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랜만에 쑨 미음
    [밥하는 노동의 기록] '쌀'의 기억
        2017년 12월 04일 01:0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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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이 년 전에 쌀을 아주 많이 버린 적이 있다. 20Kg가 조금 넘는 양이었다. 그 쌀은 어머님으로부터 왔다. 손 큰 어머님답게 20Kg 두 포대를 팔아주셨다. 좋은 쌀이라고 몇 번이나 강조하신 것과 달리 쌀은 볼품없는 노란색 푸대에 담겨 왔는데, 그 덩치가 세 살이던 큰 애보다도 컸다.

    집에서 밥 먹는 일이라곤 한 달에 열 번도 안 되는 남편과 전업주부라 집에 있지만 돌봄노동에 내 밥 챙겨먹을 일이 드문 나와 20Kg 쌀 포대보다 작은 아이 둘이 40Kg의 쌀을 다 먹으려면 1년도 넘게 걸릴 것 같았다.

    베란다 한 켠에서 존재감을 뽐내던 쌀포대는 반 년도 되지 않아 쌀벌레를 뿜어내며 우리 집을 점령해버렸다. 두 포대 중 하나를 간신히 거의 먹었을 때였다. 이 집 저 집에 퍼주어서 그나마 그 정도였다.

    어렸을 때 가끔 온 식구가 마루 한 가운데 신문지를 깔고 그 위에 쌀을 넓게 펴놓고는 냉수 사발을 옆에 끼고 앉아 쌀벌레를 잡곤 했다. 꼬물꼬물한 그것들을 살짝 집어서 물속에 버렸다. 그러나 나는 천지분간이 어려운 나이의 아이가 둘이니 그럴 수도 없는데다 이미 쌀벌레는 날아다니고 있었다. 여는 순간 쌀벌레가 천 마리쯤 날아오를 것만 같아 아직 건드리지도 않은 온전한 20Kg 포대를 열어볼 용기가 도저히 생기지 않았다.

    좋은 쌀이라면 끝까지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최소한의 성의는 보여야 하는 것 아닌가 싶어 허술한 포장에 화가 났다. 화가 나는 것은 나는 것이고 일단 식량에서 삶을 위협하는 요소로 둔갑한 저 쌀 20Kg을 처리해야 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일단 저걸 연다면 한 번에 처리하고 싶었다. 벌레가 났지만 그래도 쌀이니 뒷산에다 뿌리면 되지 않을까 생각도 했다. 저 덩치 큰 물건을 이고 어느 뒷산에 올라 어드메쯤 뿌릴까 고민하다가 나는 왜 살인자들이 아는 장소에 시체를 버리는지 알게 되었다.

    이런 얘기를 친구들에게 하자 한 친구가 ‘그래도 쌀 버리는 거 아냐. 떡을 하면 되지’라고 말했다. 첫째로 저 쌀을 그냥 방앗간에 가져다 줬다가는 쌀벌레 천 마리 때문에 동네에서 쫓겨날 것 같았고, 둘째로 쌀을 씻어 방앗간에 가져가고 싶어도 그 때의 나는 독박육아 덕분에 쌀 씻을 근력과 시간이 없었으며, 셋째로 동네 방앗간 앞 길이 좁아 주차가 어려웠다.

    닷새쯤 고민하다 주말이 되었고 남편은 나의 지시에 따라 쌀을 지고 나가 음식물 쓰레기통에 쏟아 붓고 돌아왔다. 그 후로 어머님이 쌀 팔아주시겠다 할 때마다 극구 사양하며 아이들이 꽤 클 때까지 5Kg짜리 쌀만 사 먹었다.

    이제까지 먹은 밥 중에 제일 맛있는 밥은 아이들이 학교에서 가져온 쌀로 지은 밥이었다. 교장선생님이 빌린 논에서 수확한 쌀로 아침에 나락을 찧어 트럭에 싣고 올라와 전교생에게 조금씩 나눠주셨다. 그 쌀로 밥을 지어 솥을 열자 밥에서 빛이 났다. 그렇게 예쁜 밥은, 맛있는 밥은 처음이었다. 이런 쌀을 하루치씩 우유 배달하듯 가져다주면 반찬 없이 밥만 먹고도 살겠다 싶었다.

    참 오랫동안 쌀에 기대어 살아왔다. 그저 끼니 때가 되면 먹는 것이 밥이려니 했는데 아이들의 이유식을 위해 매일 한 줌의 쌀을 불리고 갈 때가 되자 쌀에 대해 아는 것이 참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유식 책에도 소고기는 우둔살이 좋고 닭고기는 가슴살이 좋고 채소는 브로콜리면 송이만 다져서 쓰고 양파면 물에 담가 매운 맛을 빼고 쓰라 하는데 쌀은 매번 ‘불린 쌀을 갈아’가 설명의 끝이었다.

    쌀은 그냥 다 쌀인가. 아는 품종이라고는 그 탈만 많고 맛은 하나도 없었다는 통일벼와 품종의 이름은 아닌 것 같은데 달리 부를 말이 없는 이천쌀밖에 없는 나는 누가 ‘이유식에 좋은 쌀’을 좀 팔았으면 했다. 해마다 쌀값 때문에 농민들이 여의도 바닥에 눈물과 고함이 섞인 쌀을 뿌리고 그 앞에 앉아 삭발을 해도 변한 것이 없다. 쌀 한 톨에 농부의 손길이 여든 여덟 번 가니 밥 한 톨 남기지 말고 다 긁어 먹으라 가르치면서 그렇게 키운 쌀을 왜 매번 바닥에 흩뿌리게 내버려 두는지 모르겠다.

    아이들이 기침감기에 걸려 정말 오랜만에 쑨 미음. 시금치 어린잎, 새우보푸라기, 피단을 얹었다.

    필자소개
    독자. 밥하면서 십대 아이 둘을 키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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