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민주노총, 뭘 할 수 있을까
    [기고]외환위기 20년과 노동운동①
        2017년 11월 21일 01:01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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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11월 21일은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정부가 IMF(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을 공식신청한다고 발표한 날이다. 20년 전의 사건이지만, 여전히 현재의 한국사회는 당시 시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구제금융 협약과 신자유주의의 전면화, 구조조정과 금융시장 등 개방, 노동유연화라는 이름의 노동자의 삶과 생활의 전면적 불안정화가 20년이 지난 지금도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이에 한지원 사회진보연대 부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이 ‘외환위기 20년과 노동운동”이란 주제로 세 꼭지 정도의 연재를 할 예정이다. 각 글의 기조는 “1997년 11월로 돌아간다면, 현재의 민주노총은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민주당 정부 10년, 현재의 민주노총이 김대중-노무현을 다시 만난다면?”, “신자유주의에 당하고 이제 인공지능에 먹히고? 또 1997~98년 꼴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이 될 예정이다. 많은 관심 부탁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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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년 전 겨울, 거대한 비극의 시작

    20년 전 이맘때, 한국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공식적으로 구제금융을 요청했었다. 그리고 11월 22일 입국한 IMF협상단은 구제금융의 대가로 빠른 시장개방과 구조조정을 한국 정부에 요구했었다. 한국 정부가 IMF에 속도 조절을 요청하자, 협상의 속전속결을 원한 미국은 클린턴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 한국을 압박했다. 구제금융 협상이 한참이던 11월 28일, 미국 클린턴 대통령은 김영삼 대통령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다음 주 중 한국 부도날 것이다. 유일하고 현실적인 길은 12월 1일 이전에 신뢰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IMF와 합의하여 발표하는 것뿐이다.”라고 협박했었다.

    한국 정부는 아시아통화기금(AMF) 설립이나 일본의 금융원조 같은 다른 해결책을 바랐지만, IMF 구제금융 외에 다른 시도들은 미국의 반대로 모두 무산됐다. 외환보유고가 실제 바닥을 드러낸 12월 첫째 주, 결국 한국은 IMF와 대기성 차관 협약을 체결했다.

    1997년 12월 3일 약정서를 교환 중인 임창열 전 경제부총리와 캉드시 당시 IMF 총재

    미국의 요구는 11월 초부터 초지일관 하나였다. 금융시장 개방과 구조조정. 미국 금융기관과 기업들이 마음껏 원하는 방식으로 한국 시장에 투자하고 이익을 가져갈 수 있도록 해달란 것이었다. 한국에 11월 초부터 파견되어 있던 미국 재무부 차관 데이비드 립턴은 “IMF를 통한 포괄적이고 과감한 금융개혁(취약한 금융기관의 폐쇄, 금융기관 감독 강화, 외국인 소유제한 자유화)”이 미국의 목표라고 분명하게 밝혔었다.

    우여곡절 끝에 체결된 12월 5일의 IMF 차관 협약도 금융자산 가치 보호를 위한 통화긴축, 외국인에 대한 금융시장 규제 철폐, 금융시장을 교란하는 부실 금융기관의 퇴출, 자본시장에 부정적 영향을 주는 기업지배구조의 개혁 등을 핵심으로 담았다. 미국이 물밑에서 조정한 IMF 협약은 미국 금융기관들의 한국 시장에 대한 요구 목록에 다름 아니었다.

    12월 5일 이후 구제금융이 도착하면서 외환시장이 잠시 진정됐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IMF 요구로 금리를 높이고 금융기업 구조조정을 가속화하자 돈을 구하지 못한 기업들이 줄줄이 부도가 난 것이었다. 그리고 실물경제가 엉망이 되면서 12월 중순부터 금융시장이 다시 요동쳤다.

    12월 초에 도착한 구제금융이 썰물 빠지듯 사라지며 한국의 부도 가능성이 다시 해외 언론에 보도되었다. 미국 연준은 12월 말 한국 부도 가능성을 아주 심각하게 검토했고, 미국 국가안보회의는 한국이 부도 날 경우 장기간 소요와 북한과 유혈 갈등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여기에 더해 IMF 재협상과 고용안정을 공약으로 내건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12월 중순부터 해외 언론들은 한국의 국가부도가 카운트다운에 돌입한 것처럼 보도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김기환 대외경제협력 특별대사는 월권을 하며 미국 재무부와 물밑 협상을 벌였다. 그가 소위 ‘IMF플러스’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미국 재무부와 추가 구제금융을 협상한 것이었다. IMF플러스는 기존 차관 협약에 금융시장 추가 개방과 정리해고제, 파견제 즉각 도입을 더한 것이었다. 특히 IMF플러스는 정리해고제와 파견제 도입을 구조조정 의지의 가늠자로 두었는데, 이는 미국 기업이 한국에 투자해도 노사관계에 불편함이 없도록 해주겠다는 약속임과 동시에 친노동으로 보이던 김대중 당선자가 미국 금융기관 이해에 얼마나 복종할 것인지를 시험해보는 것이었다.

    12월 22일 립턴 차관이 김대중 당선인을 만났다. 김 대사와의 물밑 약속을 과연 새 대통령이 지킬 것인가를 시험해 보기 위해서였다. 이미 여러 경제 기관에서 추가 구제금융 없이는 국가 부도를 피할 수 없다는 보고를 받은 김대중 당선자는 “기업이 망해 해고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는 해고가 불가피하다고 본다.”고 립턴 차관에게 자신 있게 말했다. 당선 며칠만에 미국 고위 관리 앞에서 자신의 공약 폐기를 약속한 것이었다.

    대통령 당선자 면접시험 결과에 만족한 미국은 IMF가 추가 구제금융 협상에 합의하도록 허락했다. 12월 24일 자정에 체결된 협약은 “노동시장 유연화 및 정리해고 시 노사 간 고통분담에 대한 정부 입장 발표”를 1998년 1월 말까지 하도록 적시했다. 정부가 1월 말까지 협약을 이행하지 않으면 추가 구제금융이 중단되는 것은 물론 미국 금융기관들과의 채무조정 협약도 기대할 수 없었다. 정부와 기업들은 어차피 IMF와 이해관계가 일치했으므로 관건은 노동계였다. 노동계의 고통분담 합의문이 없으면 한국은 1월 말에 다시 국가부도 위기에 내몰리게 될 상황이었다.(*위의 주요 사건과 인용문들은 <지주형, 2011, “5장. 한국 신자유주의의 형성(1)-IMF협상과 지구적 위기관리의 정치경제학”,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 책세상>에서 참조했다.)

    12월22일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이 국민회의 당사로 찾아온 데이비드 립튼(맨왼쪽) 미국 재무차관과 스티븐 보스워스(가운데) 주한 미대사를 만나고 있다.(국회사진기자단)

    김대중 당선자는 12월 27일 민주노총 지도부를 따로 국회 귀빈식당으로 불러 정리해고제 도입과 노사정협의체 출범을 설득했다. 자주적 민주적 노동조합의 지도부와 행정부 수반이 공식적으로 만난 것은 아마도 이것이 해방 후 처음이었을 것이다. 간담회에서 민주노총 지도부는 정리해고제와 파견제 도입에 대해 반대 의견을 전달했다. 1996~97년 총파업의 열기가 아직도 내부에 남아있던 민주노총이었다. 하지만 이런 민주노총도 1월 10일 한광옥 국민회의 부총재가 사무실을 방문하고, 13일에 IMF 캉드쉬 총재까지 나서 노사정 합의를 압박하자 결국 태도를 바꾸게 되었다.

    특히 캉드쉬 총재는 “정리해고제 법제화가 아니라 고통분담에 관한 노사정 합의가 추가 구제금융의 선결조건”임을 공개적으로 밝힘으로써 노사정 합의를 만들지 못할 경우 민주노총이 이후 국가부도의 책임을 져야한다고 협박했다. 이는 IMF가 정리해고제 도입보다 더 까다로운 조건을 한국에 제시한 것인데, 단순한 법제화가 아니라 민주노총이 합의한 정리해고제를 실시하라고 요구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출범한 지 2년이 조금 넘었고, 조직률이 5%도 되지 않는 민주노총이 국가부도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세계에서 가장 힘이 센 초국적 금융기관과 교섭을 하는 꼴이었다. 더군다나 정부까지 반대편에 서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결국 민주노총은 캉드쉬 총재 간담회 다음날 노사정위원회 참여를 결정했다. 노사정위원회가 1월 15일 출범했고, 출범 5일 만인 1월 20일에 민주노총이 참여한 공동선언문이 발표됐다. 선언문의 제목은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간의 공정한 고통분담에 관한 공동선언문”이었다. 빼고 더할 것도 없이 IMF가 요구한 제목 그대로였다.

    선언문은 “노사정위원회 위원 일동은 우리 경제가 지금 벼랑 끝에 서있는 절박한 상황이라는데 인식을 같이 합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5. 해외자본 유치를 위한 여건 조성에 최선을 다하여 본 위원회가 합의·채택한 의제들에 대하여 2월 임시국회 일정을 감안하여 조속히 노사정대타협을 통해 일괄 타결하도록 한다.”라는 합의조항으로 끝났다. 위원회가 합의 채택한 의제들은 10개 의제 37개 항에 달했는데, 재벌개혁, 사회안전망, 노동기본권 등 한국 사회 개혁 과제 대부분이 합의과제에 포함됐다. 하지만 미사여구와 국회에서 처리 불가능한 항목들을 빼고 나면, 협약은 실상 처음부터 끝까지 정리해고제와 관련된 것들뿐이었다. 정리해고제를 이용한 구조조정 정책과 정리해고 이후에도 노동력 손상을 최소화하기 위한 대책들이 의제들의 요체였다.

    IMF를 향해 발표한 노사정 고통분담 선언문 이후 미국 재무부가 월스트리트의 금융기관들을 불러 모았다. 한국의 모든 경제주체가 백기투항을 했으니, 이제 월스트리트가 움직일 때였다. 미국의 초국적 금융기관들은 240억 달러 규모의 단기채무조정협상을 진행해 원래 채권을 한국 정부가 보증하는 1년, 2년, 3년 만기채권으로 교환했다. 그리고 이로써 한국은 최소한 1998년에는 국가부도가 날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됐다.

    20년간 1998년 1월 20일에 갇혀 있는 우리

    1998년 1월 20일의 사건은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논란의 대상이다. 따져보면 몇 주 전 민주노총의 청와대 간담회 불참을 둘러싼 논쟁도 이 사건의 연장선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노동운동 정파들도 1월 20일을 기억하는 방식에 따라 조직된 측면이 있다.

    1월 20일 이후 민주노총은 노사정위 참여와 탈퇴를 반복하면서 이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 내부에서 큰 갈등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현장파의 대표 슬로건은 “사회적 합의주의 분쇄”로 굳어졌고, 국민파로 불리는 정파들은 북유럽 같은 제대로 된 노사정 사회협약을 더 갈구하게 됐다. 그리고 이 두 극단 사이에서 또 여러 정파들이 생겨났다. 현재 진행 중인 민주노총 임원 선거에서도 가장 중요한 쟁점은 노사정 사회협약에 태도로, 내용은 별 새로운 것 없이 결국 1월 20일의 쟁점을 반복 중이다.

    민주노총은, 자고 일어나면 주인공의 시간이 다시 어제로 되돌아가 있는 공상과학 영화처럼, 1998년 1월 20일을 20년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나는 한국의 노동운동이 일보전진을 하려면 이제 1998년 1월 20일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주노총 조합원도 정세도 모두 바뀌었다. 세상은 변하는데 민주노총만 예전 모습 그대로일 수는 없다.

    물론, 영겁의 1월 20일에서 벗어나자는 것이 과거를 모두 잊고 새 출발하자는 뜻은 아니다. 난 오히려 노동운동이 노사정 협약과 관련한 트라우마를 벗어나려면 1997년 11월부터 1998년 1월까지 이뤄진 외환위기 과정을 더욱 깊게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심리학에서는 ‘과거 겪은 고통이나 정신적인 충격으로 유사한 상황 발생 시 불안한 증세를 겪는 현상을 트라우마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트라우마를 극복하려면 두려운 기억을 피하지 말고, 당시 상황을 뒤집어 생각해 볼 것을 권유한다. 민주노총의 1월 20일 트라우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는 당시 정세를 보다 냉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오늘날의 민주노총이 20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무엇을 더 할 수 있고, 무엇을 그때와 마찬가지로 할 수 없는지 따져봐야 한다.

    냉전에서 금융세계화로… 과연 우리는 그 ‘세계’에서 이탈할 수 있었을까?

    서두에서 자세히 묘사한 1997년 11월부터 1998년 1월까지의 상황으로 되돌아가보자. 세계를 주무르는 월스트리트 초국적 금융기업들과 이미 일찌감치 백기투항을 해버린 정부가 민주노총 맞은편에 앉아 국가부도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교섭하던 당시 상황 말이다.

    만약 현재의 민주노총, 또는 그 어떤 정치세력들이 그 교섭 테이블에 앉으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나는 당시와 비슷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미국 주도의 금융세계화에서 이탈할 수 있는 전략이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없기 때문이다. 당시 상황을 다시 살펴보자.

    미국이 글로벌 전략을 바꿀 때마다 한국은 격변을 겪었다. 1950년대 말 미국이 반공 개발도상국의 쇼케이스를 바꾸려 하자, 한국에서는 경제위기가 심화되며 이를 수습하지 못한 대통령이 미국으로 쫓겨났다. 1970년대 초 베트남 전쟁에서 패한 미국이 동아시아 군축을 추진하자, 한국에서는 자주국방을 하겠다며 중화학공업화를 무리하게 추진하다 결국 대통령이 경제위기 상황에서 측근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그리고 1990년대 초 소련 동구권 몰락으로 냉전이 해체되고 월스트리트 금융 자본이 글로벌 전략을 주도하는 시대가 오자, 한국에서는 미국을 따라 금융세계화를 추진하다 1997년에 외환위기가 발생했다. 1997년 이후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바로 이것, 미국과의 관계가 냉전이 아니라 이제 금융세계화로 바뀌었다는 것이었다.

    신자유주의로 표현되는 미국의 글로벌 전략 변화는 금융자본이 주도한 것이었다. 1980년대, 규제에서 해방된 금융자본들은 세계적 규모의 자유로운 금융시장을 만들기 위해 미국 정부와 국제금융기구들을 다방면으로 활용했다. 월스트리트의 금융가들은 미국 정부와 함께 워싱턴컨센서스라고도 불리는 금융 세계화 프로그램을 만들고, 이를 세계적으로 관철시키려 했다. 워싱턴컨센서스의 주요 내용은 외국자본에 대한 제한 철폐, 자본시장 규제철폐, 무역 자유화와 시장 개방, 국가의 시장 개입 축소, 세금 인하, 인플레이션 억제, 사유재산권에 대한 절대적 보호, 공공부문 민영화 등으로 국민경제 전체의 발전보다는 금융 자본의 이해를 앞세운 것들이었다.

    그런데 이런 정책들은 금융기관의 경쟁력이 뒤처지는 중진국과 후진국에는 매우 불리한 것들이었다. 우선 선진국 금융기관과 중진국 나라의 금융기관은 규모부터 비교가 되지 않았다. 골드만삭스, JP모건, 시티은행 같은 미국 대형 금융기관은 개별 기관 자산규모가 웬만한 중진국 나라의 1년 GDP보다도 컸다. 이런 미국 금융자본이 자본시장에 아무 규제 없이 진입하면, 중진국 나라의 금융기관들은 생존 자체가 쉽지 않다. 또한 금융시장 규제가 철폐돼 정부가 외환 시장 등을 통제하지 못하면 이들 나라의 제조업 기업들은 선진국과의 생산성 경쟁에서 심하게 뒤쳐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로 개발도상국으로 분류되는 여러 나라들이 워싱턴컨센서스에 저항했다. 하지만 18~19세기에 제국의 자본이 총과 대포로 다른 나라의 시장을 열었던 것처럼, 20세기 말엽에는 제국의 금융자본이 외환위기를 무기로 개발도상국들의 금융시장을 강제로 열어젖혔다.

    미국 중앙은행이 1979년부터 1981년까지 인플레이션과 전쟁을 한다며 기준금리를 급격하게 올리자 아르헨티나에서는 외국자본이 대거 미국으로 빠져나가며 금융시장이 붕괴했었다. 아르헨티나의 금융기관들은 빠져나간 외자를 메우기 위해 해외 차입을 늘렸지만, 높은 이자 탓에 이자를 내려고 빚을 또 내야 하는 악순환만 계속됐다. 결국 아르헨티나는 1984년에 IMF와 워싱턴컨센서스의 정책들을 조건으로 구제금융 협정을 체결했고, 속수무책으로 금융시장 개방과 규제 철폐, 대규모 공공부문 민영화를 실시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뒷마당이라 불리는 남미의 여러 나라들이 이런 비슷한 과정을 거쳐 금유시장 개방과 규제철폐를 단행하며 미국 금융자본 주도의 세계 시장에 동참했다.

    월스트리트의 금융세계화 프로그램은 1990년대 초중반에 절정에 달했다. 이들이 각국의 금융시장을 무장해제시키는 방법은 비슷했다.

    먼저 미국 금융자본이 그 나라 금융시장에 들어간다. 외자 유입으로 그 나라 통화가치가 절상된다. 자본생산성이 상승하는 장기 호황이 아닌 상황에서는 과대평가된 통화가치가 대외경쟁력을 빠르게 감소시킨다. 외국 금융자본은 작은 대내외 충격만 발생해도 대규모로 철수를 단행한다. 그리고 그 나라 금융시장이 붕괴한다. IMF와 월스트리트 채권단이 금융시장 완전개방과 규제철폐를 조건으로 구제금융협정을 제시한다. 화폐 붕괴로 자본 순환이 멈춘 그 나라는 결국 백기투항해 협정을 체결한다. 금융시장이 개방되고, 정부의 시장개입은 제한되며, 금융기관과 알짜 자산들이 미국 금융 자본에 헐값에 넘어간다. 1994년 멕시코, 1997년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그리고 한국이 이렇게 당했다.

    우리나라가 미국 주도의 금융세계화에 발을 걸친 것은 따져보면 1980년대 초부터였다. 금융자산의 실질가치를 무력화하는 인플레이션은 금융 자본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었고, 미국의 금융자본들이 글로벌 표준으로 가장 먼저 정착시키려 했던 것도 중앙은행의 핵심목표를 고용 같은 실물경제에 대한 개입이 아니라 인플레이션 통제로 바꾸는 것이었다.

    전두환은 1979년 미국 연방은행의 무지막지한 반인플레이션 통화긴축을 보면서, 우리나라에서도 경기침체에 아랑곳 않고 재정․통화긴축과 물가통제를 시행했었다. 전두환은 긴축 등으로 신군부에 대한 국민적 불만이 증가하자 광주학살을 본보기로 여론을 통제하기도 했다. 자국민을 학살하면서까지 미국의 이런 글로벌 전략 변화를 충실히 따라던 것이 전두환 정권이었다.

    1990년대에 이르러 우리나라는 더욱 빠르고 깊게 금융세계화에 참여했다. 1990년 소련 동구권이 몰락하면서, 미국이 냉전 동맹으로서 한국 자본주의를 보호하는 것보다, 한국이 금융세계화에 얼마나 참여하는지에 관심이 컸기 때문이었다. 노태우 정부는 1990년에 환율변동규제를 대폭 줄였고, 외국은행의 국내지점 설립을 허가했으며, 1991년에는 외국인직접투자 허가제를 신고제로 바꿨고, 1992년에는 외환거래를 원칙규제에서 예외규제로 대폭 자유화했다.

    특히 노태우 정권은 금융 세계화 참여의 의지를 미국에 보여주기 위해 1992년 1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추진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OECD 가입은 ‘자본이동자유화규약’을 체결하는 것이 핵심이었는데, 규약은 외국인의 국내 자본시장 투자 자유와 국내 기업의 해외 자본시장 투자 자유에 관한 수십 개의 조항으로 되어 있었다. 김영삼 정부는 1996년에 OECD 가입절차를 끝내겠다고 밝혔고, 4년 간 외환시장, 자본시장, 외국인직접투자, 외국금융기관의 설립, 국내 금융기관의 해외투자, 농업 개방, 서비스시장 개방 등을 추진했다.

    1997년 국가 부도 사태는 이런 금융개방, 자유화 조치와 한국 자본주의의 위가가 시너지 효과를 낸 결과였다. 지면 제약 상 여기서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겠지만 우리나라 경제는 1989년 이후 위기를 겪고 있었고, 기업들의 수익률도 빠르게 저하 중이었다. 경기변동 탓이 아니라 기술 제약에 따른 이윤율 저하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금융 개방과 자유화 조치들이 이뤄졌다. 재벌들은 해외금융기관의 자본을 이전보다 자유롭게 사용해 이윤율 저하 속에서도 투자를 줄이지 않을 수 있었다. 정부 차관을 얻어 쓰며 정경유착 대마불사 경영을 해온 재벌들의 관행이 1990년대에도 이어진 것이었다. 차이가 있다면 이번에는 재벌이 얻어 쓴 자금이 정부가 미국에서 얻어온 반공 차관이 아니라 금융기관들이 해외에서 들여온 외자와 해외차입금이었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노태우와 김영삼은 경기 부양 목적으로 정부까지 나서 해외자본을 이용해 대규모 사회간접자본 투자를 늘렸다. 이윤율 하락에 가속도가 붙었고, 이윤율이 낮아질수록 기업들의 해외차입은 더 늘었다. 1997년이 되면, 이윤율이 더 낮고, 차입금 비중이 높은 재벌들부터 부도가 났다. 1월에 한보, 3월에 삼미, 4월에 진로, 5월에 대농, 7월에 기아, 10월에 쌍방울, 11월에 해태, 뉴코아그룹이 부도났다. 재벌들이 쓰러지는 가운데 금융시장에서는 외국자본이 빠지며 원화 통화가치가 폭락했고, 해외 차입금의 실질이자가 폭등했다. 외환보유고가 바닥났다. 그리고 1997년 11월 말 정부가 IMF 구제금융 신청에 관한 대국민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월스트리트가 금융세계화에 저항하던 개발도상국들을 백기투항하게 만들었던 패턴이 그대로 우리나라에도 나타난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남겨진 질문 “대안세계화 전략이 있는가?”

    냉정하게 이야기하면 유럽 선진국이나 아시아와 남미의 개발도상국 그 누구도 1990년대의 미국 주도 금융세계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심지어 2007년 세계금융위기로 금융세계화가 위기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누구도 금융 주도 세계화에서 이탈할 전략을 내놓고 있지 못하다.

    오늘날 우리가 1997년으로 돌아가도 별 다른 수가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정리해고제에 끝까지 저항하면서 총파업을 하려면, IMF 구제금융이 아닌 그 무엇에 대해 대안이 있었어야 할 것이었다. 그래야 조합원들이 총파업을 결의할 수 있고, 또 그래야 국민들도 지지를 할 것이었다. 1990년대 해체된 소련사회주의는 사실상 당대 좌파들의 대안을 봉쇄했다. 러시아와 동유럽 국가들은 시장근본주의 경제학자들이 봐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신자유주의 개혁을 가속화하고 있었다. 남미와 유럽에서 좌파 정당들은 ‘제3의 길’이란 이름으로 보수 정당들보다 더 미국 주도 금융세계화에 친화적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한 마디로 1997년 당시 미국의 금융세계화 바깥은 진공 상태였었다. ‘사회적 합의주의’를 분쇄한다고 해도 그 진공 상태에 새로운 세계가 채워질 리 없었다. 그런데 진공 상태로 나가면 모두 죽는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제대로 된 노사정 협약이 대안이 될 수 있었단 말은 아니다. 1기 노사정위원회는 이미 그 시작부터 IMF에 대한 백기투항 문서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2기 노사정위는 운영은 됐지만 정부가 한 일을 보면 한 마디로 노동계에 대한 기만에 불과했다. 노무현 정부에서도 이런 일은 반복됐다. 민주노총이 노사정위를 보이콧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노사정 협약이 아이디어나 선의가 아닌 계급적 힘 관계에 기초하기 때문이었다. 사회적합의주의를 분쇄하자는 주장만큼이나 사회협약정치를 대안으로 여기는 주장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무엇을 향해 달려가자는 관념론에 불과했다.

    우리는 다음 연재에서 이를 다뤄볼 것이다.

    필자소개
    사회진보연대 부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원 jwhan7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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