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에겐 언니가 있다
    [밥하는 노동의 기록] 시금치볶음
        2017년 12월 29일 09:1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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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니에게서 또 배웠지, 시금치볶음

    사십 년을 살아 언니 둘을 얻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나는 큰 딸이고 육촌 이내의 친척을 싹 다 훑어도 언니가 없다. 그래서 항상 언니가 고팠다. 언니가 있으면 나랑 학교도 같이 가고, 내가 친구하고 싸울 때 와서 내 편도 들어주고, 옷도 나눠 입고, 엄마에게 야단맞으면 같이 엄마 험담도 하고, 밤에 몰래 과자도 같이 나눠 먹을 텐데. 물론 친언니가 있는 친구들이 언니와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있었다.

    그들의 언니들은 동생과 싸우면서 등교하고, 동생이 친구와 싸우는 것을 봐도 소 닭 보듯 지나가고, 고자질로 동생을 야단맞게 하고, 자기 옷을 입고 나갔다며 동생의 등짝을 후려갈기고, 과자를 빼앗아먹었다. 그러나 가끔 같이 양말을 사러 다니거나 떡볶이 국물에 순대를 찍어먹으며 수다를 떠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래서 혼자인 내게도 언니가 있다면 항상 좋은 언니일 것이라 생각했다. 우리 엄마가 죽었다 깨어난대도 절대로 내게 줄 수 없는 것이 언니여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늦게 얻은 언니 둘 중의 하나는 대학 같은 학과 선배로 만났다. 언니가 불러서 농성장에 갔고, 언니가 가자고 해서 농활을 갔고, 언니가 같이 하자고 해서 집행부를 하다 보니 어느새 대충 ‘운동권’이라 불릴만한 짓을 하고 있었다.

    언니는 재주가 많은 사람이라 나는 언니에게서 아래아 한글을 사용하는 법, 무슨 무슨 주의, 학생회실 오래된 난로에 불 붙이는 법, 각종 신청서와 공문 작성법, 생일잔치는 생일 전에는 치러도 생일 후에는 치루지 않는다는 것, 컵라면을 더 맛있게 먹는 법, 청테이프를 빨리 뜯어 붙이는 법, 비판적지지, 플래카드를 걸고 대자보를 쓰는 법을 비롯해 해장하는 법까지 배웠다.

    그러면서도 나는 언니의 속을 꽤 썩였는데, 세미나 준비를 안 하는 것은 기본에 모진 소리를 자주 했고 만취하여 주정떨기가 여러 번이었으며 손 바쁜 시기에 잠수를 타기도 했고 내 말이 우습게 들리냐며 꼴에 건방도 떨었다. 언니가 그런 나를 품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지 저거 또 저러네 내버려 둔 것인지 모르겠으나 언니와 나는 함께 하는 내내 한 공간에서 그렇게 살았다.

    언니가 학교를 떠나자 우리는 더 이상 만날 일이 많지 않았다. 일 년에 한두 번 얼굴을 마주하며 산 지가 꽤 된다. 언니가 딴 나라에서 공부를 시작하는 바람에 아예 만나지도 못한 해도 있었지만 보고 싶은 마음에 기회가 되면 꼭꼭 챙겼다. 그렇게라도 인연을 이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언니를 만나며 알았다.

    내 딸을 데리고 언니의 딸을 만나러 언니네 집에 간 날, 언니에게서 시금치 볶음을 배워왔다. 처음엔 그것이 시금치인 줄도 몰라서 이 맛있는 것이 무엇이냐 물었다. 상하이의 무슨 시장에 갔더니 푸른 채소를 마늘, 소금, 후추를 뿌려 볶아주는데 그게 그렇게 맛있었다며 센 불에 후다닥 볶으면 된다고 알려줬다. 아이를 키우면서 밥을 하는 이 곳이 해가 아무리 가도 계속 낯설었는데 알고 보니 언니도 여기 와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따스워졌다.

    예전에 친구들과 과거로 돌아간다면 스무 살의 자신에게 해줄 말이 있냐고 묻자 모든 친구들이 ‘그 선배를 따라가지 마!’라고 할 거라며 웃었다. 그렇지만 나는 안다. 아마 친구들도 그럴 것이다. 시간을 몇 백 번을 돌린대도 나는 언니를 따라갈 것이다. 몇 년을 지지고 볶다, 띄엄띄엄 만나다 결국은 시금치볶음을 배워 집으로 돌아오며 즐거워할 것이다. 내가 지금 이렇게 사는 첫 시작은 스무 살의 어느 날 언니를 따라갔기 때문이다. 언니는 가르친 적이 없다 하겠지만 나는 배웠고 그것으로 나이 먹어 여기까지 왔다.

    한 해가 또 간다. 그저 보고 싶다는 마음 하나를 먹고 자라온 인연들에게 올해도 당신들 덕에 평안했음을, 지금의 나를 구성하고 있는 것의 많은 부분이 당신들에게서 온 것임을, 그래서 앞으로도 이 실낱같은 인연을 계속 붙잡고 함께 늙어가기를 소망한다는 말을 전한다.

    마늘종 무침, 깻잎지, 시금치 볶음, 두부조림, 현미보리밥.

    필자소개
    독자. 밥하면서 십대 아이 둘을 키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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