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당 정부와 민주노총 10년,
    우리 모두는 신자유주의자였다?
    [외환위기 20년과 노동운동②] 정말 어쩔 수 없었나
        2017년 11월 24일 12:14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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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환위기 20년과 노동운동①] 2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 정말 어쩔 수 없었던 것일까?

    우리나라가 IMF관리체제를 졸업한 것은 2001년 8월이었다. 김대중 정부는 구제금융으로 받은 빚을 만기일보다 3년 먼저 상환했다. IMF 역사상 흔치 않은 일이었다. IMF와 금융기관들은 우리나라를 모범생으로 치켜세웠다. 우리나라 언론들도 경제 주권을 회복했다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런데 역사는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 반복된다더니, 2001년이 그 꼴이었다. 1945년 독립 후 친일파가 판을 친 것처럼 2001년 독립 후에도 외환위기 주범들이 판을 친 것이었다.

    과도한 해외차입과 과잉중복투자로 외환위기의 방아쇠를 당긴 재벌들은 정리해고, 부실자산 정리, 해외진출 자유화 등으로 위기 이전보다 더욱 커다란 부를 손에 쥐었다. 대우그룹이나 한보그룹처럼 일부 재벌들이 해체 또는 청산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30대 재벌이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외환위기 이후 오히려 증가했다. 부실대출로 한국경제의 거품을 키운 월스트리트 금융기관들도 원금을 모두 회수한 것은 물론 한국 정부가 제공한 높은 이자율 덕분에 크게 이익을 봤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이 과정에서 크게 손해 본 쪽은 노동자와 정부였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엄청난 실업자가 발생했고, 다양한 형태의 비정규직이 증가했다. 그리고 노동시장에서 밀려난 중년층들이 자영업으로 뛰어들면서 ‘노동시장의 배수통’으로도 불리는 저소득 자영업자가 증가했다. 정부는 재벌의 부실자산을 정리하면서 백조 원이 넘는 공적자금을 써야했고, 또 위기로 인한 재정적자를 조정하기 위해 알짜배기 공기업들을 시장에 팔아야했다. IMF관리체제 졸업 후 대차대조표를 만들어보면, 위기를 만든 재벌과 초국적 금융기관들은 자본을 늘렸고, 그 위기를 수습한 노동자와 정부는 부채를 늘렸다.

    IMF 졸업 이후에도 김대중, 노무현 정부 6년 동안 이런 양상은 그다지 조정되지 않았다. 순소득 중 노동의 몫을 나타내는 노동소득분배율은 1998년 이후 계속 하락했다. 부채를 털어내고, 노동자를 아웃소싱한 재벌들은 이 6년간 이익이 급증했다. 여기에 IMF 졸업 이후 6년 동안 아파트 가격이 폭등해 부동산 소유자들이 엄청나게 재산을 불렸다. 기업소득 증가율이 가계소득 증가율을 앞질렀고, 부동산 가격 상승이 임금 상승보다 높았다. 대기업/중소기업, 정규직/비정규직 간 임금 격차 역시 계속 벌어졌다.

    이렇게 민주당 정부 10년을 거치며, 대한민국의 가장 중요한 경제, 사회 문제느 소득과 부의 불평등이 되었다. 그런데 이런 외환위기 수습과 이후에 대한 민주당과 주류 경제학자들의 일반적 평가는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에 따르면 무역 국가였던 한국에는 IMF 요구를 잘 실행하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자본시장 자유화와 노동시장 유연화를 거부하고서는 구제금융을 받을 수 없었고, 재벌기업을 지원하지 않고서는 경제를 회복시킬 수 없었다. 그들은 김대중 정부가 IMF 요구를 적극적으로 내부화한 덕에 우리나라 시장은 더 투명하고, 더 경쟁적이게 됐다고 분석한다. 즉, 삼성전자나 현대차 같은 세계적 기업이 나오고, 2천 년대 그나마 5% 내외의 성장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도 IMF 발 구조조정이 성공한 덕분이었다는 것이다.

    불평등 심화가 상황상 어쩔 수 없었다는 주장은 노무현 정부에 참여한 관료들과 지식인들에게서 많이 나온다. 이들에 따르면 노무현 시기 서울 아파트 가격이 많이 상승한 것은 2천 년대 세계적인 부동산 가격의 폭등 때문이었다. 비정규직이 별로 줄어들지 않은 것은 세계적으로 노동시장 유연화가 대세인데다가 국내에서는 정규직 노동조합이 기득권을 양보하지 않은 탓이었다. 재벌로 부가 집중된 것 역시 세계화와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민주당 10년간 발생한 부조리와 불평등은 세계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모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 부지부식 간에 신자유주의자가 된 진보진영

    외환위기 이후 혼란은 정부에게만 있지 않았다. 민주노총, 시민단체, 진보정당 역시 여러 모로 혼란스러웠다. 진보진영은 고용 불안, 비정규직 확대, 공공기관 민영화같이 직접적으로 노동자에게 피해가 가는 정부 정책에는 반대했지만, 이런 정책의 근간이 되는 금융세계화 정책에 대해서는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했다.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진보진영 상당수는 금융세계화 정책을 오히려 지지했다.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을 진보 정책으로 둔갑시킨 대표적 사례는 재벌개혁과 금융개혁이었다.

    1990년대 후반 시민단체들이 만든 재벌개혁 프레임은 지배구조 개혁이었다. 총수 가문의 초법적 족벌 경영이 재벌의 부정부패와 경영위기를 반복해서 만든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들에 따르면 계열사를 늘리는 것을 자신의 재산 증식으로 여기는 재벌 총수는 효율적 경영을 통한 기업의 수익률 증가보다 인수합병이나 차입 투자를 통한 규모 확대에 집착한다. 외환위기의 원인이기도 했던 1990년대의 과잉중복투자가 그 대표적 예였다.

    또한 소수 지분으로 경영권을 유지하려다보니 지분 확보를 위해 비자금을 조성하거나, 개인 회사를 내부거래에 끼워 넣어 기업 자산을 횡령하는 일도 다반사로 벌였다. 능력 없는 재벌 2세, 3세들이 경영권을 불법으로 승계 받아 계열사 전체를 좌지우지 하는 것도 한국의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 시민단체들은 이런 족벌경영을 타파하고, 주주권의 강화와 전문 경영인 체제를 도입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민주노총도 1998년 노사정 협약에서부터 이런 방식의 재벌개혁을 지속적으로 요구했었다.

    그런데 이런 재벌의 지배구조 개선은 사실 IMF의 요구이기도 했다. 미국의 금융 투자자들은 주주 배당과 주식 가치에 인색한 한국 재벌들의 태도가 지배구조에서 기인한다고 여겼다. 소수 지분을 가지고 경영권을 행사하는 재벌 총수들은 배당이나 주식 가치보다도 그룹의 규모를 키우는 것에 더 주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총수들은 외부 금융기관에 대해서도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는 미국적 경영 관행과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미국 대기업들의 전문경영인들은 금융투자자들에 의해 선임됐고 또 금융투자자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배당과 주식 가격에 상당한 신경을 썼다. IMF를 앞세운 미국의 금융기관들은 한국의 대기업들도 미국의 관행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민단체들은 시장이 정상적으로 잘 작동하면 모두에게 이익이라는 시장주의 경제학을 주장의 근거로 삼았다. 자유로운 시장이 한국적 재벌병을 고칠 수 있다는 시민단체들의 생각은 사실은 굉장히 친기업적인 관점이다. 배당을 더 받기 위해 기업에 수익률을 높이라 요구하는 주주들의 이기적 행동이 기업을 효율적으로 만든다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이들에 따르면 이런 비용절약-수익극대화 경영이 기업을 강하게 만들어 국가 경쟁력을 높인다. 효율적 기업이 모두에게 선이다.

    하지만 2007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만천하에 밝혀진 것처럼, 시민단체들이 금과옥조로 여겼던 주주행동주의는 기업의 건실한 장기적 성장을 방해하고 거시경제적 불안전성을 높였다.

    그런데 이념적이었던 시민단체야 그렇다고 쳐도, 조합원 이해관계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노동조합은 과연 어떤 점에서 미국 금융기관들과 이해를 공유하고 있었던 것일까? 없었다. 재벌 총수를 미워한다는 점에서는 정서적 공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이해관계는 철저히 갈린다. 노동자는 주주에게 이익을 배당하는 것보다 사내유보를 늘리는 것이 당연히 이득이다. 그래야 투자도 늘릴 수 있고, 후에 성과 분배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주주의 대리인으로 나서 오직 비용절감과 수익극대화를 추구하는 전문경영인보다 차라리 기업 규모의 양적 확대를 추구하는 재벌 총수가 노동조합에 유리하다. 예로 3저 호황이 끝난 이후 기업 수익률이 급감하고 있음에도 1990년대 중반까지 대기업 노동자 임금이 크게 오른 것은 재벌 총수들의 이런 경영전략과 관계가 깊었다. 주주 중심으로 지배구조를 개선하라는 민주노총의 요구는 조합원의 이해와 충돌하는 것이었다.

    금융세계화 친화적인 시민단체들의 재벌개혁론은 금융개혁에도 이어졌다. “관치금융 철폐” 요구가 대표적이었다. 시민단체들과 심지어 노동조합들도 정부의 금융기업에 대한 개입을 차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IMF가 강력하게 요구했던 것이기도 했다. 중앙은행이 정부로부터 독립해 인플레이션 억제만 신경 쓰고, 금융기업들이 자유롭게 수익의 관점에서 사업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하라는 요구였다. 지난 글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신자유주의 정책개혁의 요체는 금융자유화다.

    물론 정부의 금융기업 낙하산 인사와 정권의 정경유착 금융지원이 문제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IMF의 금융자유화가 답일 수는 없었다. 잘못된 관치가 문제다. 관치로부터 벗어나 시장으로 가는 것이 답은 아닌 것이다. 관치금융 철폐를 좌우파가 모두 주장하며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 은행들은 대부분이 외국인 자본에 넘어갔다. 우리나라 은행의 외국인 지분율이 70%를 넘는다. IMF관리체제에서 벗어났다고 하지만, 실상은 금융시장 자체가 월스트리트 관리체제가 된 셈이었다. 금융기업의 노동조합들 역시 관치금융의 낙하산 사장에서 독립했을지는 모르겠지만, 금융시장 수익률에 따라 항시적 구조조정을 당하며 오랫동안 고용불안을 겪고 있다.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지만, 신자유주의 개혁은 가장 핵심적 부분에서 IMF와 민주당 정부, 그리고 시민단체, 민주노총이 함께 추진한 것이었다. 민주노총은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매우 치열하게 싸웠지만,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확대의 배경이 되는 금융세계화에 대해서는 정치적으로 협조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주주행동주의와 금융자유화를 자신의 요구로 삼았으니 말이다.

    ○ 민주노총 내부의 갈등,
    사회협약 여부가 아니라 실은 무엇을 ‘협약’할지 모른 것이 문제였다

    이런 혼란 속에 민주노총 내부의 갈등도 매우 커졌다. 특히 노사정위 참여를 둘러싼 갈등이 매우 컸었다. 2005년 2월에는 노사정위 참여 여부를 논의하다 대의원대회 폭력 사태까지 발생했다. ‘사회적 합의주의’가 민주노총의 계급성을 해치고 있다고 주장하는 의견그룹들과 민주노총이 노동자 전체의 이해관계를 다루려면 사회적 협약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의견그룹들이 정면충돌했다. 그리고 이 쟁점은 지금까지도 이어진다.

    그런데 민주당 집권기 10년간 노사정 협약의 진짜 문제는 형식보다는 그 내용이 뭔지가 아리송했다는 점이었다.

    앞에서 봤듯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신자유주의 개혁이 정말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자유주의 개혁은 정부에게 불가항력의 힘, 할 수밖에 없는 세계적 대세였다. 따라서 노사정 협약도 기본적으로 이 개혁 로드맵을 벗어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신자유주의 개혁은 금융, 노동시장의 규제 철폐와 자유화를 핵심 방향으로 삼는다. 협약을 통해 정부가 노동조합에게 요구할 것의 목록은 노동시장 유연화뿐이었다.

    곤란한 것은 민주노총도 마찬가지였다. 민주노총은 노동시장 유연화에 반대했는데, 그렇다면 노동시장 유연화 대신 무엇을 추진해야 하는지 밝힌 바가 없다. 아니 밝히긴 했는데, 그것은 사실상 주주행동주의와 금융시장 자유화를 추진하자는 주장에 다름없었다. 신자유주의를 하는데, 노동시장만 빼달라는 식이었던 셈이다.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참여하는 사회협약은 비전에 대한 공유를 전제한다. 비전 없이 사회협약이 추진될 리 없었다. 민주당 집권 10년 내내 이어진 민주노총의 갈지자 행보는 기본적으로 민주노총이 신자유주의 비판에 실패한 것이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

    민주당 집권 10년 이후 이명박 박근혜 정권 시기, 민주노총은 몸은 힘들었지만 머리는 오히려 이전보다 가벼워졌다. 정권에 대한 비판이면 충분했던 시기였다. 하지만 2017년 다시 민주당 정부가 들어서며, 내부의 갈등이 커지기 시작했다. 갈등의 양상은 이전 민주당 집권기 10년과 같다. 문재인 정부는 4차 산업혁명 준비론(혁신성장론)과 소득주도 성장론을 들고 민주노총에게 노사정 테이블로 들어오라고 요구 중이다. 하지만 민주노총은 4차산업혁명론이나 소득주도 성장론을 계급적 관점에서 분석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민주노총 선거에서도 이런 이야기는 일부 선본에서만 간간히 들려올 뿐이다.

    다음 세 번째 글에서 우리는 외환위기 20년에 출범한 새로운 민주당 정부에 대해 분석해 볼 것이다. 내 생각에 문재인 정부도 이전 민주당 정부와 크게 떨어져 있지 않다. 문재인 대통령부터가 노무현 정부의 연장선에 있는 사람이다. 문 정부가 이야기하는 4차산업혁명론이나 소득주도 성장론은 내 생각에 여전히 노동자의 대안과는 거리가 멀다. (계속)

    필자소개
    사회진보연대 부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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