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운드에 꽂힌 태극기를 보며'
        2006년 03월 17일 11:2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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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멋진 경기였습니다. 16일 미국 애너하임 에인절 스타디움에서 벌어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한-일전뿐만 아니라 연이은 4경기 모두 멋진 경기였습니다. 4강 진출도 큰 성과인데 이제는 조심스럽게 우승까지 내다보고 있습니다.

    17일자 조간은 한 신문만을 제외하고 WBC 경기 소식을 1면 톱으로 다뤘습니다. 아침신문은 온통 태극기의 물결입니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애너하임 구장 마운드에 꽂힌 태극기입니다.

    이날 경기가 끝난 후 서재응 선수는 들고 있던 태극기를 투수 마운드에 꽂았습니다. 이를 두고 쿠키뉴스는 “마치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 산’ 정상을 정복한 뒤 태극기를 꽂는 장면을 연상시켰다”고 보도했습니다.

    승리의 벅찬 감동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행동에 대해 기자가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해도 선뜻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스포츠가 주는 즐거움, 게다가 승리가 던져주는 쾌감을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것은 실존하는 감정입니다. 하지만 그것 이상의 의미를 과도하게 부여해주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정복이라는 표현에 이견이 있습니다. 무엇을 정복한 것입니까. 만약 한국팀이 일본에 졌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가 정복당했다는 의미는 아니겠지요. 마찬가지로 한국이 이겼다고 해서 일본팀이나 미국 구장이나 그 누구도 정복당한 사람은 없습니다.

    야구는 야구로 즐겨야 하지 않을까요? 더군다나 야구 같은 경기는 두 팀이 어우러져서 이뤄내는 것입니다. 한국팀의 멋진 경기의 이면에는 역시 멋진 플레이를 보여준 일본팀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WBC가 국가대항전이라고 해도 스포츠를 민족적 우월감을 확인하는 것으로 변질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우리는 이미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통해 왜곡된 국가주의와 스포츠가 만났을 때 얼마나 불행한 결과를 만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는 “2002년 월드컵의 흥분이 그저 한 판의 잔치가 아니라 애국주의 열기의 폭발적 중독을 가져왔다”며 “또 다른 월드컵이 3달 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애국주의의 물결이 어디로 흐를지” 걱정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대로 과도한 의미부여도 경계해야 합니다. 경향신문은 17일자 사설을 통해 ‘야구한국’이라는 국가브랜드를 창출,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파급효과가 온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월드컵 4강 효과가 과연 무엇이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마운드에 꽂혀있는 태극기는 16일 있었던 새만금 사업에 대한 대법원 판결 소식을 밀어냈습니다. 조간신문들 중에서 한겨레만이 WBC소식보다 새만금 판결을 비중 있게 보도했을 뿐입니다.

    뉴스에 대한 가치판단은 편집의 몫입니다. WBC의 경기 결과에 국민의 눈과 귀가 집중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새만금 사업이 환경에 미칠 장기적인 영향력을 생각하면 이날 판결은 지금 느끼는 승리의 기쁨보다 훨씬 더 시민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태극기의 물결 속에 모두의 미래에 관한 보도는 뒷전으로 밀려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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