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의 호텔이야기(1)
    [근현대 동아시아 도시] 외국인 위한 숙소에서 상업호텔의 등장까지
        2018년 01월 05일 10:4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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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언론재단DB를 통해 살펴보면 도심의 호텔에서 바캉스를 즐기는 ‘호캉스’라는 신조어가 처음 사용된 것은 2005년경이다. 물론 1985년 이미 ‘도심 호텔의 즉석 피서에 눈길’이라는 제목으로 호텔 수영장에서 인스턴트 피서가 도심의 새 풍속도로 등장했다는 기사가 있었다. 하지만, ‘호캉스’라는 신조어가 널리 사용되어 신조어의 지위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2015년에 이르러서이다. 바쁜 현대인에게 쉼이란 필수적이라는 인식이 강해지면서 여유롭게 호텔에서 바캉스를 즐기는 사람이 많아졌으며, 매년 20% 이상 그 인원이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관광호텔업협회에 따르면 서울의 관광숙박업 객실 수는 2010년 23,209개에서 2016년 46,047개로 두 배 가까이 증가하였으며 2019년에는 61,000개에 이른다고 전망하고 있다. 이는 중국인 관광객을 염두에 둔 정부의 관광숙박시설 확충 정책에 의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호캉스를 즐기는 내국인들이 증가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최근 강남에 오픈한 L7호텔의 총지배인은 개관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호텔을 ‘트렌드 세터가 모여드는 놀이터, 문화적 아지트’로 만들겠다고 밝힌 것과 같이 호텔은더이상 숙박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호텔은 비교적 규모가 큰 서양식 고급여관을 말한다. 이는 숙박이라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정의이다. 하지만, 최근 컨벤션, 비즈니스 등으로 사업영역을 확대하고 있는 호텔의 성격은 관광진흥법의 정의에서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관광진흥법 제3조 제1항 제2호 가목에 따르면 호텔업은 관광객의 숙박에 적합한 시설을 갖추어 이를 관광객에게 제공하거나 숙박에 딸리는 음식·운동·오락·휴양·공연 또는 연수에 적합한 시설 등을 함께 갖추어 이를 이용하게 하는 업을 말한다.

    호텔의 등장

    호텔은 19세기 철도와 여행의 발전에 따라 종래의 여인숙과 귀족의 옛 저택이 숙박시설에 대한 수요를 더 이상 만족시킬 수 없어 도입된 것이라고 한다. 1829년 미국에서는 최초의 현대식 호텔 인트레몬트호텔(Tremont Hotel)이 문을 열었다. 처음으로 로비를 만들어 전과 같이 바에서 등록할 필요없이 호텔 로비에서 체크인을 할수 있도록 하였다. 욕탕이 구비된 1인용, 2인용 객실을 확보하였으며, 각 방에는 열쇠와 체인을 달았다. 무료 세면대와 물주전자, 신문과 비누를 제공하고 지배인을 두어 관리하며, 벨보이를 부를 수 있는 호출기를 도입하는 등 지금 호텔에서 제공되는 서비스가 처음으로 시작된 곳이다.

    사진1.트레몬트호텔(1834)(British Library 소장)

    20세기에 접어 들면서 늘어나는 여행인구에 대응하기 위한 호텔들은 더욱 많아지게 되었다. 고급스러운 시설을 갖추고 부유한 층을 대상으로 한 영업을 하거나, 철도역 주변에 허름하게 들어선 서비스가 부족한 소규모 호텔들 사이로 중산층을 대상으로 한 호텔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호텔왕이라 불리는 스타틀러(Statler)도 이 시기에 등장하였다. 그는 호텔 비품에 대한 표준화와 능률화, 합리화를 꾀하였다. 계단에 방화문이 설치되고 방해금지(Don’t disturb) 표지가 문고리에 걸렸으며, 어두운 실내에서도 쉽게 객실등을 켤 수 있도록 스위치를 설치하고, 개인용 욕탕과 얼음물 공급기가 제공되는 등 근대호텔 서비스의 표준이 되었으며, 상용호텔의 효시가 되었다.

    사진2.스타틀러호텔(1900~1910년)(Library of Congress 소장)

    외국인들을 위한 숙소

    우리나라의 최초의 호텔은 인천의 대불호텔이다. 대불호텔(大佛Hotel)은 1880년대 이래 일본인 호리 큐타로(堀久太郞)에 의해 운영되었으며 침대 객실과 다다미 객실을 갖추고 있었다. 그 외에도 중국인 이타이(怡泰)가 운영한 스튜어드호텔(Steward’s Hotel), 오스트리아계 헝가리인 스타인벡(Joseph Steinbech)이 주인이었던 꼬레호텔(Hetel de Coree) 등이 있어 개화기 인천을 통해 조선을 방문한 사람들을 위한 숙박시설로 활용되었다.

    1900년 무렵 서울에도 호텔이 들어서게 되었다. 경운궁 인접지역의 서울호텔(Seoul Hotel), 경운궁 대안문 앞의 프렌치호텔과 임페리얼호텔, 그리고 서대문 정거장 부근의 스테이션호텔 등이 개업했다. 1896년을 전후한 시기에 영업을 시작한 손탁호텔은 1902년 2층으로 된 서양식 벽돌건물을 신축하여 궁내부의 프라이빗호텔의 형태로 운영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호텔들은 규모가 크지 않았으며, 서양식 숙박시설 그이상의 의미를 갖지는 못하였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일본식 여관도 운영되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파성관(巴城館)과 포미여관(浦尾旅館) 등이 있다. 이중에서는1906년(또는1911년)에 개업한 경성호텔도 있었다.

    사진3. 손탁호텔(서울역사박물관소장)

    사진4. 경성호텔(『大京城都市大觀』)

    식민지배의 상징, 조선호텔

    본격적으로 호텔이라고 부를 수 있는 최초의 호텔은 1914년 건립된 조선호텔이다. 1911년 무렵부터 철도호텔들이 계획되고 건립되었으나 철도호텔로 건립된 조선호텔의 규모와 위상은 다른 어느 호텔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다. 지상4층, 지하1층의 규모에 60개의 객실을 갖추고 있었다. 객실은 2, 3, 4층에 있었으며, 고급객실은2~3층에 일반객실은 4층에 주로 배치되었다. 고급객실에는 개별적인 근대식 욕실과 화장실이 구비되었으며, 일반객실은 욕실과 화장실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부대시설로는 로비, 라운지, 집회실, 콘서트홀, 특별식당, 대식당, 보통식당이 있었으며 대식당과 보통식당을 합치면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 미국에서 수입된 승강기를 갖추었으며, 난방, 세탁, 제빙을 위한 설비들은 지하에 배치되어 있었다.

    독일인 건축가 게오르그 데라란데가 설계를 담당하였으며 많은 자재와 설비는 독일, 미국 등 외국에서 수입하였다. 조선철도국 직영으로 건축되었으며, 운영에는다롄야마토호텔(1907), 뤼순야마토호텔(1908), 장춘야마토호텔(1908), 펑텐야마토호텔(1910) 등 만주에서 호텔을 운영하고 있던 남만주철도회사가 참여하였다.

    원구단 부지를 철거하고 건립된 조선호텔은 단순히 상업적 목적에 따라 건립된 호텔이 아니라 식민지배의 상징으로 활용되었다. 1915년 물상공진회 방문 외국 귀빈 숙소를 비롯하여 정무총감, 조선총독 등 식민지 정부의 주요 권력자들이 활발하게 사용하고, 업무회의나 각종 행사를 진행하는 등 조선총독부의 영빈관 역할을 하였다. 1921년에는 부대사업의 일환으로 용산에 골프장까지 운영하였다.

    사진5. 조선호텔(서울역사박물관소장)

    주요한 고객 중에는 미국인 단체관람객들도 있었다. 1900년대부터 이루어진 미국인 관광단의 방한은 1920년대 대형유람선의 운항으로 수백명 단위로 대규모 관광단의방한이 가능해졌다. 초기에는 소수의 인원으로 손탁호텔 등에 머물렀지만, 조선호텔이 개관된 이후로는 대부분 이곳에 머물렀다.

    한규무는 미국인 한국관광단의 잦은 방문은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통해 한국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해 나가려는 조선총독부의 관광정책의 일환이기도 했지만, 1911년 11월 압록강철교의 준공과 안동과 봉천을 잇는만철 안봉선의 개통으로 중국과 만주, 일본을 여행하는 관광객들이 편리하게 한국을 경유할 수 있게 되었기때문이라고 지적한다.

    1926년 3월 9일 조선일보 보도에 따르면, 1926년 3월 8일 미국 프랭크 쿠크사에서 주최한 세계주유관광단 650명이 인천에 도착하여 시내를 관광하고 임시열차편으로 서울에 도착했다. 이들을 모두 태울 수 있는 자동차가 없어 인력거 650대가 동원되었다. 이들 중 97명은 조선호텔에 투숙하고 47명은 남대문역 침대열차에서 숙박했으며, 나머지는 인천으로 귀환했다가 이튿날 다시 서울로 돌아와 관광을 계속하였다.

    또한, 민간부문의 이용객들이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조선상공회의소, 조선광업회, 조선의사회 등 민간협회의 사용이 빈번하여 1916년 5%였던 민간부문의 행사가 1924년에는 38%까지 증가하게 되었다. 1922년에는 류인갑이라는 시골학교 교사가조선호텔에 머물며 남대문통에 위치한 여러 상점에서 1500여원에 달하는 물건을 절도하고 호텔에 지내다가 체포된 사건이 있었는데, 이로 미루어 일반인의 투숙도 드문 일이 아니었다.

    이에 발맞추어 조선호텔은 1924년 로즈가든을 일반인에게 개방하였으며, 1926년에는 상류층을 상대로 한 기존의 영업방침을 변경하여 오백명을 수용하던 식당을 일반객실로 전환하고 중산층을 흡수하려는 노력을 하였는데, 이로 인해 경성여관조합으로부터 항의를 받기도 하였다.

    소규모호텔

    1929년 자료에 따르면 서울에는 일본식 여관이 50곳, 조선식 여관이 345곳이 있었다. 이중에는 개인이 설립한 소규모 호텔들도 포함되어 있다. 앞서 말한 경성호텔과 임옥호텔(林屋Hotel)이 있었다. 임옥호텔은 남만주철도주식회사 경성관리국 출신인고바야시 하루키(小林春樹)가 1928년 건립한 것으로 경성역 우측의 고시정(古市町)에 위치하고 있었다.

    사진6. 임옥호텔(『大京城都市大觀』)

    1931년에는 명동호텔(明東Hotel)이 문을 열었는데, 창업자는 명동(明東)으로만 알려져 있다. 영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조선에 이상적인 호텔이 적은 것을 한탄하여 자신의 집을 개조하여 호텔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한옥을 개조하여 만든 호텔로 다옥정25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주로 조선인들이 머물렀던 것으로생각된다.

    사진7. 명동호텔(『大京城都市大觀』)

    1934년에는 모리 다쯔오(森辰男)가 본정2-100에 본정호텔(本町Hotel)을 열었다.

    사진8. 본정호텔(『大京城都市大觀』)

    1936년에는 당시 천향원(天香園)이라는 최고급 요정의 주인인 김옥교(金玉嬌)가 서울에 조선식 호텔이 없는 것을 통감하고 사간정(司諫町)에 2,000여평의 부지를 사서 천향각(天香閣)이라는 호텔을 건립하려 하였지만, 중일전쟁으로 중단된 바 있다.

    오피스텔 형태의 상업호텔, 반도호텔

    1938년 4월 1일 일본 질소비료주식회사의 사장인 노구치 시다가후(野口遵)가 황금정1정목에 건립한 반도호텔이 영업을 시작하였다. 반도호텔은 8층 111실 규모의 호텔로 임대용 상가와 사무실, 호텔이 한 공간에 위치하고 있는 오피스텔 형태의 상업호텔이었다. 이는 조선호텔보다 규모가 큰 것은 물론이며 동양에서 4번째로 규모가 큰 호텔이기도 하였다. 호텔 운영면에서도 위에서 언급한 근대호텔의 표준서비스인 스타틀러호텔의 상용호텔 양식을 도입하여 일반인을 상대로 한 영업을 시작하였다.

    사진9. 반도호텔(서울역사박물관소장)

    손정목은 호텔의 건립과 관련한 재미있는 일화를 전하고 있는데, 노구치 시다가후가 조선호텔을 방문하였다가 허름한 차림으로 인해 종업원에게 쫓겨난 것을 계기로 반도호텔을 건설하고자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그는 이 일이 있은 후 조선호텔 바로 뒤인 황금정1정목18번지의 2천여평의 땅을매입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더 큰 규모의 호텔을 건설, 조선호텔과 같은 높이인 5층에 자신의 사무실을 두고 창 너머로 조선호텔을 내려보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표면적으로 반도호텔은 조선호텔과 경쟁적인 관계를 형성한 것처럼 보였다. 국가와 기업이라는 설립 주체의 차이는 1939년 조선호텔은 고구마밥을 이용하여 절미운동에 적극 참여하지만 반도호텔은 쌀을 가장 많이 사용한 업체로 선정되는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만, 모두 식민지 지배의 표상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했다. 또한, 식민지 자본주의 발달로 인한 소비문화의 진작으로 경제적 여유가 있는 일반인도 호텔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조선호텔과 반도호텔은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미군정을 거쳐 정부로 다시 재벌에 불하되었으며, 1970년이 될 때까지도 서울의 최고급 호텔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해방 이후미군, 외교관 등으로 인한 호텔 수요의 증가로 1955년 금수장, 1957년 사보이호텔 등이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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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소개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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