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주영의 대응,
    '어용노조를 설립하라!'
    [한 장의 사진③] 현대차와 현대중
        2017년 11월 23일 05:5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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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789노동자 대투쟁]”한 장의 사진-2: 현대미포조선 사측, 시청에서 노조설립신고서 탈취” 

    미포조선 서류 탈취로 노동부의 직격탄을 맞아 위기에 몰린 정주영은 그대로 물러나지 않았다. 대책회의를 거듭하던 현대그룹은 기발한 발상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정했다. 근로기준법에 명시된 1사1노조 규정을 악용한 것이다.

    미포조선의 노조가 설립된 6일 후인 7월 21일, 관리자와 회사에 협조적인 노동자를 앞세워 현대중공업에 기습적으로 노조를 설립했다. 사측의 입맛에 맞는 노조, 어용노조가 탄생한 것이다. 노조 설립을 준비 중이던 일단의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비밀리에 회합을 거듭하며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논의를 거듭했다.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이 대책 마련을 거듭하는 사이, 이번에는 현대자동차에서도 기습적으로 어용노조가 설립됐다. 정주영은 근로기준법만 교묘히 이용하지 않았다. 어용노조를 자주적인 노조로 위장하기 위해 한국노총과 접촉한 것이다. 불과 2주 전에 현대엔진의 민주노조 설립을 지원했던 금속노련은 태도를 180도 바꾸며 민주노조 설립을 위한 지원투쟁에서 이탈했다.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 어용노조는 한국노총 산하 금속노련의 지지를 받는 자주적인 노조로 둔갑했다.

    7월 25일, 부슬비가 내리는 현대자동차 운동장에서 어용노조의 설립신고 대회가 시작됐다. 민주노조 설립을 준비하고 있던 일단의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즉각 기계를 멈추고 “어용노조 물러가라”고 외치며 운동장으로 돌진했다.

    부슬비는 폭우로 변하기 시작했고, 이내 고성과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노동자들은 어깨를 걸고 ‘어용노조 퇴진’을 외치며 운동장을 돌며 위력시위에 돌입했다. 그때, 기계를 멈춘 노동자들이 하나 둘 운동장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대오가 1만 여명으로 늘어나자 겁에 질린 어용노조 집행부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 자리에서 노동자들은 새로운 민주노조를 건설하기 위한 임시집행부가 출범했다고 선언했다. 노동자들이 환호로 화답하자 임시집행부는 곧바로 총파업에 들어가자고 호소했다. 순식간에 공장은 완전히 마비됐다. 자정이 되기도 전에 현대그룹은 민주노조와 임시집행부를 인정한다는 각서를 제출하며 백기를 들었다.

    현대자동차의 싸움이 승리로 끝나자, 현대중공업 노동자들도 정면돌파를 선택했다. 7월 25일 부터 점심시간과 휴식시간을 이용해 어용노조 해산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서명운동은 순탄치 않았다. 공장 곳곳에 몰려나온 관리자들은 서명운동에 참여하려는 노동자들을 감시하며 “잘라버리겠다”며 고성으로 위협했다.

    관리자들과 대립하며 3일 동안 서명운동은 계속되었지만 현대그룹은 시간만 끌면서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정주영은 현대중공업만이라도 민주노조의 탄생을 저지하기 위해 공장에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 등 물러서지 않았다.

    7월 28일, 정문을 통과한 10여명의 노동자들은 품속에 숨겨두었던 현수막과 선전물을 꺼내들었다. 곧바로 출근하는 노동자들에게 어용노조 퇴진을 위한 총파업을 호소했다. 기습적인 시위를 저지하기 위해 관리자들이 몰려들었고 출근길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모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던 관리자들의 수는 백 여 명에 달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일까. 출근하던 노동자들은 관리자들을 가로막으며 시위대를 엄호했고 그 숫자는 수천 명으로 늘어났다. 노동자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고성을 지르자 관리자들은 건물 안으로 후퇴했다. 운동장에 모여들기 시작한 노동자들의 숫자는 이미 만여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승리가 눈앞으로 다가온 것처럼 보였지만 해가 질 무렵까지 회사는 어떤 협상에도 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울산 전체를 뒤흔든 대투쟁의 서막이 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7월 28일 현대중공업에 뿌려진 선전물.(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필자소개
    인문사회과학 서점 공동대표이며 레디앙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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