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딸에게 짜부라지다
    [누리야 아빠랑 산에 가자-30] 첫딸
        2017년 11월 24일 06:02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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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금증을 못 참아 홍역을 치렀던 어제에 이어 오늘도 혼자 산에 갔다 왔다. 땀범벅인 몸을 씻었다. 그리곤 팬티 차림으로 거실에 엎드려뻗친 다음 팔굽혀펴기를 시작했다. 지난 겨울부터 매일 50번 이상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근래 평균 4시간으로 수면을 줄여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업무가 폭증했다. 산행만으론 체력을 보충할 수 없었다. 쓰러지지 않으려고 덧붙인 손쉬운 체력 단련이 팔굽혀펴기였다.

    하나, 둘, …… 열둘, 열셋, 열넷, 속으로 숫자를 세면서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었다. TV를 시청하던 딸이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흠칫했다. 지난주 상황 때문이었다.

    그때도 팔굽혀펴기 중이었다. 딸내미가 등에 올라탔고, 나는 그 상태로 해보겠다고 용을 쓰다가 폭삭 무너졌다. 딸내미는 내 등에 앉아 깔깔댔다. 그랬기에 나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도 딸내미는 등에 올라타려 했다.

    “나도 할 거야.”

    기겁한 내 몸은 팔굽혀펴기를 멈춘 채 용수철처럼 벌떡 튀어 일어났다.

    “새끼야.”

    무심결에 내 입에서 툭 튀어나온 단어였다.

    “아, 아빠가 나한테 새끼야, 욕 했어. 아하하하. 얼마나 놀랐으면 새끼야, 욕이 튀어나올까. 아하하하.”

    딸내미는 옆에 있던 할매한테 말하며, 파안대소했다.

    “애가 얼마나 무거운데. 그러다 네 애비 짜부된다.”

    할매가 한마디 거들었다. 와중에 아내가 귀가했다. 딸내미는 제 엄마에게 이르며 또 깔깔거렸다. 상황이 진정된 뒤에 나는 딸내미 눈치를 살피며 마흔다섯 개를 더 하고 잽싸게 일어났다.

    딸내미가 아가일 때였다. 아마 두 살 무렵까지 아니었을까 싶다. 밤마다 아기를 받쳐 안고서는 거실을 천천히 왔다 갔다 했다. 아가가 안온하게 꿈나라로 갈 수 있도록 전등은 껐다. 커다란 창이 가로등 불빛을 들여왔다. 은은하고 정겨웠다.

    “자장~ 자장~ 자장~ 자장~, 우리 아기 잘도 먹고~, 우리 아기 잘도 놀고~, 우리 아기 잘도 싸고~, 우리 아기 잘도 크고~, 우리 아기 잘도 잔다~.”

    내 염원을 담아 단순하게 만든 자장가였다. 잘 먹고, 잘 놀고, 잘 싸고, 잘 크고, 잘 자는 것이 아기에게는 최상 아니던가. 낮은 억양으로 조용하게 읊조리며 반복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녹두장군 전봉준 숭모가인 ‘새야 새야 파랑새야’도 불렀다. 나는 자장가를 부르며 어린 시절 추억으로 여행하는 덤도 얻곤 했다. ‘새야 새야’는 내 할머니가 어린 나를 품에 끼고 불러주던 자장가였다.

    따스한 햇볕이 비추는 시골집 마루에서 할머니 무릎을 베고 그 노래를 들으며 잠들던 기억이 뚜렷하다. 할머니는 구슬프면서도 잔잔하게 가락을 맞췄다. 나는 타고난 음치라 할머니처럼 부르지 못했다. 매번 1절을 넘기지 못하고 걸렸다.

    추억이 또 있다. 할머니는 어린 내가 배 아프다 하면, 내 손은 약손 주석이 배는 똥배, 되뇌면서 배를 어루만져 주곤 했다. 신기하게도 조금 있으면 아픈 게 멈췄다. 딸에게 누리라는 아명이 있는 것처럼, 주석은 내 아명이고, 일가들은 지금도 그렇게 부른다.

    아가는 거실을 왕복하는 내 품에 안겨 잠드는 걸 좋아했다. 뭔가 성에 차지 않아 칭얼대다가도 두 팔로 받치고 걷기 시작하면 잠잠해졌다. 간혹 고된 하루를 마치고 귀가한 탓에 힘에 부쳐 잠깐 멈추거나, 잠든 줄 알고 내려놓으면, 아가는 애~엥~, 보챘다. 그러면 다시 기운을 모아 살랑살랑 흔들며 발걸음을 뗐다. 그러다 보면 언제 잠들었는지 아가는 쌕쌕거렸다. 아기 내음이 코를 상큼하게 자극했고, 아기 박동은 내 심장과 어울려 콩닥콩닥, 쿵쿵, 연주를 하곤 했다. 풍찬노숙에 지친 나의 심신을 정화하고도 남았다. 돌이켜 보건데, 지금까지의 삶에서 최고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양팔을 뻗쳐 안을 수 있었던 아기는 날이 갈수록 무럭무럭 자랐다. 어느 날부턴 감당이 안 됐다. 아이의 몸을 쓰다듬으며 옛날이야기를 하고 책 읽어 주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더니 이젠 힘으로 제 엄마와 견주고, 아빠까지 짜부라뜨릴 만큼 자랐다.

    나는 아가에게 푹 빠졌다.

    나는 딸바보다. 무던한 아내가 간혹 성을 낼 정도였다. 누리, 누리 하면서 항상 딸아이가 먼저였다. 신생아실에서 나온 아가를 품에 안는 순간부터였다. 삽시간에 아이에게 빨려들었다. 집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선 무아지경이었다.

    딸아이가 크면서는 딸 낳기 잘 했다는 생각이 신념으로 굳어졌다. 아들만 낳은 지인들이 안 돼 보이기까지 했다. 친구들과 비교해도 확실히 달랐다. 딸아이는 가족의 마음을 배려했다. 친구였고 애교덩어리였다. 부모를 돈으로만 바라보지도 않았다. 게다가 세상은 바뀌었다. 아들 낳은 부모는 제 돈으로 비행기 타고, 딸 낳은 부모는 딸 돈으로 비행기 탄다 했다. 아들자식에게 재산 빼앗길까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많았다.

    그런데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고백할 것이 있다. 1997년 9월 8일, 할매로부터 연락을 받은 나는 부랴부랴 택시를 타고 순천향병원으로 향했다. 아들일까 딸일까 궁금했고, 속으로 빌었다. 염원을 감추고서 분만실 앞에 도착했다. 할매가 입구에 서 있었다. 아기가 나왔다 했다. 할매는 잠깐 뜸을 들이더니, 딸이라 했다. 나는 티 내지 않으려고 마음을 붙잡았으나, 얼굴이 굳어졌다. 내 속마음을 눈치 챈 할매가 말했다.

    “첫딸은 살림밑천이다.”

    할매가 바로 그런 이였다. 어려서부터 시집가기 전까지 억세게 집안일을 거들었던 이였다.

    “어? 어. 잘 됐네.”

    얼굴을 풀려고 애를 썼으나, 잘 풀리지 않았다. 그랬다. 나는 첫 아이로 아들을 바라고 있었다. 대를 잇고 제사를 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유교 그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가 커 오면서 수다쟁이 할매가 그때의 일을 그냥 넘길 리 만무했다. 초등학교 무렵에 아이에게 일렀다.

    “네 애비가 너 태어났을 때 분만실 앞에 왔는데, 내가 딸이라니까 얼굴이 일그러지더라.”

    아이는 눈을 흘겼다.

    “아빠 나빴어.”

    그 뒤로도 할매는 간간이 복기하곤 했다. 처음엔 부끄러워 몸 둘 바 몰랐는데, 여러 번 반복되면서는 씩 웃고 넘기는 경지에 달했다. 아이도 아무렇지 않게 흘려듣게 되었다. 아이 하나 더 바랐던 할매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아이는 혼자서도 가족의 기대를 풍족하게 채웠다.

    필자소개
    민주노총 사회연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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