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늙은 노동자의 짧은 자소서
    "위장 취업자에서 늙은 노동자로, 어언 30년" ①
        2017년 12월 05일 02:2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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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GM 도장부 생활 30년, 노동자 이범연이 펴낸 새 책 『위장 취업자에서 늙은 노동자로 어언 30년』(도서출판 레디앙)은 자서전도 회고록도 아니다. 짧은 자기소개와 되돌아본 자기 삶의 궤적도 담겨 있지만 부제(‘내부자’ 눈으로 본 대기업 정규직 노조 & 노동자)가 말해 주는 것처럼 ‘지금-여기의 노동운동’이 책을 꿰뚫는 문제의식이다.

    과거에는 꿈에도 생각 못했을 비리가 터져 나오는 권력화된 노동조합, 집값이 오를 것을 기대하면서 박근혜를 찍는 조합원들, 노동운동과 우리 사회의 장기적 발전 전망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드는 정파들의 권력 투쟁 등 지금 당장의 대기업 노조 현실 진단과 대안을 모색한 책이다.

    ‘배제된 노동’과 정규직 노동운동과 만나는 방법을 고민하고, 현실 속에서 실천이 가능한 수준의 방안을 제안한다. ‘만남의 조직학’이라는 흥미로운 조직론과 함께, 고액 연봉을 받고 철야가 없어졌는데도 행복하지 않은 대기업 정규직의 현실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레디앙에서는 이범연 씨의 신간 내용 중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함께 공유할 만한 내용을 저자와 출판사 측의 동의를 얻어 발췌해서 몇 차례 연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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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줍음 많던 아이, 노동자가 되다

    나는 1962년생 범띠다. 내 띠동갑, 두 바퀴 띠동갑 젊은 동생들과 한국GM 부평공장에서 생산라인을 타고 있다. 89년에 입사해서 30년 가까이 이 공장에서 잔뼈가 굵었다. 20대 들어와서 50줄을 넘어섰다. 정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얼마 전 한국GM 노동조합 상근 간부로 있을 때 한 젊은 후배 노조 간부에게 1987년 노동자 투쟁을 설명한 적이 있었다. 6월 항쟁의 기폭제 역할을 한 박종철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는 박종철을 몰랐다. 주변에서는 어떻게 박종철을 모를 수 있느냐며 놀라기도, 놀리기도 했지만 나는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내겐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경험이지만 후배에게는 30년 전의 ‘역사적 사실’이다. 부모님 세대에게 한국전쟁은 너무나 생생한 경험이지만 나에게는 안 가르쳐주면 모를 역사적 사실인 것과 마찬가지다. 이 젊은 후배와의 대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느꼈다. 50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는 내가 살아온 시간 동안 겪었던 사건들 하나하나가 이제 역사가 되었다는 사실 말이다. 이 나이가 되도록 뭘 했나 하는 회한을 느끼다가도 가만히 돌이켜보면 내 삶이 많은 사건과 당대 역사에 작지만 궤적을 남기며 그 세월을 지내왔다는 것을 깨우친다.

    사람들을 만나면 수줍어하고 말이 별로 없던 한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 고2 때 박정희가 죽었다. 그때 그 아이 반의 반장은 하루 종일 책상에 엎드려 울었다. 그 아이는 불안하면서도 야릇한 흥분 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방학 때 한강다리에서 총싸움이 있었다는 이야기며, 전두환이 실세라는 이야기를 소식이 빠른 친구에게 듣곤 했다. 아마도 그 친구는 대학생 형이 있었던지 했겠지. 고등학교 3학년 봄에 ‘광주사태’, ‘폭도’, ‘간첩’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가 붙은 신문 머리기사 제목을 보고 광주항쟁을 처음 알게 됐다. 그리고 계엄령이 떨어지고 자유롭게 기르던 머리는 선생님들의 바리깡질에 무참히 밀려 나가고, 누가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느니, 문신이나 목걸이를 하면 군인들이 끌고 간다느니 하는 이야기들이 떠돌았다.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그 아이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들어갔다. 입학 후 처음에는 들뜬 마음에 미팅도 나가고 이리저리 어울려 술도 마셨다. 하지만 당시 대학은 감시와 처벌의 감옥처럼 숨 막히는 곳이었다. 경찰은 수시로 가방을 뒤지고, 학교 안에는 가발 쓴 사복경찰들이 곳곳에 깔려 있었다. 학교 선배들이 시위 주동을 하다가 잡혀가고, 도서관에서 투신하는 모습을 보면서, 대학생이 된 그 아이는 하루하루 분노를 키워 갔고, 독재정권을 끝장내는 데 모든 것을 걸겠다고 다짐하면서 운동권 학생이 됐다. 연극반 활동도 하고, 비합법 서클에도 가입하고, 사회비판적인 서적으로 세미나도 하고, 집회 시위에도 적극 참여했다. 그리고 강제 징집돼 군대도 끌려갔다.

    제대 후 복학은 했지만 마음은 딴 데 가 있었다. 당시 학생운동권은 노동자들이 세상을 바꾸는 주체가 돼야 하고, 의식화된 학생운동 활동가들은 혁명의 주체인 노동자들이 있는 공장으로 들어가 노동자들을 일깨우고 조직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이를 위해서 학생에서 노동자로 소위 ‘존재 이전’ 하는 것이 운동의 정도처럼 되어 있었다. 교회에서 노동자 야학을 하던 그 아이는 어느 시점에선가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으로 들어갈 결심을 하게 된다. 그때가 1986년. 워낙 신원조회가 심해서 큰 공장에는 들어갈 엄두도 못 내고 독산동, 안양 공단의 ‘마찌꼬바’(작은 공장)를 전전했다. 그러다가 87년 6월 시민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을 맞는다. 그 아이는 노동자가 된 것이다.

    몰래 올린 결혼식

    나는 87년 6월 서울 거리에서 연일 시위에 참여하고 파업하는 공장에 열심히 지원 투쟁을 다니기는 했지만 87년 7~9월 노동자 투쟁이 봇물처럼 터져 나올 때는 공장에 없었다. 그리고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씁쓸하게 바라보면서 문래동 마찌꼬바에 들어갔다. 선반과 밀링을 배우면서 일당 4,000원짜리 견습공이 됐다. 노동자로 살아가려면 기술 하나 정도는 배워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나에게 기술을 가르쳐 주던 형은 일당 1만 원 이상을 받았는데 중학교 졸업 후부터 이 바닥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 나는 대우자동차에 취업하게 됐다. 그동안 노동자 몇 십 명 정도 일하는 작은 공장밖에 경험하지 못한 나에게 대공장인 대우자동차에 들어가는 것은 간절한 꿈이었다. 여러 명이 함께 준비해서 88년도 하반기 대우자동차 직업훈련원에 지원했는데 나만 합격했다. 경쟁률이 6:1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때의 운이 내 인생의 경로를 정해 준 셈이다. 합격 소식을 듣고 기쁘면서도 두렵고 겁도 났다. ‘이제 돌이킬 수 없이 노동자로서의 삶을 살게 되겠구나’ 하는 예감이, 아니 그 사실이 너무나 무겁게 다가왔다.

    6개월의 직업훈련 과정을 마치고 89년 3월에 대우자동차 도장부에 입사했다. 그때 나이 스물일곱. 하지만 주변 동료들에 비해 적은 나이는 아니었다. 대우자동차는 86년, 87년 월드카 르망 공장을 지으면서 20대 초중반의 젊은 노동자들을 대거 뽑았다. 내가 입사했을 때 공장에는 20대 중반에서 후반에 이르는 젊은 노동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때의 새파란 청년들이 지금은 고스란히 50대 중후반이 되어 정년 후에 무엇을 할 건지 서로에게 묻고 있다.

    대열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필자. 91년 투쟁 당시의 사진

    가끔 공장에서 뜨겁게 보낸 청년 노동자 시절 사진을 본다. 위 사진을 볼 때마다 나도, 동료들도 참 젊었었구나 하면서 감회에 젖곤 한다. 그때만 해도 공장 내 동료들 간의 관계는 정말 끈끈했다. 주야 맞교대 노동에 힘들어 하긴 했지만, 거의 매일 술과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틈나는 대로 여기저기 많이도 놀러 다녔다.

    그 즈음 나는 인천 지역 해고 노동자였던 아내와 만났다. 자취방이 가까워서 일이 끝나면 아내 집에 놀러가 밥을 얻어먹곤 했다. 그리고 학생 신분이 드러나면 안 되기 때문에 직장 동료들에게는 알리지도 못하고 몰래 결혼식을 올렸다. 직장 동료들에게는 결혼식은 안올리고 동거한다고 둘러쳤다. 그 당시에는 흔히 있던 일이었다. 당시 공장 안은 대결과 투쟁의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툭하면 공장 라인은 끊어지고, 문제가 터질 때마다 공청회가 열렸고 회사 임원과 관리자들은 공청회에 끌려 나와 홍역을 치르곤 했다.

    1989년, 노태우 정권이 공안정국을 조성하고 노동자를 향해 전쟁을 선포한다. 특히 민주노조가 들어선 대공장 노동조합을 무자비하게 공격하기 시작했다. 대우자동차에서도 위원장을 비롯해서 노동조합 집행 간부와 대의원, 그리고 많은 활동가들이 구속되고 해고됐다. 이러한 정권과 자본의 탄압에 맞서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은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경찰 병력이 투입돼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연행되면서 투쟁은 패배로 끝났다. 노동조합이 무너지면서 조합원들의 당당함과 패기도 함께 무너졌다. 분노와 투쟁 분위기로 가득 찼던 공장은 불안감으로 위축된 아주 딴판의 공간이 돼 있었다.

    노동조합이 무력화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보궐선거가 치러져 새로운 노동조합 집행부가 구성됐고 나는 조직실장을 맡았다. 하지만 몇 개월 되지 않아서 구속됐다. 소위 ‘위장 취업’이 구속 사유였다. 대우자동차 입사 때 대학 다닌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와 주민등록증 초본 등을 고쳤는데, 이에 대해 공문서 및 사문서 위조라는 죄목을 걸었다. 나와 또 다른 서울대 출신 3명이 함께 구속됐다. 그때가 대략 1992년 5월경이다. 경찰은 뭔가 조직 사건을 만들려고 했던 것 같다. 한 지역 신문이 이 사건 관련 기사에서 ‘사노맹인 듯’이라고 썼다. 경찰의 보도 자료를 그대로 베꼈다. 그 신문에는 대우자동차 직업훈련원 동기 친목 모임을 마치 비밀 조직인 것처럼 보도했고, 나의 직업훈련원 동기들은 모두 회사 관리자들에게 불려가 심문을 당하는 곤욕을 치렀다. 구속될 당시 아내는 첫째 아이를 임신해 만삭이었다. 내가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있는 중에 아내는 출산했고, 아내의 후배가 경찰서로 찾아와 출산 사실을 나에게 알려왔다.

    “형부, 딸이래요.”

    그리고 회사는 구치소로 해고통지서를 보내왔다.

    이때부터 기나긴 해고 노동자의 삶이 시작됐다. 구속된 지 6개월 만에 석방돼 ‘대우자동차 해고자 원직복직투쟁위원회’ 일원이 됐다. 30여 명의 해고자들이 있었다. 이때부터 97년 복직될 때까지 5년여 기간이 나에겐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던 것 같다. 그 중에서도 가장 힘든 건 당연히 생계 문제였다. 대우자동차 해고자들에게는 노동조합에서 생계비가 지급이 되었지만, 학생 출신 해고자들은 제외됐다. ‘학생 출신 해고자들은 뭔가 다른 목적으로 회사에 입사했다’는 불신과 경계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고 있던 일부 대의원들의 반대와 회사의 방해 공작 때문에 대의원대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이후에도 해고자들이 노동조합 투쟁의 성과로 하나둘 복직됐지만 학생 출신 해고자들은 항상 ‘추후 논의한다’는 문구만을 남긴 채 복직 대상에서 제외되곤 했다. 과외도 하고, 광고지도 붙이고 다니는 등 생계비를 벌면서 복직 투쟁도 하고, 현장 조직 사업도 해야 했다. 다시 현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은 점점 흐려지고 노동운동을 계속할 수 있을까, 회의가 주기적으로 몰려오곤 했다. 더구나 이 시기는 공장으로 들어갔던 소위 학생 출신 노동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와 그동안의 ‘잃어버린’ 시간을 벌충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때가 아닌가? 하지만 공장의 동료들, 그리고 씩씩하게 활동하면서 성장해 가는 젊은 후배 활동가들의 모습을 보면서 힘을 내곤 했다. 이 기간 동안 생계를 꾸리는 데 아내가 많은 고생을 했다. 아내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 고난의 기간을 이겨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형, 대학 나와서 왜 공장 일해요?”

    여기서 잠깐 대학교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자. 얼마 전 술자리에서 현장의 한 후배 노동자가 내게 물었다.

    “형은 서울대 나와서 왜 공장 일을 해요?”

    그 좋은 대학 나와서 왜 공장에 들어왔니, 목적이 뭐니, 부모님이 마음 아팠겠다, 등등.

    입사 후부터 정말 지겹도록 들어온 말이다. 나는 벌컥 화를 냈다.

    “야, 서울대는 졸업도 못하고 겨우 3년 다니고, 노동자로 30년이나 살았는데, 아직도 그놈의 서울대 타령을 듣고 살아야 하냐?”

    나는 공장의 동료들이 나를 서울대 출신이라는 것보다는 평범한 친한 동료 노동자로 바라보기를 원했고, 이를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해왔다. 아마도 30년 가까이 나와 함께한 동료들은 지금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서울대도 별 거 아니구만…….’ 그렇다. 정말 별 거 아니다. 물론 나는 한국GM 내에서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에서 서울대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는 안다. 학벌사회의 정점에 서 있는 특권화된 영역, 온갖 권력과 특혜를 누리고 사는 집단의 상당수가 서울대 출신이라는 것. 좀 더 평등한 사회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특권화된 서울대’ 문제를 반드시 극복해야 하는 과제 가운데 하나로 볼 것이다. 나는 서울대 폐지론자다.

    96년 노동조합 정기대의원 대회에서 나를 포함해서 3명의 학생 출신 해고자 생계비 지급이 결정됐다. 나는 이 순간이 복직 결정 때보다 더 기뻤던 것 같다. 이제 생계에 대한 걱정 없이 활동하고 복직 투쟁에 전념할 수 있게 됐다. 나는 생계를 위해 노동운동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아내에게 다시 시작하라고 권유했다. 나 때문에 아내가 하고자 했던 활동을 못하게 된 것이 너무 미안했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아내는 여성노동자회 활동을 꾸준히 했고, 지금은 한국여성노동자회 대표로 일하고 있다. 그리고 둘째가 태어났다. 이때는 첫째 때와는 달리 아내의 출산을 지켜보고 아내가 회복될 때까지 곁에서 함께할 수 있었다.

    97년 노동조합 단체협약 요구안에 3명의 학생 출신 해고자를 포함한 4명의 해고자 복직 요구가 포함됐다. 복직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4명의 해고자들은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지금은 단식 투쟁이 드물지 않아서 사람들에게 조금은 익숙하지만 당시만 해도 조합원들은 밥 몇 끼만 굶으면 죽는 것으로 생각하던 때였다.

    대략 22일 정도 단식농성을 하다 협상이 타결돼 단식을 풀었는데, 조합원들은 처음에는 몰래 밥을 먹는 게 아닌지 의심을 하다가 살이 빠지는 모습을 보고는 ‘정말로 하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농성 투쟁이 전행되면서 조합원들의 뜨거운 지지가 이어졌다. 중식 시간이면 각 부서별로 지지 방문을 오고, 지지 성금도 보내주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일은 한 젊은 조합원이 A4용지에 해고자들의 복직을 지지하는 글을 손으로 직접 쓰고 복사해서 식당에서 배포한 일이었다.

    복직을 요구하며 단식농성 중 가족들과 함께

    위 사진은 지금도 안방 잘 보이는 곳에 걸려 있다. 나는 사진을 볼 때마다 나를 복직시켜 준 조합원들의 애정 어린 관심과 투쟁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 빚을 갚는 심정으로 지금도 활동하고 있다. 해고자들을 가급적 늦게 현장으로 복귀시키기 위해서 회사는 대우 계열사에서 2년간 사무직으로 근무하고 현장으로 복귀하는 것을 노사 합의 사항으로 요구했다. 그래서 나는 당시 서울역 앞 대우빌딩에 있는 계열사에 2년 동안 양복을 입고 출퇴근했다.

    이때 IMF 사태가 터졌다. 나는 그해 겨울 출퇴근 때마다 서울역 지하도를 가득 메웠던 노숙자들과 마주쳤다. 수많은 노동자들에게는 가장 추운 겨울이었지만 나는 가장 따뜻한 봄날을 살고 있었다. 상당히 묘한 아이러니를 느꼈다.

    계열사 2년 근무를 마치고 1999년 공장으로 돌아왔다. 쫓겨난 지 7년 만의 현장 복귀다. 그런데 복귀한 현장은 대우그룹의 워크아웃으로 어수선했다. 곧이어 대우자동차의 해외 매각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2000년, 노동조합은 해외 매각 반대로 입장을 정리하고 투쟁을 전개했다. 파업도 하고 조립 사거리에 농성장이 꾸려졌다. 나도 개인 텐트를 짊어지고 농성에 합류했다. 이때 다시 해고됐다.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고 나는 분노보다는 짜증의 감정이 확 올라왔다.

    ‘7년 만에 복귀해서 이제 제대로 현장에 뿌리박은 노동운동을 시작하리라 굳게 마음을 다지고 있었는데 단 몇 개월 만에 다시 해고자가 되다니.’

    그리고 대우자동차 1,750명의 정리 해고가 이어졌고 노동조합은 정리 해고에 맞서서 공장 점거 농성을 했다. 대규모 공권력 투입이 이어졌다. 나는 이 과정에서 또 다시 구속됐다. 업무방해니 뭐니 하는 몇 가지 죄목이 붙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내가 구속되어 있던 학익동 인천구치소로 하루가 멀다 하고 공장 동료들과 연대투쟁에 함께 한 노동자, 학생들이 들어왔다. 대우자동차 정리 해고 투쟁으로 구속된 노동자, 학생 수는 공식적 집계로 118명에 이른다.

    다시 6개월여 수감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곳은 노동조합이 정리 해고자들과 함께 투쟁하고 있던 산곡동 성당이었다. 정리 해고자들과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투쟁하던 중 예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해외 매각 반대 투쟁 과정에서 해고됐던 나를 포함해서 몇 명의 징계 해고자들이 지방노동위원회에서 복직 판정을 받은 거다. 김대중 정부 들어서고 나서 노동위원회의 인적 구성이 바뀌면서 가능해진 일이었다. 이후 중앙노동위원회가 지방노동위원회의 복직 판정을 뒤집어서 나는 다시 해고자가 되었다. 아무튼 일시적이긴 하지만 갑자기 해고자 신분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나는 노동조합 정책실장이 돼 정리 해고자 복직 협상을 실무적으로 책임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집행부 임기가 끝나는 2002년 9월까지 근 1년간 한쪽에서는 정리 해고자들의 처절한 투쟁이, 또 한쪽에서는 피 말리는 복직 협상이 진행됐고, 나는 복직 합의, 복직 대상자 선정 과정에서 정리 해고자들의 절망과 분노, 원망을 집중적으로 받아내야 했다.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1년이었지만 어쨌든 정리 해고자 복직이라는 결과를 끌어냈기 때문에 지금도 후회는 없다. 집행부 임기는 끝났고, 무거운 짐을 벗어 던졌다.

    아직 나의 열정은 살아 있다

    2003년 초 지금 일하고 있는 도장부서로 복직했다. 해고되어 떠나야만 했던 바로 그 자리로 10년 만에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내가 돌아온 그 현장은 정리 해고라는 커다란 상처를 입고 극도로 위축되어 있었다. 조합원들은 회사 관리자들의 눈치를 보며 집회도 참석하려 하지 않아서 노동조합 집회는 항상 썰렁했고, 노동조합이 파업 지침을 내리더라도 일부만 빠져나올 뿐 생산 라인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잘만 돌아갔다.

    나는 무너져 버린 현장 조직력을 되살리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부지런히 사람들을 만나고 현장에서 열심히 실천했다. 정리 해고의 상처가 차츰 아물어 가고 현장의 조직력도 조금씩 되살아나고 노동조합의 활동력도 침체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시점부터 나의 가슴 속에서 대공장 정규직 노동운동에 대한 회의와 문제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뭔가 다른 활동 방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때 한국GM에 들어온 비정규직 활동가들을 만났다. 이들 중에는 대학 때 학생운동을 하고 이후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 비정규직으로 입사한 활동가들도 여럿 있었다. 대우자동차 시절부터 공장 안,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 활동에만 코 박고 살아온 나에게 이들과의 만남은 노동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고민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나는 주도적으로 정규직 활동가들을 모아서 ‘비정규직 연대 실천단’이라는 조직을 만들고, 비정규직 노동조합의 설립을 방해하는 회사에 맞서서 비정규직 활동가들과 함께 열심히 투쟁했다. 노동조합을 공장 안에 뿌리내리려는 시도는 실패하고, 다수의 비정규직 활동가들이 해고되어 거리로 쫓겨났지만 이들은 지속적으로 투쟁을 이어 갔고, 나는 이들 비정규직 노동자들과의 연대에 나름 최선을 다해 왔다.

    또한 공장 밖의 투쟁에도 열심히 연대하려고 애썼다. 희망버스를 타고 한진중공업으로 가고, 동료들과 함께 밀양에도 가고, 각종 집회에도 열심히 참가했다. 나의 활동과 삶에서 또 다른 분기점을 만든 것은 철학과 인문학 공부를 체계적으로 시작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매일 똑같은 동작을 반복해야 하는 단순 컨베이어 작업의 지루함을 이겨내기 위해서 뭔가를 생각하고, 또 뭔가를 메모하고, 일하면서 글 몇 자라도 읽으려고 애를 썼다. 어찌 보면 나는 지독한 활자 중독증 환자이고, 이 병이 나를 보다 깊이 있는 공부로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그 후에 아트앤스터디 같은 온라인 인문학 강좌, 다중지성의 정원, 수유너머 같은 배움의 공간에서 체계적인 공부를 계속했다.

    그 후에 두 번 노동조합 상임집행 간부로 활동했다. 한 번은 정책실장으로, 또 한 번은 지도고문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지금은 다시 내가 입사 때부터 일하던 도장부에서 열심히 컨베이어 라인을 타고 있다. 2003년 이전 10년간은 주로 해고 노동자로 불리며 해고와 구속과 복직을 반복하던 거리의 노동자로 활동했다면, 2003년 이후 지금까지는 커다란 풍파 없이 공장 노동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어느덧 정년을 몇 년 남기지 않은 늙은 노동자가 되었다.

    컨베이어 라인을 열심히 타면서 지금 느끼는 일상의 평온함이 과연 좋은 것인지, 이 과정에서 뭔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없는지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과거를 열심히 되짚고 있다. 그리고 이 나이에 내가 노동운동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공장에 처음 들어올 때의 젊은 열정과 의지를 꺼뜨리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열심히 고민하고 있다. 뭔가 크게 이룬 것도 없고, 지금 돌아보면 후회되는 일도 많은 삶이지만 나이 들어 추해지지 않고, 작은 불씨일망정 여전히 노동운동에 대한 열정이 살아 있는 것 같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앞으로도 여전히 그러기를…….(계속)

    필자소개
    노동자. 한국GM 도장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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