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탁소 부부의 ‘묘한 투쟁’ 의지 또는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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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3월 28일 07:5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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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까 한 2년전 쯤 누군가 그랬다. 지역구 위원장과 국회의원의 차이는 VIP와 백수건달이라고(아니 한량이라고 했던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잘되면, 한국사회에서 끗발 날리는 VIP가 되는 것이고, 낙선하면 백수건달로 지낸다는 얘기다. 그 말을 빌리자면 난 지금 백수건달 혹은 한량이다. 한 달 돈벌이로 치자면 두 자리 숫자를 넘어선 적이 없으니 주위에서 볼 때 더욱더 그러하게 볼 것이다.

    요즘 난 진정한 백수건달이 되기 위해 노력해 보기로 했다. 모름지기 백수건달이라면, 슬금슬금 동네 한 바퀴도 돌고, 돈 생기는 일도 아닌데 사람들의 대소사 참견도 하고, 밉지 않을 만큼 거드름도 피워야 한다. 늘 참견만 하면 사람들로부터 욕먹는 천덕꾸러기가 되기 십상이라, 간혹은 풀리지 않는 문제로 전전긍긍하는 동네사람들 에게 날카롭고 명석한 대안제시를 해야 함은 물론이다. 그래야 어디 가서 국밥이라도 얻어먹지 않겠는가.

    오늘도 진정한 백수가 되기 위해 마포구의 한 점을 지정해 출발한다.

    “우리 아들이 다니는 학교가 너무 낡았어요. 어떻게 좀 해주세요. 천장이 곧 무너질 거 같다고 애들이 그러더라구요.”

    세탁소에 들어가서 명함을 건네자, 곧바로 민원이 나온다. 현장답사가 필요한 것이기에 수첩에 메모를 하고 이후 상황을 알려드리겠다고 약속한다. 순간 떠오르는 것은 지방자치단체에서 교육부분에 대해 재정을 지출할 수 있는 교육경비보조금을 이용하는 것. 교육경비보조금은 마포구 예산의 5%, 즉 약 10억원 가량의 금액을 각급 학교에서 신청을 받아 심의, 지원하는 교육재정이다.

    현재 마포구 교육경비보조금은 전체학생을 위한 사안이나, 저소득층·사회적 약자계층에 대한 배려보다는 소수 학생들에게만 혜택이 돌아가는 수학 경시반 운영 등에 쓰이고 있다.
    설명을 들은 부부는 일단 ‘교육경비보조금’이란 제도 자체가 있다는 것에 놀란다. 자신들의 ‘권리’로 관철시킬 수 있는 예산이 있다는 것을 듣자, 구청을 향한 ‘묘한 투쟁’의 기류가 감돈다. 이러면 대성공이다. 하지만, 모든 게 다 이렇게 술술 풀리는 건 아니다.

       

    ▲ 지역 주민이 운영하는 한 음식점에 들러 민원을 듣는 필자

    아이를 업고 영업을 하는 ‘엄마’를 보는 건 흔한 일이다. 동네 골목에서 동네사람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는 소규모 영세업체에서는 특히 자주 목격된다. 이럴 때는 두 가지로 생각이 나뉜다. 엄마의 등에 업혀있는 ‘아이’의 관점과, 아이를 업고 장사를 해야 하는 ‘엄마’의 관점이다.

    양육과 생계를 동시에 책임져야 하는데서 오는 정신적 스트레스, 그리고 육체의 고단함, 엄마의 입장은 우리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보석같이 소중한 아이의 존재가 짐이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 느꼈을 좌절감은 덤이다.

    한편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불만이 가득할 만하다. 예쁜 나비 그림으로 장식된 벽을 보며, 포근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야 할 시기에, 포대기에 쌓여서 꼼짝달싹도 못해 아프고 불편하다. 간혹 엄마가 일에 지쳐 자신에게 심드렁해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덤으로 주어지는 아픔이다.

    아이의 불만이 엄마의 불만보다 덜 절박하게 취급될 어떤 이유도 단연코 없다. 1천2백96만명 서울인구 중 0~5세까지의 영·유아 인구는 58만명이다(2005년 9월30일 기준). 우리나라 군대를 흔히 60만 대군이라고 하는데, 서울에만 58만여명의 아이들이 있으니 그 ‘규모’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마포구의 경우 인구 39만명 중 영·유아 인구는 2만3천명, 전체 인구대비 4.1%에 해당한다. 이 영·유아 인구 중에서도 영아에 해당하는 0~2세까지의 인구는 영·유아 인구 2만3천명의 절반인 1만1천명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1만명이 넘는 갓난아기를 돌볼 국공립 시설이 마포구에 딱 하나뿐이라는 거죠. 36명만 수용할 수 있다네요. 취업한 여성이나, 아주머니처럼 아이를 데리고 일하는 분들이 이런 사실을 꼭 아셔야 해요.”

    은근히 기대했던 ‘묘한 적개심과 투쟁의지’ 대신 체념이 날아온다.
    “그래도 그게 그렇게 맘대로 되겠어요. 돈 있는 사람들이야 사람 불러서 쓸 테고, 어디 그거 새로 지으려고 하겠어요. 그냥 팔자려니, 포기하고 사는 거죠.”
    더 이상 얘기하기 싫고 이제 그만 돌아가 줬으면 하는 표정도 이어진다. 정치권을 향한 불신과 체념. 타 정당 지지자와 얘기하는 것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막막하게 만든다. 교체타임에 불러주지 않는 축구선수처럼 초초하고 답답하기도 하다.

    먹고 살기 힘들어서 무려 8주 동안 휴일에도 가게 문을 열었지만, 손에 들어온 것은 “8천원뿐”이라고 한숨짓는 사람들. “이쪽에도 표를 줘 봤고 저쪽에도 표를 줘 봤지만 뭐하나 바뀐 게 있나요”라는 퉁명스러운 냉소.

    그러나 가장 충격적으로 정치 무관심을 나타낸 것은 오십대 한 아주머니의 말이었다.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나온 말이어서, 몇 번이고 사람들 앞에서 써먹었을 그 말. “국민의 정부가 국민을 다 죽이고 있어요.” 지금은 참여정부인데요, 하고 어찌 답할 수 있었겠는가.

    “최연희도 그럴 수 있죠, 뭐. 정치인들 다 그렇지 않아요. 지들도 그러면서 아닌척하기는. 성추행하는 의원이나, 자기 배만 불리면서 맨날 싸움질이나 의원이나 엎어치나 메치나 똑같아요.” 아이러니하게도 최연희는 사퇴를 촉구하는 동료의원들 덕에 구제될 수 있었다.

    지역을 슬금슬금 다니면서 뜻대로 얘기가 풀리지 않을 때, 떠올리는 캐릭터가 있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이란 영화 속 주인공.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그 캐릭터만큼은 사랑을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모든 일에 관여하고, 문제를 속 시원하게 해결 하는 주인공은 공식적으로는 ‘백수’지만, 그 능력으로 인해 특별한 직업이 없이도 동네사람들의 ‘신뢰’를 받으며 경제문제까지 해결한다.
    정치인으로서 세상 문제에 관여해 내가 속한 정당의 이념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나나, 세상사 꼭 필요한 일에 참견하겠노라고 도발적으로 선언한 <레디앙>이나 ‘홍반장’은 분명 닮고 싶은 캐릭터다. 하지만, 정치에 대한 기대를 접은 주민들의 체념과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극복하지 않고서 민주노동당은 홍반장이 될 수 없다.

    주민들의 정치 불신, 정치 무관심의 표현을 계속 듣고 있다보면 그 내용이 비슷해서 상투적으로 받아들일 위험이 있다. 그러나 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정치 불신의 원인이, 주민들 얘기의 상투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또 그 얘기군”이라며 상투적으로 듣는 정치권의 상투성에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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