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욕망 - 사랑의 컬러, 소비의 컬러
    2006년 03월 30일 10:2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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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은 가장 원초적인 색깔이다.

인류학자들은 유인원의 단계를 막 벗어난 인류가 흑백이라는 명암의 단계를 지나 가장 먼저 인식한 색깔이 다름 아닌 빨강이라고 추측한다.

언어학자들의 연구도 마찬가지다. 언어학자들은 어느 언어에서건 검은색과 흰색이라는 단어가 먼저 생기고 뒤이어 붉은 색을 지칭하는 단어가 생겼다고 본다. 그래서 빨강이라는 단어가 “색깔”이라는 뜻을 함께 가지는 언어도 많다. 예를 들어 에스파냐어의 ‘콜로라도(colorado)’는 ‘붉은’이라는 뜻과 ‘색’이라는 뜻을 동시에 가진다.

우리의 첫 번째 조상들이 붉은 색을 그 어떤 색보다 먼저 ‘발견’하게 된 것은 자연 속에 붉은 색만큼 강렬하고 인상적인 컬러가 없기 때문이다.

동굴에서 벗어난 인류가 고개를 들고 처음 본 것은 하늘에서 붉게 타고 있는 태양이었다. 그들은 힘들여 잡은 사냥감에서 흐르는 붉은 피를 보면서 생명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시뻘겋게 타오르는 불꽃은 공포와 숭배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생존의 무기가 됐다. 그리고 푸른 들판 이곳저곳에 점점이 핀 붉은 꽃을 보면서 처음으로 아름다움을 생각하게 됐다.

   
▲ 원시인류가 그린 동굴벽화는 붉은 색조가 주를 이룬다. 사진은 알타미라의 동굴벽화
 

빨강은 인류가 최초로 발견한 색이자 우리의 원초적 기억 깊은 곳에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색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붉은 색에 대해 가장 격렬한 심리반응을 보인다. 또한 인류문명에서 붉은 색 만큼 다양한 의미를 획득한 색도 드물다.

자연 속의 레드

머나먼 옛날 인류의 조상들이 자연 속에서 만난 붉은 색은 태양, 노을, 불, 단풍, 과일과 꽃이었다. 이런 것들은 왜 붉은 색을 띠고 있는 걸까?
저녁노을이 붉게 보이는 이유는 태양광선이 지표면을 통과할 때 파장이 짧은 푸른색의 빛은 공기분자 또는 미립자에 의하여 산란되어 버린다. 반면 파장이 긴 붉은색의 빛은 산란되지 않아 멀리까지 퍼져간다. 그래서 하늘이 붉게 보이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 속에 불꽃은 항상 붉은 색이다. 어릴 적부터 불을 그릴 때는 항상 빨간 색으로 칠한다. 그러나 실제로 불꽃은 노랑 아니면 파란 색이다. 또한 성냥개비의 색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림을 그릴 때는 언제나 빨간 색으로 성냥머리를 색칠한다. 불은 붉은 색이라는 관념과 연관이 있다고 한다.
붉은 단풍은 잎 속에 있는 ‘안토시안’이라는 물질 때문에 생긴다. 안토시안은 딸기, 자두, 포도 같은 과일이 붉은 빛을 띠게 만드는 물질이기도 하다. 과일의 붉은 색을 만드는 물질은 체내에서 항산화물질로 작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항산화란 노화로 생긴 활성산소가 세포 등을 해치는 것을 막아주는 것을 말한다. 반면 토마토의 붉은 색을 내는 라이코펜은 항암기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붉은 색을 보면 단맛을 연상하는 이유는 들판에서 붉은 과일을 찾던 원시인류 시절의 경험 때문일 것이다.
붉은 꽃은 흔히 수분을 도와줄 곤충을 유인하기 위해 그런 색을 띠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벌과 같은 곤충들은 색을 구분하지 못한다. 벌은 꽃의 자외선 파장을 보고 꿀이 있는 곳을 찾아낸다.

권위의 레드

붉은 색은 권위를 나타낸다. 수많은 문화권에서 붉은 색은 종종 왕과 귀족의 상징으로 사용됐다. 신분이 미천한 사람은 옷에 붉은 색을 사용하거나 붉은 색으로 집을 장식하는 것이 금지됐었다.

붉은 색은 지배계급의 특권을 상징했다. 그래서 1524년 독일 농민들이 귀족의 착취에 대항해 봉기했을 때 그들의 요구조건에는 빨간 망토를 입을 권리가 들어 있었다. 농민이 빨간 망토를 입는 다는 것은 신분의 벽이 무너지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이 요구는 결코 수용될 수 없었다.

 
▲ 칸 영화제 레드카펫 위에 선 박찬욱 감독과 이영애씨

지배계급이 붉은 색을 독점했던 이유는 이 색이 지도자에게 강력한 힘을 부여한다는 미신 때문이기도 했지만 붉은 색 염료를 만드는데 막대한 돈이 들기 때문이었다. 중세 이후 부를 축적한 상인들이 출현하기 전까지 신분제의 아래에 위치한 사람들은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라도 붉은 색 옷을 만들거나 입을 수 없었다. 빨강은 사치의 색이기도 했다.

신분제가 철폐된 현대에도 귀족의 상징으로 사용된 빨강의 흔적은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매년 깐 영화제에서 세계적인 스타와 감독들은 ‘레드 카펫’을 밝고 행사장에 들어간다. 왕의 길을 상징했던 붉은 양탄자는 이제 대극장이나 호텔에 깔려있다.

신분제도의 잔재가 강하게 남아있는 영국에서는 귀족 가문의 족보백과를 지금도 ‘레드 북’이라고 부른다. 멋쟁이들이 즐겨입는 ‘레딩코트’는 영국 왕실에서 여우사냥을 할 때 입던 빨간 승마코트(red riding coat)를 줄인 말이다.

이제는 명목만 남은 유럽 왕실이지만 행사 때는 온통 붉은 색으로 치장을 한다. 이 때의 빨강은 권위의 상징이라기보다는 화려했던 시절에 대한 낡은 추억 정도로 봐야 할 것이다.

정열의 레드

   
▲ 사랑은 붉은 것, 발렌타인 데이 카드

빨강은 사랑을 나타내는 색이기도 하다. 그러나 처음부터 빨강이 사랑을 표현하는 색이었던 것은 아니다. 서구문화에서 심장을 상징하는 하트가 사랑의 기호로 채택되면서 심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붉은 피가 상대방을 향한 사랑의 마음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래서 발렌타인데이 카드는 온통 빨갛게 만들어진다.

빨강이 사랑을 나타낼 때 그 사랑은 잔잔한 사랑보다는 격정적이고 열정적인 사랑인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빨강이 우리 마음속에서 격렬한 흥분을 일으키는 색이기 때문이다.

투우경기를 보면 소는 투우사의 붉은 망토를 향해 돌진한다. 그러나 소는 색맹이라 붉은 색을 구분하지 못한다. 소를 흥분시키는 것은 망토의 흔들림이다. 정작 망토의 붉은 색을 보고 흥분하는 것은 소가 아니라 구경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흥분은 투우사가 소의 등에 칼을 꽂았을 때 흐르는 붉은 피를 보면서 절정에 달한다.

   
▲ 투우사가 흔드는 망토의 붉은 색은 관객들을 흥분시키기 위한 것이다.
 

금지된 레드

빨강이 사랑의 색으로 쓰이면서 에로스와 섹슈얼리티의 상징으로도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인간의 이 원초적인 욕망은 많은 문화권에서 도덕적 금기로 여겨졌다. 그 결과 빨강은 왕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창녀의 색이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사창가를 홍등가라고 불렀다.

빨강은 권위와 지배의 상징이면서 한편으론 은밀한 욕망을 나타내는 색이었다. 그래서 빨강은 쉽게 도덕의 지표에서 부도덕의 지표로 변환됐다. 이 역설은 도덕으로 치장한 문명의 위선을 보여준다.

기독교에서 붉은 색은 예수의 희생과 사제의 권위를 상징한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붉은 색은 악마와 부정의 색이기도 하다. 종교회화에서 예수를 배반한 유다는 종종 빨강머리로 그려진다. <주홍글씨>에서 청교도들은 부정한 여자로 몰린 헤스터 프린의 목에 주홍색으로 대문자 A라고 쓴 판자를 걸었다. 불륜(adultery)의 첫 글자다.

   
▲ 영화 <주홍글씨>의 한 장면. 청교도식 재판을 받는 프린의 머리 위로 붉은 A자가 보인다. ⓒ Hollywood Pictures
 

위험한 색, 레드

빨강이 금기의 색이라는 의미를 더하게 된 후 현대에 들어서는 위험과 금지의 의미도 덧붙여졌다.

체온계나 속도계의 눈금이 빨간 선 안으로 들어가면 위험 상황을 나타낸다. 도로의 위험상황은 붉은 표지판으로 표현된다.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면 ‘적색경보’가 발령된다. 빨강은 위험과 경계의 색이다. 그리고 또한 빨강은 금지의 색이다.

   
▲ 한번만 봐주세요. 심판의 레드 카드는 절대적인 힘이다. 2002년 월드컵 한국대 이탈리아전에서.

신호등의 붉은 색은 건너지 말라는 금지의 의미다. 축구에서 레드카드는 선수의 경기장 진입을 금지한다. 스튜디오에 빨간 불이 들어오면 모두들 조용히 해야 한다.

금지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 빨강은 이제 금지된 행위를 위반했을 때나 잘못을 저질렀을 때 이를 교정할 수 있는 힘도 얻게 됐다. 세계 어디서나 선생님은 빨간 연필로 답안지를 채점한다. 그리고 틀린 답 위에 빨간 연필로 정답을 적는다. 선생님의 빨간 연필은 모든 아이들을 긴장시킨다. 원고도 빨간 색으로 교정한다. 장부 위의 틀린 숫자는 붉은 줄을 긋는다.

교정의 최고권위는 역시 법원이다. 중세에는 사형을 집행할 때 빨간 깃발을 걸었다. 법관은 빨간 잉크로 판결문에 서명했다. 지금도 많은 나라에서 판사들은 붉은 색 법복을 입는다.

소비의 레드

   

맥도널드, KFC, 버거킹, 롯데리아… 왜 유명 패스트푸드 체인은 빨간 색 일색일까?

답은 색채심리학에 있다. 1950년대 미국의 심리학자 피버 버렌이 창안한 색채심리학은 색상에 대한 인간의 반응, 행동변화를 연구했다. 버렌의 연구에 의하면 빨강은 사람들로 하여금 단 맛을 느끼게 한다. 아울러 식욕을 불러일으킨다.

이 연구 결과가 나오자마자 식품업계에 붉은 색 인테리어 열풍이 불었다. 특히 값싼 맛을 대량판매해야 하는 패스트푸드업계에서 이런 현상이 심했다. 식당의 인테리어조차도 단순히 보기 좋은 차원을 떠나 고객의 지갑을 열게 만드는 전략의 일환이 된 것이다.

색채심리학을 이용한 마케팅은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특히 붉은 색이 불황으로 침체된 소비심리를 자극한다는 생각에 ‘레드 마케팅’이라고 부를 정도로 빨강을 선호하는 분위기다. 우리나라만 해도 최근 몇 년 사이 BC카드, SK주유소처럼 붉은 색을 전면에 내세운 기업이미지를 만들거나 백색가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붉은 냉장고, 붉은 노트북 등이 쏟아지고 있다. 기업들은 빨강의 강렬한 이미지가 소비자의 시선을 조금이라도 더 붙잡아 놓고, 자기네 상품의 선택 가능성을 높인다고 믿고 있다.

흰색과 검은색 다음으로 생겼다는 빨강. 원시인들이 벽화에 많이 사용한 원초적인 칼라고, 로마와 중세에 들어와서는 왕과 귀족의 색이라 하여 고귀한 신분의 상징이 됐다. 자본주의의 시작 단계에서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을 상징하는 색이 됐고 또한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하면서는 오히려 광고와 소비의 색으로 각광을 받는 등 “레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생각은 꾸준히 바뀌고 있다.

당신이 구분할 수 있는 빨강은 모두 몇 개?

현재 색채학에서 분류하는 빨강색은 모두 105가지이다. 이중 명도가 가장 낮은 것이 ‘카드뮴 레드’고 가장 높은 것이 ‘카르메신 레드’다. 물론 일반인들이 실생활에서 구분할 수 있는 빨강은 10개 안팎이다.
빨강은 다른 색을 혼합해서는 만들 수 없다. 그래서 ‘일차색’이라고 부른다. 다른 색이 전혀 섞이지 않은 순수한 빨강은 ‘마젠타’라고 부른다. 그러나 마젠타는 사람들에게 빨간 색이 아니라 분홍색으로 인식되어 있다. ‘붉은 악마’의 응원에 사용된 빨강은 색채학적으로 순수한 빨간 색이 아니라 노란 색을 섞어 만든 것이다.
요즘은 합성염료를 통해 빨간 색을 만들지만 화가들은 여전히 자연에서 추출해낸 빨강 색을 선호한다.
화가들은 꼭두서니의 뿌리를 갈아 만든 ‘꼭두서니 래커’와 여성 립스틱의 원료로도 쓰이는 코케닐로 만든 빨강 색을 쓴다. 코케닐은 선인장에 기생하는 벌레로 1526년 에스파냐 무역상이 아메리카에서 발견했다.
카드뮴레드는 인공합성된 원소인 카드뮴을 통해 만든다. 빨강 중 가장 가격이 비싸다.
중세시대 화가나 염색업자들은 케르메스라는 벌레로 빨강을 만들었다. 그러나 모직 10kg을 붉게 염색하려면 케르메스 14만 마리가 필요할 정도였기 때문에 어지간한 돈으로는 케르메스 빨강을 얻을 수 없었다.

※ 이글은 에바 헬러가 지은 <색의 유혹>(2002, 예담)을 참고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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