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지 잘못 찾은 근본주의
        2006년 03월 14일 05:13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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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일 아침 조선일보의 칼럼 하나가 눈길을 끈다.

    이선민 문화부차장이 쓴 “백낙청과 최장집”이라는 데스크칼럼이다.

    이 차장은 칼럼에서 과거에 만들어진 이론과 정책으로 21세기의 문제들에 대해 효과적이고 설득력 있는 ‘해법’을 제시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론진영의 새길 찾기가 좌우파 모두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각자 내부의 입장 차이들이 드러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차장은 차이의 부각을 ‘노선 투쟁’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 차장은 이어서 ‘좌파’ 내부의 ‘노선투쟁’을 길게 정리했다. 짧게 요약하면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민족’과 ‘통일’을 중심에 놓는 근본주의적 민족주의를, 최장집 고려대 교수는 ‘민중’과 ‘민주’를 중심에 놓은 근본주의적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 상호 비판하고 있으며, 이러한 논쟁은 이후 실명비판까지 불사하는 본격적인 단계로 발전한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 차장은 이런 논쟁 구도가 ‘80년대 운동권 내부의 NL-PD 대립을 재연하는 것은 아니’라는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였다.

    본격적인 논쟁으로 발전 가능

    노선투쟁이라고 이름 붙일 정도는 아니지만 최근 진보학계에 이 차장이 정리한 것과 같은 논쟁 구도가 형성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본격적인 논쟁으로 발전할 가능성에 대한 언급도 성급한 해석은 아니다.

    그러나 이 차장이 백낙청 교수의 입장을 근본주의적 민족주의로 최장집 교수의 입장을 근본주의적 민주주의로 정의하는 것에는 고개가 갸웃해진다. 우선 두 지식인의 입론이 정말 충분하게 근본주의적이냐는 것과 함께 이 차장이 사용하는 근본주의의 잣대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최장집 교수의 경우 이선민 차장이 정리했듯이 “NLPD의 혁명적 급진성을 제거하고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이념으로 재구성하자”는 것이 입론의 뼈대다. 이것은 근본주의적이라기 보다는 탈근본주의적인 시각이다. 이는 백낙청 교수도 마찬가지다. 그가 오래전부터 주장한 ‘동아시아담론-분단체제론’ 뿐만 아니라 최근 정리한 ‘통일문학론’에 대해서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실천적 대안이 되기는 부족하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최장집 교수의 왼편에도 여전히 사회운동의 혁명성을 어떻게 재구성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집단이 있다. 근본주의라는 정의는 이들에게 반납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근본주의라는 엉뚱한 혐의

    하지만 이 차장이 사용하는 근본주의의 정의는 엉뚱하게도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태도로 결정된다. 이 차장은 두 교수의 입론이 모두 비현실적이고 반역사적인 이유가 “대한민국의 건국과 산업화의 성과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그 의미를 애써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백낙청 교수는 분단 현실의 극복 없이 그 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실천은 반쪽짜리 일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고 최장집 교수는 과거의 오류를 정정하지 못한 속에서 이벤트로 진행된 민주화는 결정적 한계가 있다는 입장이다. 어느 쪽도 이승만, 박정희와의 역사적 화해를 결심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다만 두 교수 모두 낡은 이론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변화된 시대의 해법을 모색하려 한다는 점에서 새로움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가운데 대한민국이 이룩한 성공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근본주의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이 차장의 충고는 번지수를 한참 잘못 찾은 것이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앞으로 전개될 논쟁에서 우위를 점할 것인지 훈수를 두기 전에 조선일보가 98년 최장집 교수에 대해 벌였던 사상검증이라는 이름의 마녀사냥에 대해 자기반성과 사과부터 하는 것이 두교수의 논전을 바라보는 조선일보의 올바른 관전태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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