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은 '사회주의' 사회다
    [G2의 성격③] '시장'과 '계획' 그리고 중국의 사회성격
        2017년 12월 20일 02:19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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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필자의 [중국매체로 중국읽기] 번역 글과 별개로 중국 사회에 대한 본인의 의견과 분석을 칼럼 형식으로 게재하는 글의 하나이다. 관련 칼럼 글은 링크 글로 연결되어 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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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글(링크)에 이어서 중국의 사회성격에 관한 논의를 계속하도록 한다. 중국은 1978년 제11기 제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개혁개방노선을 채택한 이래 일련의 변화과정을 겪어왔다. 사회주의상품경제 개혁(1978~1991년), 사회주의시장경제의 확립을 위한 개혁(1992~2005년), 경제성장방식의 전환과 산업구조 고도화를 위한 개혁(2006년~현재) 이상 3차례의 변화가 그것이다.

    여기선 중국이 제창하는 ‘사회주의시장경제’와 관련된 주요 쟁점을 살펴봄을 통해, 현 시기 중국의 사회성격에 대한 이해를 돕는 데에 역점을 두도록 한다. 중국의 ‘사회주의시장경제’ 이론은 사회주의 본질론, 사회주의 초급단계론, 개혁개방이론, 사회주의 시장체제론, 사회주의 상부구조 건설이론 등 일련의 완성된 자기체계를 갖고 있다. 지면관계상 그중 현재 국내에서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시장경제’와 ‘계획경제’ 그리고 ‘사회주의’ 삼자관계에만 초점을 맞추도록 한다.

    우리가 중국 사회주의를 이해하는 데 부딪치게 되는 가장 곤란한 문제 중의 하나가 바로 중국이 현재 시도하고 있는 시장경제와 사회주의의 결합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에 있어 핵심은 한 사회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있어서 필히 그 상위개념인 ‘사회 기본제도’와 하위개념인 ‘경제조절수단’을 구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소위 계획경제와 시장경제는 단지 사회의 자원 배치를 실행하기 위한 서로 다른 두 가지 수단에 불과하며, 모두 사회의 본질적 성격규정과는 무관한 그 하위개념에 속한다. 사회 성격은 상위개념, 즉 생산관계의 핵심인 ‘소유제’와 ‘국가의 계급적 성격’과 같은 ‘기본제도’를 통해 규정되며, 거꾸로 시장이냐 계획이냐의 하위개념을 통해 규정되지 않는다.

    사회주의라 할지라도 국유기업들이 시장주체로 참여하여 자신들이 생산을 결정하고 그 결과에 책임을 지는 시장경제는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 반대로 과거 히틀러나 일본군국주의 그리고 두 차례 세계대전 기간 중 서구 국가들에 광범위하게 출현했던 전시경제처럼, 자본주의경제에서도 필요하다면 국가가 민간기업을 대신해서 전체 생산과 유통 과정을 직접 통제하는 계획경제를 취할 수도 있다. 비록 계획경제라고 까진 할 순 없지만, 박정희 개발독재정권 하에서 한국경제는 국가가 수립한 계획이 경제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경제개발과정을 경험한 적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사회성격 규정에는 아무런 본질적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미국의 비교제도경제학자 뉴버거(E.Neuberger)는 자신이 설계한 ‘DIM이론’을 통해 몇 가지 계획경제와 시장경제를 구분하는 기준을 제시하였는데 우리가 참고할 만하다. 즉 의사결정(Dcision)구조, 정보구조(Informaition), 동기구조(Motive)의 상호 비교에 의한 구분법인데, 이러한 DIM이론은 의사결정권이 경제시스템의 참여자간에 어떻게 배분되는지, 그들 간의 정보교환과 유통 및 갈등조정 방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참여자들 행위에 대한 동기부여 방식이 무엇인지를 중요시한다.

    이러한 기준에 따라 계획경제와 시장경제에 대해 개념 규정을 하면 다음과 같다. 계획경제는 한 사회의 자원배치 방식과 관련하여 단일한 중앙집권적 의사결정 주체가, 행정명령을 통해 경제단위 간의 갈등을 조정하며, 정신적 자극에 의한 동기 부여를 중시하는 경제체제이다. 이에 비해 시장경제 한 사회의 자원배치 방식과 관련하여 분산된 의사결정 주체가, 시장경쟁을 통해 경제단위 간의 갈등을 조정하며, 물질적 자극에 의한 동기 부여를 중시하는 경제체제이다.

    이 같은 분류법의 핵심은 시장경제냐 계획경제냐를 자본주의나 사회주의에 직접 동일시하지 않고, 그 대신 그 나라 경제가 실제로 작동하는 구체적 형태와 원리를 중시한다는 점에 있다. 이 같은 관점은 이미 현대 서구경제학의 한 영역으로 자리 잡고 있는 ‘비교제도경제학’에 있어 대체로 공인되고 있는 바이다.

    이렇게 볼 때 중국의 사회주의 성격은 우선 소유관계로부터 확인될 수 있다. 그것은 전 인민적소유제를 대표하는 국유기업이 중국의 시장경제를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쉽게 확인된다. (아래표 참조)

    2017년 중국의 20대 기업순위

    위 표는 최근 2017년 발표된 중국 내 국유기업과 민영기업을 모두 포함한 기업순위이다. 통계자료는 <포춘지>가 발표한 ‘중국 500대 기업’과 중국 <전국공상연합>이 발표한 ‘500대 민영기업’에서 필자가 뽑았다. 포춘지 발표는 중국의 국내외 주식시장에 상장된 회사 자료를 이용했기 때문에 이윤이 나와 있는데, 후자는 그냥 매출액만 표시되어 있다. 하지만 기업 순위에 있어선 일반적으로 그 덩치를 나타내는 ‘매출액’ 기준을 우선시하므로 크게 문제되지는 않을 것 같다.

    위 표를 보면 우선 상위 10위까지 민영기업이 하나도 없는 것이 눈에 띤다. 12위에 이르러 ‘화웨이’그룹이 하나 들어간 것을 볼 수 있으며, 상위 20위까지의 기업 중 국유기업이 대부분이고 민영기업은 모두 4개가 포함되어 있다. 지면 관계상 모두 나열하지는 않았지만, 참고로 50위까지의 순위를 소개하자면 민영기업은 모두 13개로,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6% 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는 모두 국유기업인데,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명제 하나를 도출할 수 있다. 즉 중국이 시장경제를 채택하고 있지만 그 시장경제는 ‘국유기업이 주도하는’ 시장경제라는 사실이다. 이 점이야 말로 세계 어떤 다른 자본주의 국가와도 다른 중국만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중국의 시장경제를 일반적인 시장경제가 아닌 ‘사회주의시장경제’라고 부른다.

    국가가 최대주주인 공유기업의 수익을 공공부문의 재원으로 활용

    ‘국유기업이 주도하는 시장경제’라는 용어는 사실 필자가 만들어낸 말이다. 중국적 시장경제를 간략하게 짚어 낼 수 있는 말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생각해낸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필자는 이 용어가 매우 간결하면서도 중국 경제와 사회성격을 잘 드러내 준다고 생각한다. 옛날엔 시장경제 하면 사람들은 당연히 사기업이 주도하는 것인 줄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중국은 처음으로 ‘국유기업이 주도하는 시장경제’라는 새로운 사물을 지구상에 창출해냈다. 이제부터는 ‘국유화’ 하면 ‘계획경제’를 연상하는 등식(=)이 수정되어야 한다.

    또 국유기업 하면 보통 효율성이 떨어지고 적자기업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은데, 중국은 이 같은 상식도 뒤엎어 버린다. 예컨대 위의 표를 볼 경우, 중국공상은행은 지난해(2016년) 한국 돈으로 환산하여 무려 47조원이나 벌어들였다. 이는 반도체부문의 사상 최대 호황으로 삼성전자가 올해 예상되는 40조원의 당기순이익을 훌쩍 초과하는 수치이다. 계속해서 보자면 중국이동통신은 18.5조원, 상해자동차도 5.4조원…… 이렇듯 돈 잘 버는 국유기업들이 중국에는 수두룩하다.

    중국공상은행 베이징 본사 모습

    이렇게 볼 때 자본주의국가에서 국유기업에 적자가 많은 것은, 아마도 그들이 대개 공공성이 강한 영역, 예컨대 철도나 전기·수도·가스·항만 등에 집중 포진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원래 그런 부문은 사회적 이익을 우선시하므로 이윤을 많이 남기기는 어렵다. 그런 게 아니라면 국유기업도 시장경제에서 충분히 경쟁력을 갖추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사실을 중국이 잘 보여주고 있다.

    위의 표는 다른 한편 사회주의가 현실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어떤 추상적인 어려운 용어를 빌리지 않고서도 쉽게 가르쳐준다. 잘 나가는 국유기업들을 통해 벌어들인 돈을 결국 전체 인민을 위해 쓰는 것이 바로 현실의 사회주의이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계급차별을 없애고, 마지막에는 ‘시장경제’까지 극복한 후 완전한 ‘자유의 왕국’인 공산주의를 실현하는 것이 사회주의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한국 상황과 비교할 경우 이 말의 의미는 더욱 분명해진다. 한국의 가장 알짜배기 기업인 삼성전자는 얼마 전 이윤의 절반을 주주에게 배당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럴 경우 금년도 예상되는 40조원의 순이익 중 그 절반인 20조 원 정도가 배당되는데, 그중 절반인 10조 원은 우선 외국인들 몫으로 떨어지게 된다.(현재 삼성전자에 대한 외국인 지분비중은 53.4%이다) 그리고 나머지도 대부분 이건희·이재용 일가와 몇몇 대주주들의 몫이 된다. 이렇듯 배당이 이루어지고 나면 사실 우리 일반 대중들에게는 돌아오는 몫이 별반 없게 된다.

    하지만 중국의 경우는 이와는 다르다. 위에서 말한 돈 잘 버는 국유기업들이 벌어들인 이윤은 상당부분이 그 최대주주인 국가의 손을 들어가게 되며, 이는 최종적으로 국민복지와 공공건설을 위한 재정자금으로 쓰여 진다. 이러한 이윤분배 방식은 시장경제의 논리로 볼 때도 전혀 무리가 없다. 왜냐하면 소유권을 존중하는 원칙을 지켰기 때문이다.

    얘기가 여기까지 이르면 케인스주의에 대해 잠깐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의 사회주의시장경제는 서구에서 케인스주의가 부딪쳤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열쇠를 찾아냈다고 할 수 있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우선 사회복지를 중심으로 하는 공공부문의 확대가 이미 현대사회에 있어 거스를 수 없는 추세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과학·환경·위생·교육·주택 등에 대한 국가의 투자는 이미 현대 시장경제가 존립하기 위한 필수조건이 되었다. 이렇듯 자연스레 확대일로에 있는 공공부문의 재원을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는 현대 시장경제가 안고 있는 가장 큰 숙제라고 할 수 있다.

    케인스주의가 종국에 가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 같은 공공부문의 재원을 전적으로 자본주의적 사적소유에 의존하여 조달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공부문 재원에 대한 그 같은 사적소유에의 지나친 의존은 불가피하게 자본주의적 소유관계와의 심각한 충돌을 낳는다. 이 때문에 점점 높아지는 세율은 ‘세수초과부담’ 문제를 야기하게 되며, 그것은 부유층의 세수저항이나 투자기피, 혹은 자본의 해외도피와 같은 형식으로 표출되게 된다. 결국 복지국가를 추구하였던 서구 선진국은 모두 만성적인 재정적자에 시달리다가 신자유주의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 같은 서구의 실패경험과 대조적으로, 국유기업과 같은 공유제 기업을 토대로 할 경우 복지재원 마련이 충분히 가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중국은 보여주고 있다. 중국의 ‘국유기업이 주도하는 시장경제는’ 이처럼 서구사회가 부딪친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한다는 측면에서도 그 역사적 의의가 크다고 보여 진다.

    상부구조로서의 중국의 국가성격

    이제 상부구조인 중국의 국가성격 문제에 관해 논의해 보도록 하자. 지난 호에서 이와 관련한 중국의 헌법 조항을 잠깐 소개한 바가 있다. 중국은 자신의 헌법에서 ‘노농동맹’을 기초로 한 사회주의 국가로서의 ‘계급적’ 성격을 명확히 하고 있으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전국인민대표자회의’를 정점으로 하면서 그 밑에 행정부와 사법부를 설치하는 일원적인 정치구조를 갖고 있다. 이는 서구의 삼권분립체계와는 다른 점인데, 인민의 단일의지는 분리될 수 없다는 루소의 ‘인민주권’ 사상에 보다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과학적 사회주의’를 상징하는 맑스레닌주의를 자신의 지도이념으로 삼는 중국공산당이 존재하며, 이 중국공산당의 집권당으로서의 지위는 헌법상으로 보장된다. 혹자는 이 같은 중국공산당의 영구적 집권 제도를 비난하지만, 그러나 현실에서 인류역사가 증명하는 바는 공산당의 집권과 사회주의는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공산당이 집권하지 않는 사회주의는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으며, 일단 공산당이 집권당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는 순간 그 나라는 예외 없이 자본주의국가로 탈바꿈하였다. 이는 양자를 대립해서 보는 시각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는데, 사실상 사회주의와 공산당은 동전의 양면 관계라 할 수 있다. 공산당과 인민대중과의 관계 역시 대립시키기 보다는 ‘물과 물고기’의 관계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릴 것이다. 양자를 대립시켜 보는 것은 단지 자본주의적 다당제와 의회제적 정치현실에 익숙해진 사람들의 시각일 뿐이라고 여겨진다.

    중국이 이렇듯 스스로 사회주의를 대내외적으로 천명하고 정치제도상으로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인정치 않으려는 사람들이 주변에는 적지 않게 있다. 필자는 이들의 사고방식을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데, 이들의 눈에는 마치 앞서 설명한 모든 것들이 중국 인민을 기만하고 중국공산당의 일당독재를 정당화하기 위한 정치적 술수 정도로만 보이는 것 같다. (이들에게는 중국공산당 자체가 사실상 위장한 자본가계급의 정당일 뿐이다!)

    이 같은 시각은 ‘국가’가 무엇인지, 국가의 본질에 대해 전혀 무지한 소치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알다시피 국가는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통치하기 위한 수단인데, 제도화된 폭력을 그 핵심 요체로 삼는다. 하지만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와 ‘법률’은 이 같은 제도화된 폭력을 뒷받침하는데 있어서 빠질 수 없는 요소이다. 여기서 중국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부정하는 이들의 논리를 쫒아가노라면 필연적으로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이 경우 본질상 자본주의계급의 국가가 ‘사회주의로 위장’하기 위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본질상 대립되는 맑스레닌주의를 지도이념으로 삼음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계급적 성격을 부정하는 ‘해괴한’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도저히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도대체 그런 방식을 통해서 그 국가가 실제 무엇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대중들에게 ‘사회주의적 기만과 환상’을 불어넣어 주는 것만으로 지배세력은 과연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을까? 필자의 생각엔 이렇듯 맑스레닌주의를 자발적으로 대중에게 전파시킴을 통해서 기만적인 자본가계급의 국가는 (만약 중국이 사회주의로 위장한 자본가계급의 국가라면) 대중을 혁명화 시키게 되고, 그로부터 먼저 스스로 전복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주지하다시피 맑스레닌주의 이론과 사상은 본질적으로 ‘혁명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1980년대 한국의 서슬 퍼런 군부독재정권은 이들 서적의 반입을 금지하고 그 전파를 필사적으로 막으려 하지 않았던가?

    필자가 중국 유학 기간 중에 목격한 바로는 중국은 이들 맑스레닌주의 원전을 매우 중시한다. 최근 들어서도 이들 원전에 대한 대대적인 출판과 재출판 작업을 끊임없이 추진하고 있는데, 예컨대, 일상 업무에 바쁜 간부 및 일반 당원들이 방대한 이들 저작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끔, 인민출판사는 오늘날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중요한 저작들만을 따로 추려 ‘선집’, ‘문집’ 등의 다양한 형식의 출간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이점은 이들 서적들이 이미 낡은 것으로 치부되어 별로 인기가 없는 한국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더구나 시진핑 지도부가 들어선 이후 이 같은 원전에 대한 강조는 더욱 강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당 지도부는 스스로 정례적인 ‘집단학습’을 통해 솔선수범을 보이면서 (물론 이 경우 꼭 원전학습에 국한 된 것은 아니다) 일반 당원들에게 전반적인 학습열풍을 고취시키고 있다. 날로 맑스레닌주의를 부정하는 풍조가 팽배한 한국의 활동가들이, 그것을 더욱 흥성시키고 있는 중국을 ‘천민자본주의’라고 하면서 그 사회주의적 성격을 부정하고 있는 현상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다시 본 주제로 돌아와서 계획과 시장에 대해 조금 더 언급하도록 하자. 계획과 시장은 두 개의 서로 다른 경제조절기제로서 각각 장점과 부족한 점이 있기 때문에, 현대경제에 있어선 양자가 상호 보완되어 사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간 중국과 베트남 등 현실 사회주의국가들의 실천은 사회주의와 시장경제가 잘 결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증명하고도 남는다.

    이들의 경험은 사회주의가 시장경제와 결합함으로써 기존의 경직된 관료적 계획경제를 개혁할 수 있음을 증명할 뿐만 아니라, 한발 더 나아가 국유기업과 같은 공유제에 기반한 시장경제는 그 효과 면에서 볼 때 단순히 사적소유에 기반 한 자본주의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사실 또한 보여준다. 이 점은 그간 이들 국가들이 별다른 큰 기복 없이 근 30-40년간의 장기적인 고속성장을 지속해오고 있는 점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그것은 주기적인 공황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국가에서는 거의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한 사회에 있어 주기적 공황이 존재하는지 여부는 그 사회가 자본주의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중요한 지표 중 하나이다.

    자본주의는 역사적으로 1825년 영국에서 최초로 경제공황이 발생한 이래 제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세계적 규모의 공황만 하더라도 1847년, 1857년, 1866년, 1873년, 1882년, 1890년, 1900년, 1907년, 1920년, 1929년, 1937년 모두 11차례 발생하였다. 이들은 거의 10년 주기를 갖고 출현하였는데, 국가독점자본주의가 보편적으로 성립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비록 경제공황의 형식은 달라졌지만 자본주의는 모두 6차례의 국제적인 경제위기를 경험하였다. 1957~1958년, 1969~1970년, 1973~1975년, 1980~1982년, 1997~1998년, 그리고 최근의 2008년 금융위기가 그것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시장경제를 수행하는 국가들은 ‘공황’ 내지 경제위기 국면을 별반 찾아볼 수가 없다. 중국은 그간 개혁개방을 수행하는 기간 동안 비교적 고르면서도 높은 경제성장률을 보여주었는데, 그중 예외적인 기간이 딱 한번 있었다. 그것은 1989년 천안문 사태를 전후한 기간에 발생하였는데, 당시 미국과 다른 서구 국가들의 대 중국 경제봉쇄와 관련이 있었다. 이 조치는 당시 중국경제의 고도성장에 일시적 제동을 거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그 효과는 잠시뿐이었다. 1989년과 1990년 중국의 경제성장률은 각각 4.2%와 3.9%로 1980년대 들어선 이후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1991년 중국 GDP성장률은 9.3%를 기록함으로써 다시 고도성장 추세를 회복하였다. 그 후 2008년 세계적인 경제위기가 발생하기 직전까지 중국은 30년 동안 평균 9.8%의 기록적인 경제성장률을 보여주었다.

    특히 2008년 하반기 이래의 세계적인 경제위기에서도 중국과 사회주의시장경제를 채택한 국가들이 보여주고 있는 안정적인 경제운영의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다. 이는 생산의 사회화가 이미 고도한 단계에 들어선 오늘날, 시장은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상식과는 달리 자본주의보다는 오히려 사회주의와 더 잘 결합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몇 차례 연재를 통해 살펴보았듯이, 중국은 국제정세에 있어 매우 관건적 위치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이중적 신분을 지니고 있는데, 한편으론 브릭스의 주도적 성원으로서 개발도상국 전반의 집단적 발전을 이끌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론 중국은 과거 계획경제의 실패를 딛고 일어선 사회주의의 새로운 부흥을 상징한다. 그 때문에 지구화 시대의 유일 패권국가를 지향하는 미국과 그 서구 동맹국들은 당연히 중국에 대한 포위망의 강화와 억제정책을 최우선의 국책으로 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필자소개
    북경대 맑스주의학원 법학박사 , 노동교육가, 현재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정책자문위원, 맑스코뮤날레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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