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납고 고요한 밤,
    너의 춤은 허공으로 뜨고
    [풀소리의 한시산책] 유종원 '강설'
        2018년 01월 03일 01:0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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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 눈

    -기형도-

    네 속을 열면 몇 번이나 얼었다 녹으면서 바람이 불 때마다 또 다른 몸짓으로 자리를 바꾸던 은실들이 엉켜 울고 있어. 땅에는 얼음 속에서 썩은 가지들이 실눈을 뜨고 엎드려 있었어. 아무에게도 줄 수 없는 빛을 한 점씩 하늘 낮게 박으면서 너는 무슨 색깔로 또 다른 사랑을 꿈꾸었을까. 아무도 너의 영혼에 옷을 입히지 않던 사납고 고요한 밤, 얼어붙은 대지에는 무엇이 남아 너의 춤을 자꾸만 허공으로 띄우고 있었을까. 하늘에는 온통 네가 지난 자리마다 바람이 불고 있다. 아아, 사시나무 그림자 가득 찬 세상, 그 끝에 첫발을 디디고 죽음도 다가서지 못하는 온도로 또 다른 하늘을 너는 돌고 있어. 네 속을 열면.

    지난 11월 24일 아침에 일어나니 밤새 눈이 와서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 있었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감상도 잠시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생각이 곧바로 굴뚝이나 광고탑에 올라가신 분들로 옮아갔기 때문입니다.

    조망이 트인 전철역 플랫폼에서 눈 덮인 야산을 바라보면서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어렸을 때 눈이 오면 강아지만큼이나 신나서 뛰놀던 기억. 토끼를 잡겠다고 무릎까지 빠지는 눈 덮인 산을 한나절 헤매던 기억. 옛 광산 높은 언덕에서 눈썰매를 타던 기억. 눈 내린 데다 상고대까지 피어나 아름다운 남한강변을 자전거로 한없이 내달리던 기억 등등.

    ‘눈(雪)’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은 차고 넘치는데, 그 기억들을 억지로 끄집어내지 않으면 ‘눈’에 대한 감상이 이내 굴뚝이나 광고탑, 텐트에 머무르고, 왜 분노와 슬픔으로 변환될까 하고요.

    11월 24일 원당 전철역에서 바라본 첫눈 온 야산

    저는 자연과 인간의 아름다움을 가장 깊이까지 느껴야 아름다움을 지킬 힘,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힘이 강하게 생긴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늙은 풀’이어서일까요, 주변이 밟혀서 온전히 그 아름다움에 취하지 못하는 경우가 참 많네요. 특히 눈을 보고 아름다운 감상에 쉬 젖지 못하는 건 여전히 ‘추위’에 노출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겠지요.

    시(詩)나 그림에서 ‘추위’는 ‘세한도(歲寒圖)’에서 보이는 것처럼 ‘시련’의 다른 표현이고, ‘눈’ 또한 추운 겨울에 오는 것이기에 같은 상징으로 쓰입니다. 이번에 소개하고자 하는 ‘강설(江雪)’ 또한 그러합니다. 단순히 풍경으로 읽어도 훌륭한 시(詩)이지만, 시인의 처지를 함께 읽으면 더욱 감정이입이 될 것입니다. 시를 볼까요.

    강에는 눈이 내리고(江雪, 강설)

    – 유종원(柳宗元)

    산이란 산엔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길이란 길엔 사람자취 모두 끊겼구나.
    외로운 배엔 도롱이에 삿갓 쓴 노인
    홀로 낚시하는데 찬 강에 눈이 내리는구나.

    千山鳥飛絶(천산조비절)
    萬徑人踪滅(만경인종멸)
    孤舟蓑笠翁(고주사립옹)
    獨釣寒江雪(독조한강설)

    유종원(柳宗元)은 773년에 태어나서 819년에 죽은 중국 당(唐)나라의 정치가, 문장가, 시인입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산수시(山水詩)를 잘 지어 도연명(陶淵明)에 비견되며, 왕유(王維)·맹호연(孟浩然)과 함께 당시(唐詩)의 자연파를 형성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문장도 뛰어나 벗인 한유(韓愈)와 함께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로 꼽히는 분입니다.

    유종원은 약관(弱冠)인 21세에 우리 조선의 문과(文科)에 해당하는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하여 벼슬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26세에는 학식이 많고 글 잘하는 사람을 시험하는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합격한 수재였습니다. 재능이 뛰어나 남들에게 주목을 받는다는 뜻을 ‘두각(頭角)’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한유(韓愈)가 쓴 유종원 묘비명에서 유종원이 젊은 나이에 일찍부터 재능이 남달리 뛰어났음을 ‘현두각(見頭角)’이라고 표현한 것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합니다.

    29세에는 정6품인 남전위(藍田尉)가 되었습니다. 34세 때 당(唐)나라 덕종(德宗)이 붕어(崩御)하고 새로 순종(順宗)이 즉위하였습니다. 순종은 왕숙문(王叔文), 왕비(王伾) 등을 등용하였고, 유종원을 예부(禮部) 원외랑(員外郞)으로 승진시켰습니다. 이들은 금군(禁軍)을 장악하는 등 당시 권력을 쥔 부패한 환관들을 억제하고 황권을 강화하는 개혁정책을 펼쳤는데, 이를 ‘영정혁신(永貞革新)’이라고 합니다. 합리적 개혁주의자인 유종원도 영정혁신에 적극 가담하였습니다.

    「한강독조도(寒江獨釣圖)」 명(明)나라 화가 주단(朱端) 작(作)

    그러나 환관들이 개혁에 저항하여 기득권 수구파 세력과 연합해 6개월 만에 순종을 몰아내고 황태자 이순(李純)을 옹립합니다. 이렇게 하여 영정혁신은 180일 만에 좌절되었고, 왕숙문과 왕비는 지방으로 좌천된 뒤 살해되었습니다.

    개혁에 참여했던 여러 인사들도 모두 지방으로 좌천되었습니다. 유종원 또한 소주(邵州)의 자사(刺史)로 좌천되었습니다. 소주자사로 부임한 뒤 2개월 만에 또 좌천되어 영주사마(永州司馬)가 되었습니다. 이번에 소개하는 「강설(江雪)」은 영주사마 시절에 쓴 시(詩)입니다. 그렇기 때문인지 이 시에는 절정의 관직에서 개혁에 대한 열망을 현실 정치에서 실현하다 급격하게 좌절된 개혁적 지식인의 음울(陰鬱)이 배어 있습니다.

    워낙에 유명한 시(詩)라 제가 달리 덧붙일 건 없을 거 같습니다만, 그래도 볼까요. 음미한다는 차원에서요.

    千山鳥飛絶(천산조비절) 산이란 산엔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萬徑人踪滅(만경인종멸) 길이란 길엔 사람자취 모두 끊겼구나.

    적막한 겨울 풍경입니다. 얼마나 추웠으면 산에 사는 새들도 모두 자취를 감추고, 길이란 길에는 인적이 끊겼을까요? 우리 어릴 때 어른들이 아이들 놀리느라 날씨가 추우면 ‘까마귀가 얼어 죽었다’고 하였지만, 아무리 날씨가 추워도 새들이 아예 자취를 감추지는 않지요. 그런데, 왜 새 한 마리도 날지 않는다고 했을까요? 그건 이어지는 3, 4구를 좀 더 극적으로 묘사하기 위한 시적(詩的) 장치이겠지만, 실제 시인의 마음이기도 했겠지요.

    풍경을 유종원이 이 시를 쓰던 시점의 인간 세상에 대입해보면 더욱 분명합니다. 개혁이 실패하고, 다시금 환관(宦官)들과 기득권 귀족들의 부패가 세상을 뒤덮고, 뜻있는 이들이 죽임을 당하고 지방으로 좌천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희망을 상실하였습니다. 마치 새도 날지 않고, 사람들도 나다니지 않는 추운 겨울처럼요.

    孤舟蓑笠翁(고주사립옹) 외로운 배엔 도롱이에 삿갓 쓴 노인

    獨釣寒江雪(독조한강설) 홀로 낚시하는데 찬 강에 눈이 내리는구나.

    날이 추워 새도 날지 않고, 인적도 끊겼는데 낚시라고 될 턱이 없겠죠. 그런데도 도롱이를 걸치고 배를 몰고 나가 낚시를 드리웁니다. 마치 무언가를 절실하게 찾는 구도자(求道者)처럼요. 구도자가 가는 길은 의례 그렇듯이 순탄하지 않습니다. 겨울 추위뿐만 아니라 이제는 눈까지 내리네요. 유종원은 마치 자신의 미래를 예견한 것 같습니다.

    이 시를 쓴 유종원은 좌천에 좌천을 거듭하여 영주사마(永州司馬)로 내려왔지만, 절망만 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현실은 어려웠지만 학문과 시문(詩文)은 물론 정사에도 열심이었답니다. 마치 이 시구(詩句)의 노인처럼요. 부임지인 영주(永州)에는 부모의 부채로 노비가 된 아이들이 많았는데, 이를 해결해 풀어주고, 직접 학교를 설립하여 백성들에게 학문을 장려하였으며, 황무지를 개간하고 우물을 파는 등 주민들의 복지에 크게 신경을 썼다고 합니다. 그런 그를 잊지 않아서일까요. 지금도 중국 유주시(柳州市)에는 그를 기념한 유후공원(柳候公園)이 있고, 유종원기념관도 건립되어 있답니다.

    겨울 풍경을 그린 우리 한시(漢詩) 한 편을 볼까요.

    초겨울날 갑작스레 눈발 날리더니
    빈 뜰에 사각사각 주렴처럼 내리네
    하얗게 하얗게 세상 온통 은빛이고
    가득가득 처마마다 옥고드름 달렸네

    初冬飛雪急(초동설비급)
    空院亂鳴簾(공원난명렴)
    皚皚銀成地(애애은성지)
    盈盈玉作簷(영영옥작첨)

    이 시는 퇴계 선생하고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을 벌였던 유명한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선생의 시입니다. 제목은 「유거잡영(幽居雜詠)」이고, 위 인용부분은 총 15수 중 10수의 전반부입니다. ‘유거잡영(幽居雜詠)’은 ‘숨어살며 풍경을 읊은 노래’라는 뜻입니다.

    시를 보면 참 서정적입니다. 초겨울에 때 이르게 눈이 내렸나 봅니다. 혹시 눈 내리는 소리 들어보셨나요? 고봉 선생은 눈 내리는 소리를 ‘어지럽게 울린다’는 뜻의 ‘난명(亂鳴)’이라고 표현했네요. 초겨울에 내리는 눈은 대개 물기가 많은 습설(濕雪)입니다. 습설이 내릴 때 눈을 감고 가만히 소리를 들어보세요. 아마도 사각사각 소리가 날 겁니다. 키 작은 관목 옆이나 풀밭, 대나무 숲 근처에서 습설을 맞으면 사각이는 소리는 더욱 또렷합니다. 아마도 고봉 선생은 외떨어진 정자나 서재에서 첫눈을 맞았나 봅니다.

    겨울 문수산에서 바라본 눈 덮인 강화도와 염하(鹽河)

    초겨울에 준비한 원고를 이제야 탈고합니다. 초겨울 날씨를 생각하며 준비했는데, 어느덧 한겨울로 접어들었습니다. 새해에는 좀 더 열심히 원고를 써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하면서 한 해를 반성해봅니다.

    올해는 탄핵부터 새로운 정권 탄생, 남북한 전쟁 위기 등 참으로 다사다난(多事多難)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한 해였습니다. 교수신문에서는 올해의 사자성어로 ‘파사현정(破邪顯正)’을 선정했습니다. ‘거짓된 것을 부숴버리고, 올바른 것을 드러낸다’라는 뜻인데, 저도 그 뜻에 걸맞게 우리 사회가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꿈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그 바람을 윤동주의 동시 한 편에 담아 봅니다.

    – 윤동주

    지난밤에
    눈이 소오복히 왔네
    지붕이랑
    길이랑 밭이랑
    추워한다고
    덮어주는 이불인가봐

    그러기에
    추운 겨울에만 내리지

    필자소개
    민주노총 전국민주버스노동조합과 전국운수산업노동조합에서 일했고, 한국고전번역원에서 공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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