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장경제의 극복과
    사회주의 본질에 대하여
    중국 '사회주의 시장경제' 문제 보충
        2018년 01월 16일 03:2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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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사회성격과 관련해서 필자는 본래 앞서 두 회분의 글(관련 글 링크)로 마치려 하였다. 그러나 지난 호 글이 레디앙에 실린 후 일부 독자의 문제제기가 있었다. 지난 글에서 필자는 중국의 시장경제는 “궁극적으로는 계급차별을 없애고, 마지막에는 ‘시장경제’까지 극복”하는 것을 자신의 목표로 삼는다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어떤 독자는 어떻게 중국식의 사회주의가 시장경제를 극복해 갈 것인지 그 방법이 모호하다는 지적을 하였다. 사회주의와 시장경제의 결합 가능성을 필자가 역설한 것을 보고, 심지어는 중국은 계획경제보다 시장경제를 더 선호하는 것 같다는 말도 하였다.

    이 같은 해석은 완전히 본인의 의도와는 다른 것으로,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선 얼마간 보충 설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지금 시기에 사회주의가 시장경제를 채택하는 것은 그것을 영구화하자는 것이 아니며, 최종적인 인간해방 사회로 가기 위한 ‘중간강령’일 뿐이라는 것이다.

    왜 지금 시기 사회주의에 있어 시장경제는 필연적인가?

    사회주의에 있어 시장경제가 ‘중간강령’의 의미를 갖는다면, 궁극에 있어서 시장경제는 소멸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사회주의는 장차 어떻게 시장경제를 극복하게 될까? 이 같은 시장경제의 궁극적 ‘극복’을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지금 시기 사회주의는 왜 시장경제를 필요로 하는지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맑스는 일찍이 자본주의 사회를 분석할 때 ‘상품’ 범주로부터 시작하였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우리 역시 사회주의 사회에 있어 ‘상품’ 문제로부터 논의를 출발해야 할 것 같다. 시장과 상품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사회주의에서 시장경제의 필연성은 결국 사회주의 경제의 상품경제적 성격으로부터 찾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맑스와 엥겔스는 일찍이 사회주의 사회에서 생산수단의 사회주의 공유제가 자본주의 사유제를 대체함에 따라 상품경제가 장차 소멸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이 예상은 전체 생산수단이 모두 사회적 소유로 귀속되고, 각각의 기업은 자신의 특수이익이 없어진다는 가정 하에 세워졌다. 그간의 역사적 실천이 증명하는 바는 맑스와 엥겔스의 이 같은 예상은 사회주의 사회가 수립된 후 실제 현실과 일치하지 않았다. 사회주의 조건하에서 상품경제는 소멸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크게 발전될 것이 요구되었다. 이는 주로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첫째, 현 단계 사회주의에는 여러 종류의 공유제 경제의 형식이 존재한다. 예컨대 전(全)인민소유제와 노동대중의 집체소유제 및 기타 공유제 경제의 형식이 그것이다. 또 다양한 공유제 경제 간에는 사회적 분업이 존재하는데, 예컨대 전인민소유제 경제는 주요하게는 대공업생산에 종사하며, 농업생산은 주요하게는 집체소유제 경제가 책임을 지는 것 등이 그것이다. 공업과 농업은 국민경제를 구성하는 양대 부문으로서, 그들은 상호 중요한 생산 재료와 소비 재료를 제공한다.

    그런데 전인민소유제 경제와 집체소유제 경제는 서로 다른 소유자에게 속하며, 그들의 생산물은 각자의 경제이익을 구현하기 때문에 무상으로 상대방에게 제공될 수는 없다. 그 대신 상대방의 생산물 획득은 반드시 등가교환을 통하여야만 하는데, 이 점은 우리가 조금만 생각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설령 사회주의 사회라 하더라도 만약 등가교환의 원리를 무시한다면 효율이 높은 경제단위는 효율이 낮은 경제단위와의 교환에서 손해를 입기 때문이다. 그 결과 생산주체인 노동자와 기업의 적극성은 저하될 수밖에 없는데. 과거 계획경제하의 사회주의 국가에서 누차 지적되었던 것이 바로 이러한 문제였다. 이는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민주적 계획경제’라는 그럴듯한 용어를 제시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그간의 실천은 오직 ‘등가교환’의 원리를 실현할 경우에만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듯 사회주의의 여러 공유제 경제 간에는 필연적으로 상품관계가 존재하게 된다. 등가교환의 원리가 작동한다는 것은 그 생산물이 상품적 성격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똑같은 이치로 집체소유제의 경제단위 간에도 각자 서로 다른 소유자들이 존재하며, 그들은 독자적인 경제적 이익을 지니기 때문에 서로 간의 경제적 연계 역시도 등가교환에 기초한 상품교환을 통한 방식으로밖에 실현될 수 없다.

    둘째, 전인민소유제 경제 내부의 기업 간에도 상품관계가 존재한다. 전인민소유제 기업의 생산수단과 생산물은 모두 전인민의 소유이며 다른 소유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주의 단계에서 전인민소유제의 특징은 소유권과 경영권이 분리된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국유기업은 비록 전인민적 소유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인민이 개별 국유기업을 함께 경영할 수는 없기 때문에 현실에서 그것은 특정한 노동자집단 및 경영자에게 맡겨진다. 이렇게 하여 국유기업은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경제적 실체가 되며, 경영 결과에 대한 독자적인 책임과 권리 및 이익을 갖게 된다. 국유기업의 이러한 상대적 독립성이 국유기업 서로 간에도 상품관계가 존재하는 원인이 된다.

    셋째, 사회주의 사회에는 주도적 지위를 점하고 있는 공유제를 기초로 하는 사회주의상품경제 외에도, ‘비공유제 경제’가 또한 존재한다. 이로부터 다른 비사회주의 성질의 상품경제, 예컨대 개체경제의 소상품경제가 광범위하게 존재하게 된다. 그 밖에 필요에 따라 개인기업 등 사영경제의 상품경제, 외자경제의 상품경제 등이 사회주의상품경제와 함께 현 단계 사회주의 사회의 상품경제를 구성하게 된다.

    특히 지구화시대에 들어 경제 일체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요즈음, 각국의 긴밀한 경제교류와 상호의존도의 제고는 매우 필수적인 일이 된다. 이 같은 추세에서 사회주의 국가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 오히려 이러한 상호침투는 여전히 소수인 사회주의 국가가 주변의 자본주의 국가들에 의해 ‘고립’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절실히 필요로 하는 바이다. 그럴 경우 이 같은 공유제와 비공유제 경제 간의 교환은 필히 등가교환의 원리에 입각하여야 하며, 이 때문에 생산물은 필연적으로 ‘상품’으로서의 성격을 갖게 된다.

    역사적으로 사회주의 사회에 상품경제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소련의 스탈린 시대에 이미 발견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상품관계가 사회주의 경제의 어느 특정 영역만이 아니라 경제 전반에 ‘보편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까지는 이후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렇게 볼 때 사회주의경제에 있어 상품관계의 ‘보편성’에 대한 인정은 ‘현대 사회주의’와 ‘구 사회주의’를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이처럼 사회주의에서 상품경제는 스스로 존재하는 이유를 갖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객관적 경제법칙으로서 인간이 억지로 제한하거나 소멸시키지는 못한다. 인간은 단지 그것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객관현실을 직시하면서 그것을 이용할 수 있을 뿐이다. 예컨대 만약 낙후된 농촌경제가 아직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등 상품경제가 미발달한 상태라면, 의식적으로 그 발전을 촉진시켜야 한다. 상품경제가 충분히 발전할 때라야 비로소 경제 전반은 진정으로 활성화되며, 각각의 기업 및 생산단위는 효율성이 제고되고, 사회분업의 확대와 생산 전문화 및 협업의 발전을 통해 생산의 사회화 수준이 한 단계 드높여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회주의에 있어 상품경제가 존재하는 한 그 기본적 법칙으로서의 ‘가치법칙’의 작용 역시 필연적이며, 이 같은 가치법칙이 제대로 작동키 위한 시장경제의 존재 역시도 필연적이게 된다. 그렇다면 이 같은 시장경제는 장차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까?

    중국 베이징에서 개최된 모터쇼 모습(사진=연세대 중국연구원)

    시장경제는 어떻게 극복되는가?

    2016년 3월 구글이 만든 인공지능 알파고와 한국 프로기사 이세돌과의 세기의 바둑대결을 계기로 인공지능 붐이 전 세계를 휩쓸었다. 이듬해인 2017년 들어서도 국내외 언론들은 인공지능 관련한 보도에 열을 올렸는데, 그야말로 이제는 ‘인공지능시대’의 본격적 개막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 같은 분위기다.

    그렇지만 인공지능은 자본주의에게 있어선 사실 ‘재앙’과도 같다. 인공지능시대의 본격적 도래는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자본주의의 종말을 예고한다.

    우선, 벌써부터 언론들이 걱정하고 있듯이, 인공지능은 대량실업을 몰고 올 가능성이 높다. 모 정부 관련 연구기관의 보고에 따르면, 2025년이 되면 인공지능에 의해 기존 일자리의 70%가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이 같은 보고가 조금 과장되었다손 치더라도, 어쨌든 이렇듯 많은 일자리를 로봇이 대신하게 되면 실업 대란과 구매력의 급속한 위축을 가져와서, 기업들로서는 자신들이 생산한 제품을 판매할 길이 없어지게 된다. 이 때문에 지금보다도 훨씬 심각한 경기위축이 장기화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 같은 수요와 공급의 큰 불균형은 과거에는 일시적이거나 주기성을 띠었던 것과는 달리, 인공지능시대에는 치유가 불가능한 영구적인 성격을 지니게 될 가능성이 크다.

    다음으로, 보다 근원적인 문제는 유통영역이 아닌 ‘생산과정’ 자체에서 발생한다. 즉 공장에서 로봇이 살아있는 노동자를 대체함으로써 이윤의 근원인 ‘잉여가치’ 자체가 함께 사라지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정치경제학의 초보적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노동가치설’에 대해 이해할 것이다. 이 학설에 따르면 살아 있는 노동만이 상품에 응고된 노동시간으로서의 ‘가치’를 창출할 수 있으며, 기계를 비롯한 다른 것들은 단지 그 가치(이미 자신에 응고되어 있는 노동)를 이전할 뿐이다.

    로봇은 기계 즉 고정자본이자 ‘불변자본’의 일종이기 때문에, 단순히 그 내부에 응고된 가치를 이전할 뿐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지는 못한다. 비록 자본가들이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있다 치더라도, 시장에서의 치열한 경쟁은 이 같은 가치법칙의 관철을 강제토록 만든다. 예컨대, 로봇과 자동화생산을 남들보다 일찍 도입한 기업은 노동생산성이 향상되어 제품 원가를 크게 낮출 수 있다. 이리하여 초기 얼마동안은 이 같은 기술혁신을 주도한 기업들은 ‘특별이윤’을 챙기게 된다. 그러나 시장경쟁은 다른 기업들로 하여금 조만간 비슷한 설비와 기술을 도입토록 강제함으로써, 상품 가격은 결국 ‘원가’ 수준으로 낮추어지게 되며, 이 원가는 최종적으로 자신의 가치(즉 그 내부에 응고된 노동시간)에 의해 규정을 받게 된다. 그런데 이 ‘가치’는 노동자가 사라지고 기계에 의해 거의 자동적인 생산체계가 작동됨으로 인해 거의 제로에 가깝게 된다.

    이리하여 잉여가치는 존재하지 않게 되며, 더불어 이윤이 생겨날 수 있는 원천도 사라지고 만다. 그런데 이윤 추구를 유일한 목적으로 하는 자본주의에 있어, 그 원천인 잉여가치의 소실은 다름 아닌 사망 선고나 마찬가지다. 결국 인공지능은 자본주의가 도달한 최고의 기술적 정점을 기록함과 동시에, 자본주의하에서는 결코 완성될 수 없는 미완의 기술로 남게 될 것이다.

    다시 본래의 문제로 돌아와서, 이 같은 인공지능의 발달은 시장경제에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큰 충격을 준다.

    첫째, 인공지능 기술이 동시에 수반하는 제반의 과학기술혁명, 예컨대 소재혁명, 에너지혁명, 로봇과 자동화 기술의 발달은 사상 유례가 없는 풍부한 재화와 그 저렴화를 가져오게 된다. (설령 자본주의하에서는 그것이 ‘객관적 잠재력’으로서만 그러할 지라도) 이 때문에 ‘등가교환’에 기초한 가치법칙은 그 의의를 점차 상실하게 된다. 그 같은 법칙은 재화가 궁핍했던 시절에나 유효하였던 것으로, 넘쳐나는 재화 앞에선 굳이 이득과 손해를 따지는 행위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둘째, 인공지능의 발전은 ‘계획경제’가 다시 전면적으로 부활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한다. 인공지능 기술의 한 영역인 ‘사물인터넷’의 발전은 이 같은 전망을 단적으로 보여주는데, 이 시기에 접어들면 인간은 각종 수치화된 정보의 수집과 기록·처리에 있어 거대한 능력을 획득하게 된다. 최근 미래의 사물인터넷과 관련된 묘사가 매우 유행하고 있다. 각 개인과 다양한 사회 주체들의 생활과 생산 및 공공의 각 영역에서 일어나는 활동들은 각종 센서에 의해 포착된 후 모두 디지털화 되어 시시각각으로 체계화된 사물인터넷 망을 통해 집결된다. 그리하여 이들 정보들은 인공지능에 의해 자동 분석된 후, 필요한 경제 및 공공적 계획이 수립되게 된다. 인간은 이제 다시 시장과 같은 ‘보이지 않는 손’의 작동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며, 시장의 무정부적 성격과 이로부터 발생되는 주기적인 경제공황도 겪을 필요가 없게 된다. 이렇듯 인류가 보다 직접적으로 사회 전반의 생산에 대한 통제가 가능해지면서, 시장은 자연스럽게 그 기능을 상실해 간다.

    중국 알리바바그룹 회장인 마윈이 최근 2030년이 되면 계획경제가 대세가 될 것이라고 예측하여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빅데이터를 통해 사전적으로 1~3년의 시장수요를 예측함으로써 계획경제를 수립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지금의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 기술의 발전추세를 볼 때 이 같은 예측이 전혀 터무니없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2030년에 그렇게 빨리 실현될 수 있을지는 약간 의문이다. 기술발전의 속도와 추이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어떻게 극복되어 가는지를 감안해야만 한다. 아마 미국과 서구자본주의 진영이 아직 여전히 강력하기 때문에, 그렇게 쉽사리 전 세계적인 계획경제의 도래는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며, 시장경제의 생명력은 생각보다는 좀 더 오래갈 수 있다. 어떻든 시장경제는 이렇듯 스스로가 촉진한 생산력발전에 의해 결국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는 운명을 맞게 될 것이다.

    알리바바 그룹의 마윈

    사회주의 본질에 대하여

    시장경제의 소멸과 관련한 논의를 마치기에 앞서, 사회주의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하자. 사회주의 본질? 이런 말을 처음 듣는 사람들이 꽤 많을 것 같다. 그러나 모든 사물이 본질이 있듯이 사회주의 역시 본질이 있다. 그것은 사회주의라고 하는 사물이 이 땅에 존재하는 ‘의의’와 관련되어 있다.

    사회주의의 본질 문제와 관련하여 중국의 개혁개방 설계사 등소평의 말을 참고해 볼 만 하다. 그의 사회주의 본질에 대한 규정은 다음과 같은 몇 마디로 말로 요약될 수 있다. 즉, 생산력 해방을 통해 생산력을 발전시키며, 착취를 소멸하고 양극분화를 없앤 후, 최종적으로는 공동부유를 달성한다는 것이다. 등소평의 이 같은 사회주의 본질에 대한 개괄은 크게 두 개의 기본측면을 포함한다. 첫 번째는 생산력 측면으로서, 생산력 해방을 통해 생산력을 발전시킨다는 것이 그것이다. 두 번째는 생산관계 측면인데, 착취를 소멸하고, 양극분화를 없앤 후 최종적으로는 공동부유를 달성한다는 것이다.

    등소평의 사회주의 본질에 대한 이 같은 개괄은 사회주의 역사상 처음’으로 생산력 해방과 생산력 발전을 사회주의 본질 문제와 연관시켰으며, 또 생산력 해방과 생산력 발전을 사회주의 본질적 요구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있다.

    우선 생산력 발전과 관련하여 보면,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의 창시자인 맑스와 엥겔스는 그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한 바 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생산력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혁명가’이다. 인류의 이상적 목표인 공산주의 사회는 ‘능력에 의한 소비’가 아니라 ‘필요에 의한 소비’가 실현될 경우에만 비로소 도달할 수 있으며, 이는 인류의 생산력이 고도로 발전한 단계에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 같은 높은 수준의 생산력 발전은 주기적 경제위기와 갈수록 빈부격차가 심화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그것을 본격적으로 준비하는 임무는 사회주의 사회에 맡겨지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생산력의 고도한 발전은 사회주의가 하나의 사물로써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이유 즉 그 ‘본질’이 된다.

    한국의 사회주의자라고 자칭하는 사람 중에는 사회주의의 이 같은 생산력 발전과 관련한 임무의 중요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가볍게 그것을 ‘생산력주의’라고 매도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것은 그 말을 하는 사람 스스로가 진정한 ‘인간해방’의 조건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이다. 맑스는 <도이치 이데올로기>에서 인간해방의 조건으로, 노동이 더 이상 ‘생계를 위한 수단’으로서의 성격을 탈피하고 ‘그 자체가 생활의 제일의 요구’로 변모되는 것을 들었다. 그렇다면 이 같은 노동의 성격변화를 위해서 필요한 조건은 무엇일까?

    노동이 ‘생계를 위한 수단’이 아닌 ‘생활의 제일의 요구’가 되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우선 첫째로, 사회적으로 물질적 재화가 충분히 풍족하게 제공될 수 있음으로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하여 인간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노동에 억지로 종사한다거나, 싫어하는 직업을 억지로 선택할 필요성이 기본적으로 사라져야 한다.

    맑스는 인간이 협소한 분업에 갇히게 되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생활 자료를 잃고 싶지 않기 위해서”라고 지적하였다. 굶주리는 실업자에게는 직업 선택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다행히 현재 세계 각국은 사회보장제도를 통해 이러한 실업자들을 구제하기 위한 사회적 제도를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실업보험의 대상 폭이나 보장수준은 아직은 매우 미약한 상태이다. 통상 정상임금의 40% 수준이 보장선이며, 그 수혜기간도 그리 길지 않다. 세계적으로 사회보장제도가 가장 발전한 스웨덴이나 덴마크 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일반적으로 길어야 2~3년이고, 6개월밖에 수령 받지 못하는 나라들도 많이 있다.

    따라서 앞으로 이러한 실업보험제도를 더욱 발전시켜 모든 실업자들이 수혜 혜택을 볼 수 있도록 하고, 보장 수준이 최소한 통상임금의 70%~ 80%에 다다르며, 또 수혜기간의 제한도 없어진다면, 바로 그 때서야 노동이 더 이상 생계를 위한 수단이 아니게 되는 첫 번째 조건을 기본적으로 만족시키게 된다. 현재 인류의 과학기술과 생산력 발전 속도를 볼 때 이러한 목표는 결코 매우 요원한 얘기만은 아니다.

    혹자는 만약 일을 하지 않더라도 충분한 실업보험을 지급받을 수 있다면 누가 힘들어 일을 하려고 하겠는가고 이의를 제기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는 일 없이 빈둥빈둥 논다는 것처럼 괴로운 일은 없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일하기를 싫어하는 것은 그 일이 자신이 좋아해서 선택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거나, 애써 일한 노동의 성과가 다른 사람에 의해 가로채어 지기 때문에 그러하다. 우리가 여기서 논의하고 있는 사회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문제들이 해결된 사회이다. 인간의 본질은 노동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으며, 인간은 기본적으로 노동 속에서만 진정한 보람을 얻고 삶의 의의를 확인할 수 있는 존재이다.

    둘째로, 사회 생산조직이 노동자들로 하여금 다면적인 노동에 종사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고 있어서, 노동자가 필요에 따라 손쉽게 이 일에서 저 일로, 이 직장에서 저 직장으로 옮겨 다니는 일이 가능해야 한다. 맑스는 <도이치 이데올로기>에서 그 같은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공산주의사회에서는 어떤 사람도 어떤 특정 활동범위가 없으며, 모든 사람은 어떤 부문 내에서도 발전할 수 있다. 사회는 전체 생산을 조절하므로, 개인은 자신의 원하는 바대로 오늘은 이 일을 하고 내일은 저 일을 하며, 오전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며, 해질 무렵에는 양떼를 몰고, 그리고 저녁식사 후에는 비평 활동에 종사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사냥꾼이나 어부, 목축업자 또는 비평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

    토요타와 같은 일본의 자동차 회사들은 ‘순환조립체계’로 유명하다. 한 노동자가 나사를 조이거나 자동차 문짝을 다는 일과 같은 특정적인 하나의 일에 고정되어 있던 포드시스템 하의 전통적인 분업체계와는 달리, 여러 가지 일을 돌아가면서 함께 할 수 있는 다면적인 노동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시스템은 우리가 논하는 진정한 분업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상황과는 아직 거리가 멀다. 그러나 현대 생산조직에서 보이는 이 같은 발전모습은 앞으로 미래사회에서 실현될 다면적 노동체계에 대한 하나의 시사점을 던져 줄 수 있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생산체계는 점차 인간노동의 개별적 특성에 점점 덜 의존하고, 표준화와 자동화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예컨대, 중세 도시의 길드제 수공업이나 자본주의 초기의 공장제 수공업에서는 생산이 개별 노동자의 숙련도에 크게 의존하였다고 한다면, 이후 공장제 대공업으로 넘어가면서는 인간이 하던 많은 일들은 기계가 대신하면서 현재는 로봇생산체계까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표준화와 자동화가 발전할수록, 사회생산은 점점 개별 노동자의 능력과 특성에 덜 의존하는 ‘사회 자체의 전체 생산에 대한 조절체계’가 완성되어 간다.

    인간은 이러한 자동화된 생산체계 속에서 각 분야의 표준적인 조작이나 관리감시 기능에 대한 지식만을 습득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사회 생산에 기여할 수 있게 된다. 이 같은 다면화된 사회적 노동체계 속에서 맑스가 묘사한 대로 인간이 하루를 오전과 오후, 그리고 저녁 시간대로 나누어 여러 가지 하고 싶은 일들을 돌아가면서 하는 것은 결코 동화 속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셋째로, 사람들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골라가며 하면서도, 그것이 곧바로 사회 생산력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주체의 개발과 교육이 선행되어야 한다. 즉 노동자는 사전에 어느 정도 충분한 교육을 받고 문화적 소양을 갖춘 사람일 것이 요구되는데, 이러한 주체의 자기개발은 교육‧의료‧주택‧환경 등 여러 방면에 걸친 사회적 공공복지정책에 의하여 뒷받침 되어질 때 비로소 가능하다. 오늘날 세계 각국의 인간 자체에 대한 투자와 관심은 날로 높아져 가고 있다. 과학기술혁명을 더욱 가속화시키고 생산력 발전을 한 차원 끌어올리기 위해서라도, 사회보장제도의 강화와 사회복지 수준을 높이는 것은 현대사회에서 필수적인 일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자신의 소유제적 한계에 갇혀서 이윤 추구에만 몰두할 뿐, 인간에 대한 투자에 머뭇거리거나 오히려 신자유주의에서 보이듯 후퇴하기까지 한다. 사회주의사회에 이르러서야 이러한 인간에 대한 과감한 투자와 사회복지 수준의 한 차원 상승 발전이 가능해지게 된다.

    충분히 교육받고 또 먹고사는 기본문제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노동자에게 있어서는 노동과 오락이 사실은 큰 차별이 없다. 즉 노동시간과 자유시간의 대립이 점차 사라지고 양자는 장차 상호침투를 통해 서로를 촉진하고 상호 전화하는 새로운 형태를 갖게 된다.

    예컨대 한편에선 자유시간은 생산노동의 성격을 갖게 되며, 인간은 자유시간 내에서 스스로 발전함과 동시에 개인의 노동력은 확대된 규모위에서 재생산되게 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낳게 된다. 다른 한편 노동시간은 ‘자유’의 성격을 갖게 되는데, 노동은 인간의 재능을 자유롭게 발휘하고 발전시키는 터전이 된다.

    맑스는 자신의 노트에 다음과 같이 요강을 메모하면서 그와 같은 사상을 피력하였다. “자유시간과 노동시간의 대립은 지양된다.” 장차 “노동시간을 절약하는 것은 자유시간을 증가시키는 것과 같아진다. 즉 개인으로 하여금 충분히 발전할 수 있는 시간을 증가시키는 것이 된다. 그리고 개인의 충분한 발전은 최대의 생산력으로 노동생산성에 반작용하게 된다. 직접적인 생산과정의 각도에서 볼 때, 노동시간의 절약은 고정자본의 생산으로 볼 수 있는데, 이러한 고정자본은 바로 인간 자신이다.” (맑스, <나 자신의 노트 요점>과 <정치경제학비판(1857-1858년 수고)>에서 인용)

    오늘날 소프트산업의 적지 않은 걸작품들은 일찍이 컴퓨터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던 매니아들의 오락 가운데서 탄생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게이츠가 그 좋은 실례인데, 그가 어렸을 때 만든 첫 번째 프로그램밍 작품은 자신이 좋아하는 체스게임을 위한 것이었다. 인간은 종종 직업적 압박감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게 활동하게 될 때 훨씬 천재적인 작품들을 내놓곤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자유로움 속에서 인간의 창조성은 마음껏 발휘되기 때문이다.

    이상의 세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추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회의 높은 생산력 발전이 요구된다. 때문에 분업을 극복하여 인간해방을 이루기 위한 전제조건은 다름 아닌 높은 생산력 발전인 것이다. 이 같은 높은 생산력 발전에 의해 뒷받침 되지 않는 분업의 인위적인 폐지는, 맑스가 얘기한 대로 단지 “빈곤의 보편화와 생필품을 위한 투쟁의 재개, 그리고 이로부터 죽었던 낡은 모든 잔재들의 재 부활”의 비극만을 초래할 뿐이다.

    주체의 가치 목표와 객관의 운동법칙

    사회주의 본질 문제와 관련한 토론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그동안 전 세계 사회주의자들에게 있어 상당히 곤혹스러웠던 문제 중의 하나인데, 바로 사회주의에 있어 ‘객관 운동법칙’과 ‘주체 가치목표’ 양자 간의 관계를 올바로 정립하는 문제이다. 현실에서 이 문제는 주로 사회주의가 ‘평등’을 우선시 할 것인가, 경제건설을 우선시 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나타났다. 본래 이 양자는 사회주의에 있어 충돌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 관계를 잘못 설정할 경우 과거 소련식 사회주의나 혹은 중국의 문화대혁명과 같은 사회주의 건설을 심각하게 저해하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특히 중국에선 관념적인 평등관과 이상주의가 너무 남무해서, “차라리 가난한 사회주의를 원할지언정 부유한 자본주의는 거부한다.” 라는 황당한 이론까지 등장한 적이 있다.

    덩샤오핑

    앞서 등소평의 사회주의 본질에 대한 개괄은 이 문제를 푸는 데 있어서도 도움이 된다. 그중 전반 부분, 즉 ‘생산력 해방을 통한 생산력 발전’은 이 경우 ‘객관 운동법칙’에 해당되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후반 부분 즉 ‘착취소멸과 양극분화 극복 후, 최종적으로 공동부유 달성’은 ‘주체가치 목표’에 해당된다. 등소평은 양자 관계에 대해 공동부유를 근본목적으로 삼으면서, 생산력 해방과 생산력 발전을 근본임무로 삼는다고 정리하였다. 이렇게 하면 우리는 한편으로 사회주의의 발전 방향을 명확히 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선 그 발전 과정과 동력 그리고 경로 역시 명료하게 할 수 있다.

    즉 사회주의는 흔들림 없이 착취소멸, 양극분화의 해소, 최종적인 공동부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하지만, 이러한 목표는 또한 처음부터 곧바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생산력 발전에 발맞추어점진적이고 단계적으로 실현되는 과정임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공동부유라는 ‘근본목적’을 처음부터 실현하고자 서두른다면, 그 결과는 생산력발전의 객관법칙을 위반하게 됨으로써 결국 ‘근본임무’를 달성할 수 없게 된다.

    과거 사회주의국가들은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이 관계를 올바로 정립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전반적으로 ‘생산력’ 발전보다는 ‘생산관계’의 고도화 측면을, 효율보다는 평등을 더 중시하였다. 그것은 소련에서 전인민소유제의 공유화를 서두르고 전일적 계획경제체제를 수립한 것을 통해서, 그리고 유고 사회주의가 ‘노동자 자치관리’를 지나치게 강조한 데에서 잘 드러난다. 과거 사회주의는 이렇듯 생산관계의 고도화와 정신적 동기를 사회주의 건설의 주요한 추진동력으로 삼아 공산주의적 이상과 현실의 낮은 물질적 생산력간의 괴리를 해결하려 하였다.

    사회주의 본질과 관련한 ‘주체 가치목표’와 ‘객관 운동법칙’ 두 측면의 상호제약 관계에 있어, 그 주요한 측면은 후자 즉 ‘객관 운동법칙’인 생산력 해방과 생산력 발전에 두어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볼 때 주체 가치목표의 실현은 반드시 사물의 객관 운동법칙을 준수하는 기초 위에서만 가능하며, 주체의 주관적 열망만을 앞세운다고 해서 그 목표가 이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생산력이 지속적으로 해방되고 발전되지 못한다면 다른 일체의 것은 결국 사상누각에 불과하게 된다. 이는 맑스주의 기본관점과 완전히 일치하는데, 맑스는 역사의 제일의 추동력과 진보적 요소는 다름 아닌 ‘생산력 발전’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는 또한 과거 사회주의 실패의 역사적 경험이 가르쳐준 귀중한 교훈이기도 하다.

    기존 사회주의 건설의 가장 큰 실수는 공동부유라고 하는 궁극적 목표를 생산력 해방과 생산력 발전의 현실적 기초 위에 확고히 세우지 못한 점에 있다. 만약 사회적 이상을 사회역사의 객관운동법칙의 기초 위에 세우지 못하고 생산력 발전을 그 현실적 기초로 삼지 않는다면, 사회주의는 단지 빈곤한 ‘평균주의’일 뿐이며 모두의 가난을 의미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필자소개
    북경대 맑스주의학원 법학박사 , 노동교육가, 현재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정책자문위원, 맑스코뮤날레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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