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린 종교와 닫힌 종교,
    명성교회 세습사태 보며
    [종교와 사회] ‘참 종교’를 생각한다
        2017년 12월 01일 12:10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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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는 내년부터 시행된다는 종교인 과세정책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논란이 되고 있는데, 이 문제에 집중이 안 되는 이유는 더 큰 문제가 뉴스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서울의 한 초대형 개신교회가 담임목사직을 아버지로부터 아들로 옮긴다는 일이다.

    해당 교회는 이것을 아버지 직을 아들에게 ‘계승’하는 것이라고 표현했지만, 말이 좋아서 계승이지 이미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시스템에 의해 덕을 보며 성장 발전한 개신교 대형교회라는 점에서 권력이나 경영권을 자손에게 물려주는 ‘세습’이라는 말이 더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대형교회의 부와 권력의 세습이지, 무슨 위대한 업적이나 노하우를 자손에게 계승하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사람은 아마도 그 교회의 교인들밖에 누가 있겠는가 묻고 싶은 심정이다.

    오강남이라는 종교학자는 최근 종교를 두 가지로 분류한다. ‘닫힌 종교’와 ‘열린 종교’. 기독교, 불교, 유교, 도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으로 구분하지 않고 어떤 것이든 닫혔느냐 열렸느냐로 구분하고 싶다는 말이다.

    닫힌 종교는 스스로 정한 절대적 권위에 모두가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모든 해답, 모든 행동강령은 이미 다 주어진 절대 불변의 것이므로, 이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덮어놓고 믿고 순종하기만 하면 거기에 따라 복이나 상을 받고, 불순종하면 화나 벌이 내린다는 공식을 가르친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열린 종교는 우리가 당연히 여기는 일상의 세계를 절대화하거나 거기에 안주하지 말고, 이런 세계의 바탕이 되는 실재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종교다. 인간으로서 지금 가진 생각들이 어쩔 수 없이 불완전하고 제약되어 있는 것이라는 것을 겸손히 인정하고 더 열린 마음으로 진리를 배우고 깨우쳐 나가겠다는 탐구 정신과 성찰의 노력을 촉구하는 것이 열린 종교의 특성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강남은 닫힌 종교는 종교의 표층 구조에 매달리는 종교요, 열린 종교는 종교의 심층 구조에 관심을 갖는 종교라고 말한다. 겉모습이 아닌 그 속 알맹이를 보아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위에서 말한 대형교회가 추구하는 종교는 결코 열린 종교라 할 수 없고, 닫힌 종교라고 할 수 있다. 그 교회의 담임 목사가 강조하는 종교생활, 신앙생활은 열심히 예배에 참석하고, 열심히 십일조 헌금하고, 열심히 목사의 말에 순종하여 따르는 것이라고 한다. 위에서 말한 닫힌 종교의 특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종교, 신앙생활의 모든 답과 행동방식이 이미 다 나와 있다. 정답은 더 이상 찾을 필요가 없다. 위의 세 가지가 정답이니까 그냥 그 답대로 행동에 옮기기만 하면 되는 게 그 교회의 종교생활이다. 얼마나 간단하고 명료하고 군더더기 없이 깨끗한가.

    그런데 인생이 그렇게 간단하고 명료하고 답이 정해져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우주 삼라만상의 이치가 그렇게 쉬운가? 인생을 살면 살수록 더 모르는 게 많아지고, 더 알고 싶은 게 많아지는 게 인생 아닌가? 더 탐구하고 깨우쳐 나가겠다는 겸허한 마음과 공부의 마음을 불러 넣어주는 종교야 말고 진정한 참 종교가 아닌가?

    그 교회의 닫힌 정답에 따른 종교생활은 신도들의 자유로운 신앙적 상상력을 박탈하고, 신도들을 목사와 소수 리더들의 욕망과 욕구충족을 위한 도구들로 전락시키는 것 외에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결국 수많은 사람들을 좌지우지하려는 인간의 원초적 권력 소유욕과 엄청난 헌금에 대한 자본 소유욕의 욕망 달성을 위해 도구화된 종교장사 행위 외에 더 무어라 하겠는가.

    사실 어느 종교든 닫힌 종교가 될 수도 있고 열린 종교가 될 수도 있다. 모든 종교들 안에는 열린 종교와 닫힌 종교가 공존한다고도 할 수 있다. 어떤 한 종교가 진정 그 종교의 의미를 깊이 깨닫지 못하고 표층적 모습에만 매몰된다거나, 경전의 문자적 내용만 강조한다거나, 나아가 그 종교 리더의 카리스마에 의한 순종적인 종교생활만 강요한다면 그 종교는 신도들을 반사회적 배타적 외계인으로 만드는 닫힌 종교가 될 것이고, 종교의 참뜻인 자유와 해방의 정신으로 신도들을 보다 더 포용적이고 사회관계적인 사람이 되게 하는 책임에 앞장선다면 그 종교는 열린 종교가 될 것이다.

    그래서 어느 종교를 닫힌 종교로, 열린 종교로 만드는 것은 종교지도자들이기도 하고 한편 그 종교의 신도들의 책임이기도 한 것이다. 뉴스꺼리가 되고 있는 그 대형교회의 지도자나 신도들은 원래 열린 종교였던 예수교를 닫힌 종교로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닫힌 교회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참 종교생활이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답답하게 보인다. 표층적으로는 휘황찬란한 영광의 모습으로 보일지 몰라도 심층적으로 보면 어두운 멸망의 길만 보일 뿐이다.

    다석 유영모(1890-1980)선생은 종교가 부패하면 남는 것은 결국 자기를 치장하고 자기 욕망을 어떻게든지 확대하고 연장하려는 데만 관심을 갖게 된다고 했다. 그가 자주 말했던 ‘몸 나’, 혹은 ‘제 나’만을 확장시키는 데만 혈안이 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만을 추구하는 이기적 욕망만 남게 된다는 말이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달 자체가 중요한 것이듯이, ‘몸 나’ 혹은 ‘제 나’가 아닌 ‘참 자기’ 곧 ‘참 자기’를 발견하는 것이 종교의 본질이라고 했다.

    그의 말로는 ‘참 나’,‘얼 나’,‘큰 나’로 거듭나고자 하는 것이 종교의 목적이고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이렇게 새롭게 된 참나와 얼나를 통해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신성(神性)과 불성(佛性)과 인성(人性)을 깨달음으로 절대자가 내 속에 있고 내가 절대자 속에 있다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 종교생활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즉, 열린 종교생활의 특성은 자기를 제대로 발견하고 나아가 자기 속에 있는 절대자를 깨달아 절대자와 내가 하나 되는 신비로움의 종교체험을 하며 사는 것이라 말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보편적으로 말해서 종교의 존재 목적은 인간으로 하여금 참 자유와 해방, 평화를 맛보고 살게 하는 데 있을 것이다. 수많은 법과 제도, 구조적 악, 왜곡된 관계, 나아가 존재 자체에 대한 회의와 번민 등 이런 모든 갈등으로부터 해방되어 ‘큰 나’ ‘한 나’ ‘얼 나’ ‘전체’라고 할 수 있는 우주적 존재와의 일치를 이루는 높은 영적 단계에 이르게 돕는 것이 종교의 본래 큰 뜻일 것이다.

    작금의 그 큰 대형교회는 그 엄청난 권력을 아들에게 세습하여 영원 무궁히 세상에서 누리려는 부귀영화의 욕망에 잡혀있으니 종교의 큰 뜻은 내버리고 작은 뜻, 곧 ‘제 나’와 ‘몸 나’에 매여 있는 닫혀있는 표층적 수준에 머물고 말았다. 그럼으로 나나 너나 모두를 진리 되는 절대자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있는 것이다.

    유영모의 제자 함석헌도 큰 뜻을 모르는 역사가 참 역사가 아니듯이 큰 뜻을 저버린 종교는 참 종교가 아니라고 했다. 거짓 종교이고 악한 종교라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의 큰 뜻을 외면한 채 부자간에 세습으로 권력추구만을 향해 달려가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세태 속에서 참 종교의 뜻을 향한 마음이 더욱 절실해진다.

    필자소개
    목사. 거창 씨알평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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