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신을 피폭당한 노동자를 생각하며
    [서평] 『위장취업자에서 늙은 노동자로 어언 30년』
        2017년 12월 23일 09:3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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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노총 금속노조의 활동가인 조건준 씨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어언 30년’의 서평을 동의를 얻어 게재한다. 이 서평을 읽고 내용에 대한 관심이 생기면 이범연의 책도 읽어보기를 권한다. 그리고 한국 민주노조 운동의 과거, 현재를 생각하고 미래를 함께 고민할 수 있기를 바란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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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몹시 아팠다. 여기저기 뛰어다니느라 피로가 쌓일 때, 추위가 몰려오니 독하게 앓았다. 택배가 도착했다. 이범연 선배가 쓴 책을 보내왔다. 만사 귀찮아 밀쳐 두었다. 한참 누워있으니 답답함이 몰려오고 궁금증도 함께 일었다. 명문대 나와 위장취업 하더니 무려 30년이나 생산현장에 있던 이 사람 생각이 궁금하다.

    단박에 읽었다. 그와 함께했던 장면이 떠오른다. 1999년부터 대우그룹 부도에 맞서며 화염병 날리던 2001년 대우차 현장, 막바지에 결국 단체협약 몇 조항 내주고 정리해고자 전원 단계적 복직을 합의했다. 나는 격한 투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교섭을 앞둔 막바지에 대의원과 조합원 앞에서 분명히 말했다. “집안이 망할 상황이 되면 전자제품 가재도구 팔아서라도 집안을 살리는 법이다. 정리해고자 복직을 위해서 단체협약 몇 조항 양보할 수밖에 없다.”

    어떤 이는 내게 “양보교섭을 강요한 자본의 프락치라고 했다. 다시 그 상황이 와도 그렇게 할 것이다. 그들은 혁명투사처럼 비치고 나는 자본 프락치처럼 보일지라도, 그들은 “전진 앞으로”를 외치더라도 나는 냉정하게 물러서야 할 때 “후퇴”를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큰 결단인지 조금은 안다. 당시 이범연 선배는 교섭에 끝까지 참여했고 나보다 더 큰 고초를 겪었다. 영광도 절망도 고뇌도 고스란히 담으며 살아온 30년이 깊게 묻어있다.

    투쟁과 해고가 반복된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글 하나하나 곱씹지 않아도, 글이 담은 장면이 영상으로 되살아나기에 단박에 읽을 수 있었다. 다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이범연 선배의 고민을 다 알 수 없다. 만나 얘기한 지 10년 넘은 듯하다. 그런데 바로 어제 만나서 얘기 나눈 것처럼 왜 이리 공감가는 대목이 많은지 모르겠다.

    성찰이다. 배부른 귀족노조 소리 듣는 대기업 노동자로서 진지한 자기성찰이다. 운동권은 늘 비판적이다. 말 많으면 공산당이라는 소리가 괜히 나온 얘기는 아니다. 그런데 이범연은 진지한 성찰을 담아내고 있다. 비판적 방법도 중요하지만 성찰적 방법이 가진 위력이 있다.

    정리해고는 정신적 피폭이었다

    1997년 기아차 부도와 외환위기를 거친 후 1998년 정리해고제 도입과 함께 몰아닥친 현대차 정리해고 현장, 만도 공권력 투입, 대우차 정리해고, 그리고 2009년 쌍용차에서 77일 점거농성, 2010년 경기지역 부품사 정리해고를 경험했다.

    혹독한 쌍차 투쟁이 끝나고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에 시달리며 몇 사람 죽었을 때, 치유를 위해 달려온 정혜신 박사는 “피폭상태”와 비유했다. 산 자와 죽은 자로 갈라지고 군사작전처럼 진압하던 폭력에 노출된 노동자는 원자폭탄 방사능에 피폭당한 것처럼, 정신적 피폭상태를 경험한다고 했다. 그처럼 상황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단어를 들은 적이 없다.

    2001년 대우차는 2009년 쌍용차보다 덜해 보였지만 미리 보여준 쌍용차였다. 단 한 장면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범연이 쓴 그대로, 처음 정리해고 통지서를 받는 조합원 집 문이 열리는 순간에서부터 혹독하게 이어진 공권력투입, 화염병 날리던 순간들, 그리고 마지막 교섭과 그 이후 긴 후유증 등…

    “모두 살려고 하면 다 죽는다”는 말이 공포처럼 밀려와 사람을 해고의 벼랑 밑으로 떨어뜨렸다. 생존 벼랑에 선 순간, 해고 공포를 경험한 순간, 오직 생존 욕망이 치솟아 오른다. 그래서 동료도 버릴 지경인데 어찌 비정규직을 챙기겠는가.

    피폭당한 이후 상처들 그대로

    정리해고라는 정신적 피폭을 받은 후, 이범연이 쓴 그대로 잔업특근 한 대가리라도 더 하려는 노동해방이 아닌 노동속박 욕망이 솟아났다. 같은 정규직이라고 해도 피폭당한 정신이 만들어낸 갈등과 상처는 그대로 남았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선거 때만 되면 딱히 이유를 알 수 없는 짜증과 서글픔의 감정에 사로잡혔다” 나도 그렇다. 민주노총 선거가 진행되는 지금도 그렇다. 정리해고로 산 자, 죽은 자로 갈라지는 아픔이 선거 때면 재현되는 듯 했다.

    그 혹한 시절을 겪었으니 뭉쳐도 부족할 텐데 늘 갈라진다. 민주주의라는 포장은 그냥 공식적이고 합법적으로 서로 갈라지는 경쟁 공간처럼 느껴질 뿐이다. “선거를 둘러싼 권력 경쟁이 모든 관심과 역량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역할을 한다”는 말에 1,000프로 공감한다. 우리는 민주주의 이상의 민주주의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이범연 선배는 아직도 정파에 후한 점수를 준다. 정파가 “활동가를 키워내는 본연의 역할에 집중한다면, 노동운동은 커다란 진전을 이루어 낼 수 있을 것이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는 권력의 힘을 쫓으면서 권력의 함정에 빠진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정파를 경계한다. 조합원은 피폭 후 이익종자가 되고, 활동가는 피폭 후 권력종자가 되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정파는 권력을 장악해 세상을 바꾸려는 집단이다. 그 본질에 ‘권력의 함정’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노조간부나 활동가를 키워내는 역할을 정파가 아닌 노조의 다른 시스템으로 해내야 희망이 있다고 믿는다.

    어떻게 비극의 공유지가 탄생할까

    “노동운동의 ‘공유지’를 넓히자”고 한다. 그렇다. 나는 공유가 중요하다 믿는다. 그런데 노동자 공유지가 되어야 할 노조가 상처 받는다. 이익종자가 된 조합원에 의해서, 권력종자가 된 정파에 의해서, 노조는 공유지가 아니라 이놈 저놈이 사유화함으로서 비극에 이르는 ‘공유지’가 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민주노조를 넘어 21세기에 필요한 전혀 다른 노조를 발견해야 한다고 믿는다.

    특히 이범연 선배가 아파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갈라진 관계를 보면서 이 문제를 결코 도덕성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외환위기 이후 ‘고용 빙하기’를 맞아 계급투쟁이 아닌 서로 일자리 다툼을 해온 ‘개급(犬級)투쟁’을 통해서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노조의 명백한 한계가 있을까?

    선배는 “노조의 명백한 한계”를 지적한다. 이 문제를 오랜 동안 생각했다. 그런데 한계는 노조에만 있는 게 아니다. 전위정당도 파멸적 한계를 드러내면서 20세기 사회주의가 망했다. 전위당이 되려고 했던 정파에도 한계가 있다. 진보정당도 한계가 있다. 이 세상에 한계 없는 인간은 없고 한계 없는 조직은 없다.

    노조의 명백한 한계를 지적하는 대목을 읽으며 ‘그럼 다음 결론은 뭐지?’ 내심 걱정했다. 고색창연한 80년대 계급운동 이론에 따르면 노조는 경제주의를 벗어날 수 없기에 전위정당이 필요하다고 했다. 노조는 경제주의를 벗어날 수 없기에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며 정치세력화를 외쳤지만 꽝이었다.

    다행히 선배는 노조 자체가 외부로 열려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자기 동일성을 확장하는 조직화 방식과 구별되는 ‘만남의 조직화’ 방식”을 말한다. “공감의 힘”을 말한다. 나도 오랜 동안 다른 조직화 방식, 그리고 그 출발로서 공감을 고민해 왔다. 피폭된 민주노조 조합원이 이익형 인간으로 나갈 때, 생존벼랑에서 추구하는 이익욕망은 강력하다. 혁명의지로 포장한 정파 권력의지가 권력형 인간을 정당화 할 때, 권력욕망은 아주 강렬하다.

    그렇다면 ‘공감’은 이익욕망과 권력욕망보다 더 강렬할 수 있는가? 세월호 아픔에 대한 공감처럼, 탄핵촛불운동에서 확인한 공감처럼, 간헐적으로만 확인할 수 있는가? 아니다. 내가 노동현장에서 실천해 오면서 느낀 것은 그 이상 힘이 있다. 나는 공감의 힘을 좀 더 정교하게 다듬어 정리하고 싶다.

    비급은 없다. 다만 고민이 생생하다

    다행히 선배는 노조 한계를 초월적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중 한계를 지적한 운동권은 전위 필요성을 주장하며 전위를 자처했다. 노조 한계를 지적한 정파는 정치 우선성을 주장하면서 노조를 정당정치 도구로 만들어 왔다.

    “ 활동가(=전위)와 대중을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 방식”을 지적한다. 그렇다. 바로 이 대목에서 나는 완전히 선배와 바로 어제 얘기를 나누고 온 듯한 착각을 느낀다. 전위와 그 아류인 활동가는 자본주의 본질적 한계에 사로잡혔다며 경제주의에 갇힌 노조 한계를 설정한다. 그것을 초월하는 조직을 생각한다. 대중 한계를 설정하고 그들을 초월한 목적의식적 전위가 되어 자생적인 대중을 계몽해 왔다.

    우리에겐 새로운 사고방식이 절실하다. 선배는 동일성을 확장하는 조직화 방식이 아닌 ‘만남조직화 방식’ 연장선에서 “플랫폼”으로서 노조와 “네트워크”로서 노조를 말한다.

    딱, 정확히 바로 이런 지점에서 나는 선배와 일체감을 느낀다. 권리 플렛폼으로서 노조, 무권리 노동자가 노동권 주인이 되기 위해 언제나 접속하면서 풍부한 방법을 퍼갈 수 있는 플랫폼으로서 노조가 21세기 대안노조라고 생각한다. 유비쿼터스, 와이파이가 잘 뜨기를 바라는 접속 시대에 언제 어디서나 접속할 수 있는 네트워크로서 노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책엔 비급이 없다. 다만 이범연이라는 위장취업자, 배부른 대기업 노조 조합원이라 불리지만 비정규직과 소통하고 공감하고, 정규직 노조의 한계를 넘어서 열린 노조를 생각하는 생생한 삶과 고민이 있을 뿐이다.

    “이범연 선배, 언제 쏘주 한잔 찐하게 사쇼!”

    필자소개
    민주노총 금속노조 경기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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