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규직 노동자의 삶과 꿈 ②
    정리해고 : 죽은 자들의 이야기
    “위장 취업자에서 늙은 노동자로, 어언 30년" (5)
        2018년 01월 15일 11:16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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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 회의 글 “정규직 노동자의 삶과 꿈 ①”

    2001년 2월 16일.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각 개인에게 정리 해고 통보서가 발송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나와 몇 명은 회사 임대 아파트로 달려갔다. 우편배달부가 오토바이를 타고 들어온다. 그의 오토바이에 실린 우편물 가방을 뒤졌다. 아는 동료들의 이름이 속속 눈에 들어온다. 지나가는 잘 아는 형을 불렀다.

    “형, 잘렸어!”

    정리 해고 된 조합원들이 속속 노동조합으로 모여들었다. 노동조합에서는 투쟁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런데 투쟁을 하면 과연 옛날로 돌아갈 수는 있는 것인지? 하필이면 왜 내가 대상인지? 이들은 가슴 속 깊은 분노를 표현하기보다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공장으로 모여드는 정리 해고 조합원 수가 하루하루 늘어갔다. 같은 처지의 정리 해고자들이 모여 마음을 나누고 교육과 토론을 진행하면서 투쟁의 전열도 가다듬어지는 것 같았다. 2월 19일 오후, 헬기가 뜨고 수천 명의 경찰들이 포클레인으로 공장 담벼락을 부수며 공장으로 밀고 들어왔다. 위원장을 비롯한 노동조합 간부들은 공장을 빠져나가 피신했다가 나중에 산곡동 성당에 투쟁의 근거지를 마련했고 나는 경찰에 잡혀 구속되었다.

    정리 해고 이전에 정리 해고자보다 더 많은 노동자들이 희망퇴직이라는 이름으로 회사에서 밀려났다. 많은 조합원들이 정리 해고를 막으려면 노동조합이 희망퇴직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가라앉고 있는 배에서 누군가는 내려야 남은 사람이 살 수 있다’는 논리였다. 그런데 이런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배에서 내리게 하고 자신은 살아남고 싶은 사람들이다.

    나는 구속되어 6개월 정도 형을 살고 나왔다. 출소 후 정리 해고 철폐 투쟁의 근거지가 된 산곡동 성당으로 갔다. 성당에는 노동조합과 200~300여 명의 정리 해고자들이 모여 투쟁하고 있었는데 나는 모여 있는 정리 해고 조합원들을 보고 놀랐다. 내가 예상했던 노동조합에 적극적이었던 사람들의 수는 적었고 노동조합 활동에는 소극적이고 현장에서 열심히 일했던 조합원들이 많았다. 연월차 거의 안 쓰고 일밖에 모르던 조합원들도 있었다.

    이후 정리 해고 조합원들과 술을 마실 때 내가 받은 질문은 “왜 정리 해고를 했냐?”보다 “하필이면 왜 나냐? 정리 해고의 기준이 도대체 뭐냐?”는 것이었다. ‘나는 정말 열심히 일했는데 왜 내가 정리 해고가 되었는지, 왜 회사는 나를 버렸는지?’ 그들은 이 대목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이들이 투쟁하는 배경에는 회사에 대한 강한 배신감이 크게 자리 잡고 있음을 느꼈다.

    정리 해고 전에는 회사 관리자들이 회사를 아버지에, 노조를 어머니에, 조합원들을 아이들에 비유하곤 했다. ‘노조는 필요하고, 투쟁도 필요해. 하지만 일단 회사가 잘 돌아가야 우리도 먹고 사는 거 아냐?’ 아버지인 회사는 돈을 벌고, 어머니인 노조는 조합원들을 챙겨 주고, 조합원인 아이는 그 덕에 먹고 사는 거다. 그런데 회사는 아이들을 거리로 내쫓은 비정한 아버지가 되고 노동조합은 정리 해고를 막지 못한 무능한 어머니가 되었다. 그렇게 정리 해고는 조합원들의 마음속 깊이 회사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을 심어 주었다.

    이후 경영진들이나 노사 담당자들을 만나면 한결같이 ‘정리 해고는 하지 말았어야 했다’는 후회어린 말을 많이 듣는다. 너무나 커다란 희생과 손실을 치렀고 무엇보다도 정리 해고를 겪은 이후 조합원들이 회사를 대하는 강한 불신의 눈길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경영진들은 정리 해고 이후에 조합원들뿐만 아니라 현장 관리자조차도 이른바 ‘애사심’이 없어지고 눈앞의 자기 이해에만 관심을 가진다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실제로 한국GM의 현장 관리자들은 정리해고 이전에는 경영진들의 지시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였지만 지금은 회사 경영진과 노동조합 사이에서 자신들의 이해를 중심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이익집단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현대자동차에 이어 대우자동차 정리 해고와 이에 맞선 처절한 투쟁은 노동자들에게 엄청난 상처를 주었지만 자본에게도 커다란 타격과 두려움을 가져다주었다. 정리 해고로 인한 결과에 대한 자본 쪽의 불안감은 비정규직 활용 확대로 나타나고,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정리 해고에 대한 불안감은 이를 용인해 주는 것으로 나타난다.

    나는 지금도 당시 GM이 대우자동차를 인수하기로 결정해 놓고 정리 해고를 포함한 구조조정을 인수 조건으로 내건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갖고 있다. 그리고 정리 해고는 단지 경영상의 위기 때문만이 아니라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기나긴 세월 동안 투쟁과 조직화 과정을 통해서 축적된 노동조합의 역량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것, 자본의 힘의 우위와 통제력이 관철되는 공장을 만드는 것, 흐트러진 노동 규율을 세우는 것, 그리고 비정규직의 활용 등으로 노동력의 구성을 바꾸는 것이 정리 해고의 숨은 의도라고 본다.

    회사는 공정한 기준을 가지고 정리 해고자 대상을 선정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당시 징계해고자 이외의 집행 간부 전원, 회사의 눈에 거슬리는 대의원들 다수, 특히 현장에서 열심히 활동하던 소위원 거의 전원이 정리 해고 대상에 포함됐다. 90년대 중반에 입사해서 대우자동차노동조합 운동의 새로운 흐름을 형성한, 정말 건강하고 젊은 20~30대 활동가 후배들이 거의 남김없이 해고됐다. 회사의 선구안이 좋았던 셈이다.

    정리 해고로 현장 활동가 역량의 커다란 단절이 생겼다. 특히 대우자동차 노동운동의 주력으로 떠오르던 젊은 활동가들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물론 이후에 이들 모두 복직이 되긴 했지만 이전 같은 활동력을 보이지 못했고, 많은 사람들이 활동력이 떨어지거나 스스로 꿈을 꺾어 버렸다.

    2001년 대우차 투쟁 당시 영상 캡처 (사진=한국GM지부)

    2001년 후반에 정면 대결로 치닫던 대우자동차 노사 간에 국면 전환의 시기가 왔다. 회사는 대화를 하자는 신호를 보냈고 노동조합은 직무대행 체제로 전환하면서 협상 국면을 준비했다. 나는 이때 정책실장으로 노동조합에 상근하며 협상의 실무를 담당했다. 정리 해고자 복직 문제와 GM이 대우자동차를 인수하는 데 걸림돌로 느끼는 단체협약의 일부 조항을 양보하는 교환이 주된 협상의 틀이었다.

    대우자동차 노사 간에, 그리고 노동조합과 GM 인수팀 간에 피 말리는 협상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정리 해고자 300명 우선 복직, 이후 나머지 정리 해고자는 생산량 증가 시 순차적 복직이라는 내용과 경영 참여 조항, 인사권·부서 이동 등과 관련된 합의 의무를 협의로 바꾸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단체협약의 양보가 교환됐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우선 복직 대상자 300명을 어떠한 기준으로 선별하는가? 노동조합은 정리 해고자들의 투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투쟁에 참여한 사람을 우선 복직시킨다’는 약속을 정리 해고 조합원들에게 반복적으로 강조했다. 노동조합과 회사 사이에 선발권과 기준을 놓고 지루한 실랑이가 계속되었다. 결국 노사 각자 인원의 절반에 대한 선발권을 갖는 것으로 타협을 했다.

    노동조합의 복직 대상자 선정은 독이 든 성배와도 같았다. 나는 GM이 대우자동차를 인수한 후에 생산량이 회복되면 나머지 정리 해고자 복직의 길도 조기에 열릴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정리 해고자들에게는 우선 복직 대상자 300명에 들어가느냐 아니냐는 사활적인 문제였다.

    ‘투쟁에 참여한 사람을 우선 복직시킨다’는 것이 노동조합의 기준이었지만 투쟁에 참여한 사람을 모두 복직시킬 수 없으니, 얼마나 열심히 투쟁했는지를 놓고 순위를 매겨야 한다. 유일한 근거는 각 부서 대표가 정리 해고 조합원들의 산곡동 성당이나 투쟁 현장 참석 여부를 체크한 소위 ‘출석부’지만 성실하게 출석부를 작성한 부서, 대충 작성한 부서, 아예 출석부가 없는 부서가 혼재돼 있었다. 결국 출석부와 각 부서나 선거구 대표들의 판단 등을 종합해서 노동조합이 인원을 선정했다.

    노사 간에 실무협의가 마무리 되고 정리 해고 조합원들이 노사 협상 결과를 듣기 위해 모였다. 내가 앞에서 설명을 했다. 복직의 세부적인 조건과 시기 등에 대해서 설명할 때는 정리 해고 조합원들은 다 고개를 숙이고 있다. 나의 입에서 “명단은……”이라는 말이 떨어지자 일제히 고개를 들고 수백 개의 눈이 나에게 쏠렸다. 나는 지금도 그 절절한 눈길을 잊지 못한다. 명단이 발표되고 복직 대상자에서 제외된 정리 해고 조합원들이 노동조합으로 몰려왔다.

    “누구보다 열심히 정리 해고 철폐 투쟁에 참여했는데 왜 내가 제외되었나?”

    “너희들이 나에게 그럴 수 있어?”

    한 사람 한 사람 절망, 분노, 절규의 몸짓을 쏟아 냈다. 노동조합 사무실은 분노한 그들에 의해 몇 번이고 부서졌다. 지금은 서로 웃고 술도 마시고 하지만 나는 몇 년 동안 그 정리 해고자들의 원망의 눈초리를 받으며 살아야 했다. 정리 해고를 둘러싼 노동자들 간의 갈등은 노동자들 내부를 갈가리 찢어 놓았다. 특히 노동조합 활동가들 사이에서 정리 해고의 책임, 정리 해고 투쟁 과정에서 보여준 태도 등을 놓고 상호 비난과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GM이 대우자동차를 인수한 이후 생산량이 급격히 늘어나고 정리 해고자들의 복직 투쟁이 이어지면서 몇 년에 걸쳐 복직을 희망하는 정리 해고자들은 모두 복직되었다. 징계 해고자였던 나도 복직해서 현장에 복귀했다.

    내가 돌아온 현장은 활기찼던 옛날의 대우자동차 현장이 아니었다. 현장 조합원들은 관리자 눈치를 보면서 집회도 참석하려 하지 않았고, 끈끈했던 직장 동료애도 많이 파괴되어 있었다. 특히 조합원들은 자신의 고용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지금 한 푼이라도 더 벌어 놓아야 한다는 생각이 거의 전부였다. 고용과 임금 이외에 다른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렇게 정리 해고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꿈을 닫아 버렸다. 고용과 임금, 특히 고용 안정에 대한 요구가 끊임없이 주술처럼 반복되었다.

    하지만 세월은 흐른다. 우리의 꿈을 꺾게 만들고, 활동가들의 역량과 꿈의 단절을 가져오고, 현장 노동자들의 관계를 갈가리 찢어 놓았던 정리 해고의 상처도 조금씩 아물어 가는 듯했다. 하지만 한국GM에서 위기는 숙명적으로 반복된다. 주기적으로 철수설, 공장 축소-이전설이 터져 나온다. 2001년 정리 해고가 가져다 준 트라우마에서 조금은 벗어났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2008년 미국 발 세계적 금융위기가 발생하고, 2009년 GM이 파산 신청을 했다.

    “에이, 또야.”

    짜증 섞인 반응들이 튀어나왔다.

    “형, 솔직히 정말 불안해요.”

    같은 부서의 한 동생의 말이다.

    “괜찮겠지?”

    아내도 걱정스럽게 물어본다.

    ‘이제 세 번째 해고가 오는가?’

    나도 묘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특히 정리 해고 되었다가 복직한 조합원들의 반응은 격렬했다.

    “다시 나가라고 하면 이 회사 불을 싸질러 버릴 거다.”

    그들은 고스톱 판의 용어를 빌려 외쳤다.

    “연사 없다.”

    연사는 고스톱 판에서 연이어 두 번 죽는 것을 말한다. 두 번 죽을 수 없는 게 고스톱 판 규칙이다. 정리 해고 시키려면 정리 해고 경험이 없는 사람을 먼저 시키라는 것이다. 하지만 회사는 정규직 노동자들을 정리 해고 하는 대신에 비정규직을 대량 해고시키는 것으로 대응했고 노동조합과 조합원들은 이를 묵인했다.

    지금 이 순간도 한국GM의 축소와 철수설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한국GM 조합원들은 상당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고 실제로도 그렇다. 내가 정규직 노동자의 다른 꿈을 이야기하면 “회사가 망하니 마니 하는 판국에 다른 것이 다 무슨 소용이요”라고 외칠지도 모르겠다. 일부 활동가들은 조합원들을 노동조합으로 결집시키기 위해 불안감이 있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요즘 조합원들이 위기의식이 너무 없어”라며 우려한다. 하지만 불안과 두려움의 감정은 힘을 약화시키는 부정적인 요인이지 조합원들을 결집시키고 힘을 증가시키는 긍정적인 변수가 될 수 없다.

    몇 년 전부터 나이든 조합원들의 분위기가 상당히 진취적인 모습으로 바뀌고 집회 참석 인원도 많이 늘었다. 정년이 몇 년 남지 않은 나이든 노동자들은 “GM이 그래도 몇 년은 간다. 정년 때까지는 가겠지. 우리야 괜찮지만 젊은 애들이 걱정이야”라면서 고용 불안의 심리를 털어 버린다. 반대로 젊은 층은 약간 체념어린 투로 대답한다. “쭉 가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겠어요?” 마음이 그리 무겁지 않다. 일부 활동가들은 위기의식이 없다고 걱정하지만 나는 두려움에 짓눌리지 않는 모습에서 힘을 찾는다.

    고용 문제는 정말 중요하지만 불안에 짓눌려서는 제대로 대응할 수 없다. 두려움과 불안에서 벗어나야 냉정한 판단과 분석, 열린 토론으로 힘을 모으고 전략적인 대응 방안을 만들 수 있다. 불안과 두려움의 감정에 휩싸이면 말의 잔치만이 무성할 뿐 열린 토론과 소통으로 힘을 모을 수 없다. 또한 불안의 무게에서 가벼워져야 노동운동이 다양한 꿈을 향해서 열릴 수가 있고,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선도 가질 수 있다. 공감이 씨앗을 뿌릴 수 있다는 이야기다. <계속>

    필자소개
    노동자. 한국GM 도장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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