아무리 퍼내어도 다시 고이는, 마르지 않고 늘 차있는 샘물 같다. 그들은 흩어져 각자의 위치로 찾아간다. 공장에서 기계를 돌리거나, 공사현장에서 철근을 자르거나,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혹은 관공서 사무실에서 펜대를 굴리거나, 저마다의 자리로 간다. 그들의 신속한 이동을 가능케 하는, 시민의 발 지하철이다. 그러면 나는, 그 발을 조종하는 운전수인가.

    전방 선로를 주시하고, 신호를 확인하고, 허용되는 속도를 내고 제동을 잡아, 정해진 위치에 열차를 세운다. 반복적이고 규칙적인 작업이다. 2분여 간격으로 쉴 새 없이 다음 역으로 이동한다. 나는 이 틀 속에 갇힌 하나의 부속품처럼 느껴진다. 내가 열차를 운전하는 게 아니라, 열차가 나를 운전실에 태우고 끌고 가는 것 아닌가 착각이 들기도 한다. 선로 양쪽 방음벽 너머 빌딩들과 아파트단지가 다가왔다 사라지고, 비슷한 형태가 또 다가왔다 사라지고를 반복한다. 역의 이름만 다를 뿐 특색이 구별되진 않는다.

    지하철 기관사의 모습 자료사진(사진=비정규노동)

    강변역에서 열차를 잠시 멈추었다. “00열차, 강변역에 2분간 정차하세요. 후속 열차와 간격이 너무 벌여졌어요.”

    운전관제가 무전기로 지시했다. “좀, 쉬었다 갈까.”

    “네, 선배님.”

    우리는 객실 출입문을 열어 놓은 채 잠시 기다린다. 운전실 측창문을 열고 맑은 공기를 마신다. 저 멀리 잠실철교 선로 위에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레일도 열을 받아 뜨거울 것이다. 여름철 늘어나는 길이를 계산해 레일과 레일 접합 부분은 약간의 틈새가 있다. “선배님, 이제 갈까요.”

    200미터 후부에서, 차장이 객실 출입문을 닫고는 몇 초 뒤에 나에게 발차해도 좋다는 발차부저전호를 보낸다. 삐익-.

    나는 발차한다. 다시 한강을 건너간다. 강물은 햇빛을 받아 물결치며 번쩍거리고 있다. 선로 바로 옆 자전거 도로에는 사람들이 지친 표정으로 걸어가고 있다. 저 멀리 강 건너 아파트 단지 뒤로, 솟아오른 롯데타워가 보인다. 마치, 손잡이 끝을 잘라낸 야구방망이를 세워 놓은 듯한 모양의 초고층 빌딩이다. 주변 건물들을 조무래기 취급하듯 단연 압도한다. 거대한 몸체가 점점 다가온다. 나는 열차 속도를 허용 최대치인 시속 90km로, 끌어올리고 잠실 철교를 지나간다. 잠깐 사이에 한강을 건넌다. 기계적으로 제동을 잡아, 열차를 잠실나루역 정해진 위치에 세운다.

    치직-. 제동 공기가 빠지는 소리. 반대편 선로에서, 외선 열차가 막 코너를 돌아 나타나고 있다. 승강장으로 진입한다. 나는 무심코 고개를 돌려 운전실 쪽을 본다. 기호다. 녀석도 나를 본다. 나에게 손가락질을 하더니, 덧니를 드러내고 비웃듯이 웃는다.

    아, 저놈!. 혈압이 치솟는다. 심장이 벌렁거린다. 얼굴로 피가 몰려 시뻘게진 것을 느낀다. ‘기호 놈이 또 나를 모욕하는구나. 저놈은 도대체 어떻게 된 놈인가.’ 화가 나서 마음을 잡을 수가 없다. 운전실 의자에 앉아 한참 씩씩거린다

    “선배님, 발차전호 눌렀는데요.” “어, 그래.”나는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고 잠실나루역을 발차했다. 오른쪽 방향으로 길게 휘어져 내려간다. 또다시, 지하 터널 입구가 뱀이 아가리를 벌린 듯 나를 기다리고 있다. 후우-. 심호흡을 길게 여러 번 한다. 상한 마음을 달래고, 기분을 가라앉혀야 한다. 운전에 집중하지 못하면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 몹시 추운 겨울날의 얼어붙은 강과 얼음장을 떠올린다. 투명한 얼음장 위에서 내려다본 강바닥에는 자갈들과 조개·나뭇가지·낙엽들이 선명하게 보였다. 물풀들이 물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 투명한 얼음처럼, 서늘하게 내 마음도 가라앉아야 한다. 사물의 변화, 사람들 마음 움직임을 알아야 대처가 가능하다. 나는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것일까. 나는 내 마음을 들여다본다. 후우-.

    두 달 전, 이기호는 나에게 분명히 요구했다. ‘그녀는 교통약자다. 몸이 불편한 사람을 운전실에 태우는데,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더 이상 안 나오게, 너네들이 해결하라.’고 했다. 멀뚱히 쳐다보니까,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런 말도 했다. ‘교통약자도 요금을 내는 승객이다. 따라서 회사는 편의를 제공해야 할 책임이 있다. 노약자석이나 임산부석은 러시 때 이용해야 할 사람들이, 이용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객실 내부 압력에 밀려 건장한 성인이 아니면 비집고 들어갈 수도 없잖냐.’고 말했다. 사업소 간부들이, 운전실에 외부인을 태운다고 지적했다며 분개했다. 너네들, 노조 간부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뭐하고 있냐고, 나를 힐책했다. 나는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묵직한 돌을 올려놓은 듯 가슴만 답답했다. 기호는 동료들에게도, 섭섭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근무를 바꿔줄 수 있는 여건인 것 같은데도, 요즘 무척 까다롭다고 했다.

    나는 말미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그렇게 하겠다고 기호에게 말했다. 기호는, ‘잘 좀 해봐’ 하며 나를 못마땅해 했다. 교통약자도 어느 때건 지하철을 이용할 권리가 있다는, 기호의 주장은 정당하다. 의무를 다한 만큼 권리도 보장되어야 한다는, 그의 말은 나무랄 데가 없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넘어야 할 장벽이 많으므로 통용되지는 못한다. 헌법에, 모든 국민은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가진다는 선언이, 현실에서 통하지 않는 것처럼. 러시 때는 초·중학생들도 지하철을 대개 이용하지 못한다. 그들의 힘으로는, 객실로 비집고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객실에 승차한 승객들은 어떤가. 앞·뒤 옆으로 서로가 빈틈없이 압착되어, 짐짝처럼 실려 갈 뿐이다. 그야말로 북새통이고 전쟁터가 따로 없다.

    작년 여름, 기호가 운전하는 열차 운전실에 탄 적이 있다. 봉천역에서 그는, 자못 정중한 태도로 그 여자를 운전실에 태웠다. 접이식 의자를 펴더니, 손수건으로 깔판을 닦고 그녀를 앉혔다. 기호 얼굴에 생기가 돌고 있었다.

    그때도 그 여자는 분홍색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이 여름에, 스웨터?’. 좀, 부자연스러웠다. “감기에 걸리신 모양이죠?”내가 물어보았을 때, 그 여자는 얼굴이 붉어지더니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몸이 차갑지 않겠냐. 항상 몸이 따듯해야지.”기호가 나를 보더니, 찡그리며 대신 말했다. “……어떤 직장에 다니시죠. 무슨 일하세요?”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사무실에서 경리일을 한다 했다. 나중에 기호에게 들은 사연은, 그녀가 몸이 많이 냉한 편이라 여름에도 긴 옷을 입는다는 것이었고, 분홍 스웨터는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선물한 옷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기호가, 그 여자를 직장이 있는 잠실나루역까지 운전실에 계속 태워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이제는 짜증을 내는 동료들이나, 사업소의 압력을 어떻게든 무마시키고자 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건 기호뿐이었다. 열차는 이제 강남구간을 지나고 있다. 직사각형 터널을, 콘크리트 구조물들이 견고하게 떠받치고 있다. 왼쪽으로 무수한 기둥들이 연달아 지나간다. 선로는 왼쪽·오른쪽으로 휘며 쭉쭉 뻗기도 한다. 오르막이 나타났다가 금방 내리막이 나타난다. 벽체에 간간이 설치된 형광등 조명은, 등대의 불빛처럼 다가왔다가 곧 사라진다. 이따금 반대편 열차가 전조등을 켜고 나타난다. 잠깐 교행한다. 객실 승객은 조금 줄었다. 열차는 가벼워진 몸체를 퉁퉁거리며 잘도 달린다. 가도 가도 똑같은 형태의 구조물들이 연속될 뿐 바뀌는 풍경은 없다. 끝없이 이어지는 지하 콘크리트 숲을 지나가고 있다.

    역의 이름만 다를 뿐, 똑같이 생긴 승강장의 정해진 위치에 열차를 세운다. 1순환, 43개 역 중에 30개의 역을 지나 강남역에 도착했다. 오래전, 입사 시험을 볼 적에 적성검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러 항목 중, 십 단위 미만의 숫자 두 개를 합하여 값을 적는 게 있었다. 한 줄에 많은 숫자가 배열되어 있었고 20줄 정도의 양이었다. 시험관의 지시에 따라 한 칸씩 내려가며 합산된 값을 끊임없이 적었다. 20분 정도의 시간 동안, 응시생들은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그 반복 작업을 계속했다. ‘이 짓을, 왜 해야 되나’ 회의가 중도에 여러 번 일었지만 참고 끝까지 해냈다. 값을 많이 적었는지 맞는 값인지도 따져보지만, 20줄의 편차가 없는지도 본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단순 반복 작업을 연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회사는 그때 나를 테스트한 것이었다.

    그 테스트를, 지금 신호기들이 하고 있다. 끊임없이 나타나, 적색․ 주황색․ 녹색으로 바꾸어가며 내가 제대로 반응하는지 본다. 콘크리트 기둥들이 하고 있고, 각 역의 승강장들도 한다. 지치지 않고 전방을 주시하고 있는지를, 40 개 출입문과 40개 스크린도어의 위치를 정확하게 맞추어 정차하는지를 테스트한다. 부표가 보이지 않는 대해에서 한없이 나아가야 하는 배처럼, 나도 레일이 놓여있는 대로 계속 전진할 뿐이다. IMF 사태가 터지기 전, 사업소에 난리가 난 적이 한 번 있었다. 열차 운전을 하고 있던, 모 선배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차장이 아무리 불러도 응답이 없어, 운전실로 뛰어 가보니 사람은 온데간데없고 하얀 장갑만 놓여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 사라진 건지는 지금까지 아무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그 선배가 아직까지 사업소로 복귀하지 않았다는 사실뿐이다. 나는 2호선을 1순환했다. 연장거리 50km, 서울시 도심 곳곳을 운행했다. 한강 다리를 두 번 건넜고, 잠시 지상구간에 나왔지만 대부분 지하구간을 운전했다. 2호선 신도림역에 도착했다. 시간은 오전 9시 53분. 15분 지연되었다. 나는 운전실문을 열고 나가 승강장에서 자판기 커피를 뽑아 금방 돌아온다. “커피 뽑았다. 이제, 갈까.” “네, 선배님. 승객이 좀 빠졌네요.”

    열차는 쌩쌩하다. 저돌적인 코뿔소처럼 활력이 넘친다. 나는 지쳐간다. 심신이 축 늘어져가는 기분이다. 기호와의 일은 맷돌을 얹어놓은 듯 내 마음을 짓누른다. 집중하자. 후우-.심호흡을 한다. 머리를 몇 번 흔들어 본다. 신호기를 가리키며 소리 내어 지적확인․ 환호를 한다. 폐색 진행!. 폐색 진행!. 열차는 당산역에 도착했다. 나는 운전실 측창문을 열고, 강 공기를 들이고 마신다. 당산철교를 천천히 지나간다. 오른쪽으로 국회의사당 돔 지붕이, 다시 나타난다. 어떤 사람은, ‘어, 저거 중국 사람들 쓰는 모자를 닮았네.’ 하지만, 나는 문어 대가리를 닮았다고 생각한다. 아주 큰 문어 한 마리가, 대가리를 어깨에 반쯤 파묻고 빨판이 달린 다리들을 내리뜨리고 있는 형상으로 보인다. 문어는 워낙 잡식성이라, 사람 사체도 파먹는다고 한다.

    강 건너, 절두산 순교기념탑이 다가온다. 점점 커진다. 갓과 칼자루다.조선 말기, 천주교 신자들이 당한 박해와 죽임을 상징하고 있다.

    1866년, 8000여 명의 신자들이 망나니가 휘두르는 칼에 목이 잘리고, 한강에 버려졌다고 한다. 그들이 대개 갓을 쓴 양반들이었을까. 아니다, 상놈도 사람이라고 가르쳐주는 교리를 한 가닥 생명줄처럼 부여잡고, 신음하는 봉두난발을 한 노비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열차는 다시 지하 터널로 빨려들 듯이 들어간다.

    기호의 얼굴은 요즘 점점 어두워져가고 있다. 두 달 전 그가 나에게 심하게 화를 낸 이후에, 어떤 안 좋은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그 일이 무엇인지는, 도무지 알 수 없다.

    그가 나를 알은 체도 않고, 적대하는데 직접 물어볼 수는 도저히 없다. 동료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자투리 정보라도, 아는 게 있는지 캐물어 보았다. 기호가 무심코, ‘장애자라고 만만히 보고 …… 도둑으로 몰아!’ 라고 내뱉었다고 한다. 그 여자의 일이리라. 다니는 직장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았다. 기호는 이제 근무도 바꾸지 않고 있다. 심상치가 않다. 또, 동료들이 알고 있는 정보들을 모아 보았다. 그 여자 쪽에서 이제 운전실에 타는 걸 피한다는 것, 기호와 마주치는 것도 피해, 아예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호는 이제, 승무 교대를 갈 때 접이식 간이의자를 들고 가지 않는다. 가방만 들었을 뿐 한 손은 빈손이다. 그는 활력을 잃고 허탈해 하는 모습이다.‘피보호자는 잘 있냐.’고 물어보면, 씨익 웃으며 보여주던 생기를 찾아볼 수 없다

    그 여자를 운전실에 태운 다음날은, 기호의 얼굴 표정은 어떤 자신감과 여유가 있는 모습이었고, 그렇지 못한 날은 풀이 죽은 듯 시무룩했으므로 쉽게 구별되곤 했다.이제는 매일 잔뜩 찌푸린 얼굴이다. 그 찌푸림의 농도가 짙어져가는 듯하다. 그의 길쭉한 얼굴은 좀 더 길어지고, 흰 피부는 윤기를 잃은 듯 창백해져간다. 무엇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흔들거린다. 동료들과의 대화에도 끼지 않고, 혼자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그는 외딴섬처럼 고립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며칠 전, 휴게실 쪽에서 큰소리가 나서 가보았다. 동료 서너 명은 불쾌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있고, 기호는 서서 흥분한 듯 얼굴을 붉히며 소리치고 있었다.

    “사람들이 말이야, 인간이 되어야지. 인간성을 회복해야지 말이야 …… ”아차, 순간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어떤 일로 기호가 소리쳤는지는 모른다. 동료들은 손사래를 치며 말하기를 극구 거부했다. 분명해져 가는 건, 기호가 사업소에서 점점 고립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 분명해져 보이는 건, 그 여자가 어떤 일로 심한 곤경에 처해있다는 것이다. 그 곤경의 정도가 기호의 얼굴에 나타나는 것처럼 느꼈다. 그는 심한 상처를 입고 고통스러워하는 짐승처럼, 간혹 얼굴을 찡그렸다. 절벽으로 내몰린 사람처럼, 불안해하고 초조해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열차는 강변역에 도착했다. 시각은 오전 10시 42분. 객실은 많이 한산해졌다. 전쟁을 치르고 난 뒤 한동안 적막감이 돌듯이 객실은 조용하다.

    나는 전방 선로를 주시한다. 여름 태양열을 받아 레일 위로 아지랑이가 마치 꿈결처럼 피어오르고 있다. 객차 하부 전기장치에서 위잉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한강을 건너기 전 채비를 하는 소리처럼 들린다. “선배님, 오늘 점심은, 밖에서 먹죠?” “아, 그게 좋겠다.”삐익-. 차장이 발차부저전호를 보낸다. 나는 출발한다. 잠실철교를 천천히 지나간다. 직사광선에 눈이 부시다. 햇빛 가리개를 조금 끌어내린다. 멀리 강 건너 우뚝 솟은 롯데타워가 보인다. 주변 작은 건물들을 짓밟고 일어선 듯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거대한 몸체가 가까워진다. 나는 전방 신호 상태를 확인하고 속도를 높인다. 시속 80km에 맞춘다.

    금세 한강을 건넜다. 잠실나루역을 400m 앞둔 지점에서 초제동을 잡는다. 열차 속도를 떨어뜨려 역으로 진입해 들어간다. 다시 추가 제동을 잡는다. 속도를 더 떨어뜨려 승강장 시단으로 들어간다.

    아, 뭔가 이상하다. 전방 멀리 물체가 서 있는 것 같다. 전방을 뚫어지게 주시한다. 앗, 사람이다! 반대편 승강장시단, 부근 선로에 사람이 서 있다. 심장이 요동친다. 열차 속도를 완전히 죽여, 슬금슬금 기듯이 들어간다. 승강장의 정해진 위치에 열차를 간신히 세운다.바로 앞, 반대편 선로에 한 사람이 망연히 서 있다. 뒷모습이다. 웃옷은 분홍색이다. 아- 그 여자다! 나는 황급히 무전기를 들었다.

    “관제! 관제! 잠실나루역, 외선 선로에 사람이 서 있어요. 사람 …… ”반대편 선로에 열차가 나타났다. 기호의 열차다. 나는 정신없이 기적을 길게 울렸다. 뚫어지게, 기호 열차를 바라본다. 벌떡 일어나는, 기호가 보인다. 기호는 고함을 친다. 일그러지고 질린 기호 얼굴이다.

    뻑-, 하는 소리가 들렸다.

    “헉헉……관제! 관제!…… 잠실나루역, 외선 열차 사상사고 발생…… 사상사고 발생했습니다!” “선배님, 무슨 일이죠! …… 헉헉, 외선 열차 사상사고 발생…… 기다려…… 안내방송…………해라.” “00열차, 잠실나루역 외선 열차 사상사고입니까?” “……외선 열차……입니다.”

    가슴이 뻐근하다. 심장이 쿵쾅거린다. 귀가 멍멍하다. 눈앞이 캄캄하다. 시야가 보이지 않는다.‘……피, 피, 핏덩어리. 헉헉…… 남의 감자밭, 모퉁이 낭떠러지…… 헉헉 헉…… 깨진 동생의 머리, 피범벅 된 동생의 얼굴…… 헉헉… 사늘하게 식은 두 다리…… 흑흑흑, 얼마나 무서웠니…… 얼마나 아팠니…… 오빠는 한시도 너를 잊은 적 없다. 헉헉…… 그곳에서 기다려라. 헉헉…… 미류나무 강가에서 기다려라. …… 흑흑…… 물장구치며 놀던 그곳으로, 오빠가 찾아가마. 이번에는 넉넉하게 감자를 삶고…… 넉넉하게 삶고…… 흑흑흑…… 설탕도 챙기고…… 기다려 다오…… 흑흑…… 뻘 밭을 기어서…… 십 리 뻘 밭을 기어서라도 찾아 가마…… 미류나무 강가에서 기다려 다오!…… 흑흑흑…… 기다려 다오. 내 동생 숙영아!’

    이윽고, 나는 고개를 들어 전방을 응시했다. 은빛 레일이 두 줄기로 평행선을 그리며 끝없이 이어져 있다. 방음벽 너머 플라타너스나무 잎들이 바람을 받아 일제히 퍼덕이고 있었다.

    필자소개
    서울교통공사 기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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