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구화시대,
    ‘다극화’의 진보적 성격
    국제적 차원의 주요모순, 남북문제
        2017년 11월 14일 11:26 오전

    Print Friendly

    지난 글(링크)에서 필자는 중미관계(G2)가 갖는 두 가지 성격 중의 한 측면인 ‘신 국제질서 수립을 둘러싼 두 집단 간의 투쟁’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여기서 지구화시대의 신 국제질서 수립을 둘러싸고 두 개 노선 및 두 세력 간의 투쟁이 존재하며, 이 경우 미국은 단일한 패권주의적 지구질서를 구축하려는 세력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으며, 이에 대해 중국은 이 같은 패권적 질서에 반대하면서, 대신 평등과 공정을 지향하는 신 민주적 국제질서 수립을 추구하는 세력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이들의 투쟁은 ‘단극세력’과 ‘다극세력’ 간의 대립으로 비쳐지기도 하는데, 이번 글에선 주로 이 같은 신 민주적 국제질서와 관련된 투쟁이 왜 한국의 노동운동과 진보진영에 있어 중요한지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한다.

    국제 역량관계를 고려할 때 단극이냐 다극이냐는 유용한 개념이 된다. 탈냉전 후 국제질서가 아직 과도적인 양상을 보여주는 것은, 다른 각도에서 보면 국제 역관계가 단극이냐 다극이냐에 있어 아직 그 방향을 확실히 결정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특히 2008년 하반기 세계 금융위기가 폭발한 이래 일련의 사태의 진행은, ‘다극화’의 추세가 점차 강화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그렇지만 국제체계가 단극체계인가 다극체계인가 하는 것만 가지고서 그 진보성이 저절로 규정되는 것은 아니다. 진보성 여부에 있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실제 국제사회에 있어 어떠한 긍정적 변화를 가져오는지와 관련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오늘날 지구화시대에 실현될 다극화는 과거에 존재했던 다극화와는 질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1. ‘국제관계 민주화’의 구현

    과거의 다극화와는 달리 현 시기 다극화는 먼저 그 추진 주체 면에 있어 크게 다른 점이 눈에 띤다. 과거의 다극화가 지역적 혹은 세계적 차원의 패권을 다투는 소수의 강대국들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고 한다면, 지금의 다극화는 이들 외에 주로 개발도상국에 속한 신흥 국가들이 대거 부상함으로써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큰 특징이 있다.

    세계 역사를 보면, 국제체계에 있어 다극화는 과거에 이미 몇 차례 존재했었다. 가깝게는 19세기 후반~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존재했던 영국‧프랑스‧독일‧미국‧러시아의 5강 체제가 그것이며, 또 조금 멀게는 나폴레옹전쟁 직후 영국‧프랑스‧러시아‧오스트리아‧프로이센 등의 5강 체제가 존재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들 다극체제는 모두 소수 강대국들이 지역 내지는 세계적 차원에서 ‘세력균형’을 통해 기존의 ‘세력분할’을 지키기 위해 형성한 것이었으며, 이 때문에 국제관계에 있어 볼 때 이는 소수집단의 독점적 특권의 성립과 유지에 기여하는 의미를 지녔다.

    당대의 다극화, 즉 냉전 종식과 함께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지금의 다극화는 그 의미에 있어 이와는 완전히 다르다. 냉전시기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양대 진영 간의 이데올로기 대립에 의해 그동안 뒷전에 밀려나 있던 ‘경제문제’가 냉전의 종식과 함께 세계 각국의 제일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이와 함께 그간 가려져왔던 남북 간의 경제적 불평등 문제도 자연스럽게 수면 위에 부상하면서, 남북문제는 이제 동서간의 이데올로기 대립을 대체하는 국제사회의 주요모순이 되었다.

    현재의 다극화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추진되는 것임을 우선 명심할 필요가 있다. 그간 개발도상국 진영에 속한 신흥 공업국들이 속속 부상함으로써, 지금까지 북부 국가(즉 서구 선진자본주의국가)가 세계 정치·경제 영역에서 구축한 독점체제를 뒤흔들면서 전반적으로 남북 간의 힘의 균형이 재조정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개발도상국 진영은 현재 지구상의 광범위한 국가군과 지역을 포괄한다. 소련과 동구권의 변동 전에 전 세계에는 약 191개 국가와 지역이 있었는데, 그중 개발도상국은 약 163개 정도이었다. 소련과 동구권의 해체에 따라 소위 ‘전환국가’인 동구권국가 대부분은 제2세계에서 제3세계(즉 개발도상국가)로 하향 이동하였는데, 이렇게 하여 개발도상국가와 지역은 180개 정도로 증가하였으며 인구와 토지면적도 각기 4억 명과 2500만 제곱킬로미터가 더 늘어나게 되었다.

    이렇듯 개발도상국은 그 국가 수와 인구 및 토지면적 등에 있어 모두 절대적 비중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간 국제사회에서는 이에 걸맞는 지위와 권리를 인정받지 못한 채 소외를 당해 왔다. 이 때문에 소수의 서구 선진국이 주도하고 그들에게만 유리한 국제질서가 아니라, 이들 광범위한 다수 국가들이 적극 참여하고 또 이들의 이해가 반영되는 새로운 국제질서를 요구한다는 측면에서 볼 때, 다극화는 민주적이며 진보적이라 할 수 있다.

    왼쪽부터 러시아 푸틴, 중국 시진핑, 인도 모디 총리의 모습

    여기서 브릭스와 전체 개발도상국 진영과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먼저 세계 정치와 경제에 있어 브릭스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정치적 측면에서 보면 러시아와 중국은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이며, 브라질과 인도와 남아공화국은 비상임이사국이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이들 5개국의 GDP 총액은 대략 세계 총액의 약 20%를 차지하며, 외환보유고의 75%를 차지한다. 또 이들의 세계경제성장에 대한 공헌도는 종종 50%를 넘어선다. 여기에 전 세계 영토면적의 거의 30%, 세계총인구의 43%인 점까지 감안한다면 브릭스가 오늘날 국제무대에 있어 상당한 대표성과 영향력을 가진 하나의 ‘극’을 형성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중 남아공화국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나머지 4개국은 각기 단독적으로도 다극화 체제의 한 ‘극’을 형성할 수 있는 충분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여기서 개별국가의 측면보다는 ‘브릭스’라고 하는 집단적 측면을 중시하는 까닭은, 지난 번 글에서도 밝혔듯이 이들이 그 같은 형식을 갖고 앞으로 구축될 신 국제질서의 건설을 위한 보조를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들의 이 같은 공동전선의 형성은 브릭스 내부 성원 간의 공통성 때문에 가능한데, 지금까지 그들은 모두 서구 선진국들이 주도하는 국제 분업체계 속에서 주로 원료와 값싼 노동력의 공급지로 역할하면서 불리한 위치에 처해왔다.

    그리고 그들 중 상당부분은 IMF-세계은행으로 대변되는 현 국제통화체제 속에서 주기적인 외환위기와 채무위기 등의 금융 불안을 겪어야 했다. 이 때문에 평소 충분한 외환비축을 쌓기 위해 수출주도형 경제를 유지해야 하고, 이를 위해 자국의 환경파괴와 자원낭비를 대가로 선진국 소비자들을 만족시켜야 하는 상황을 겪었다.

    이처럼 과거 냉전체제 하에서 형성되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낡은 국제질서와 국제 분업으로부터 불공정한 대우와 억압을 받고 있기 때문에, 이들은 자신들의 앞으로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이렇듯 불리한 체제가 필히 개편되어야 한다는데 공감하고 있다. 이로부터 이들이 추구하는 신 국제질서는 필연적으로 기존의 그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으며, 국제질서의 민주화, 독점과 패권을 부정하는 평등과 호혜원칙을 강하게 담을 수밖에 없다.

    개발도상국 진영의 강력한 부상 하에 추동되고 있는 현 다극화의 진보성은 이들이 공식 요구하는 ‘새로운 민주적 국제질서’ 수립과 관련한 내용에서도 확인된다. 2002년 5월 10일 중국의 국가주석 장쩌민은 아시아개발은행이사회 제35차 연례회의에서 ‘국제관계의 민주화’에 대해 발언하면서, “국제관계의 민주화는 바로 각국의 일은 각국 인민이 주인이 되며, 국제적인 일은 각국이 평등한 협상을 통해 처리하고, 전 세계적인 도전에 대해 각국은 협력해서 대처한다.”라고 천명하였다.(인민일보,2002년5월11일)

    다극화에 기반한 새로운 민주적 국제질서 개념에 대해 좀 더 포괄적이고 전면적인 규정을 한 공식적인 외교문서로는, 현재 브릭스를 이끌고 있는 양대 국가인 중국과 러시아 양국 정상이 일찍이 1997년에 공식 발표한 합의문인 <중화인민공화국과 러시아연방의 세계 다극화와 신 국제질서 수립에 관한 공동성명>이 있다. 조금 길긴 하지만 이들이 주장하는 ‘신 국제질서’ 개념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그 주요 내용을 아래에 인용하도록 한다.

    ―쌍방은 상호 주권과 영토 완전성, 상호불가침, 상호내정 불간섭, 호혜평등, 평화공존 및 기타 공인된 국제법 원칙이 마땅히 국가 간 관계를 처리하는 기본준칙이자 국제신질서 수립의 기초임을 주장한다. 각국은 본국의 상황에 근거해서 자주적이고 독립적으로 그 발전방식을 선택할 권리가 있으며 타국은 이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사회제도, 이데올로기, 가치관의 차이는 마땅히 정상적인 국가관계를 발전시키는 데 있어 장애가 되지 말아야 한다. 각국은 그 대소와 강약 그리고 빈부를 불문하고 모두 국제사회의 평등한 성원이며, 어떠한 국가라도 패권을 도모하거나 강권정치를 추진하며 국제사무를 독점하려 해서는 안 된다. 경제 관계에 있어 차별정책을 배제하며, 호혜평등의 기초위에서 경제무역과 과학기술 및 인적‧문화적 교류와 협력을 강화 확대하며, 공동발전과 번영을 촉진한다.

    —쌍방은 유엔과 안보리의 역할을 응당 강화해야 한다고 보며, 유엔의 세계평화의 옹호와 안보 방면에 있어서의 노력에 대해 적극적으로 긍정하는데 의견이 일치한다. 유엔은 주권국가로 구성된 가장 보편적이고 권위 있는 조직이며, 그 국제무대에 있어서의 지위와 역할은 다른 어떠한 국제조직으로도 대체될 수 없다고 여기며, 그것은 ‘국제신질서’를 건립하고 옹호하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확신한다. 유엔의 평화유지를 위한 노력의 중점은 마땅히 충돌의 발생과 만연의 방지에 두어져야 한다. 평화유지행동은 유엔안보리의 결정에 의거해서만 이루어 져야 하며, 또한 필히 당사국의 동의를 구하여야 하고 또 엄격하게 안보리의 권한부여와 그 감독 하에서만 실시하여야 한다.

    —쌍방은 광범위한 개발도상국과 비동맹운동은 세계의 다극화를 추진하며 ‘국제신질서’를 건립하는 중요한 역량임을 강조한다. 개발도상국의 단결은 자조의식을 강화하며, 국제정치에 있어 역할을 증대시키고 세계경제에 있어 비중을 강화하며, 그 부상은 국제신질서의 건설의 역사적 진척을 힘 있게 추동한다. 그들은 응당 미래의 국제신질서에 있어 자신의 마땅한 지위를 차지해야 하며, 평등하고 어떠한 차별도 받지 않고 국제 업무에 참여하여야 한다.(이 성명은 1997년 4월 24일 인민일보에 게재된 것임)

    이상의 성명은 우리가 지금까지 접할 수 있는 작금의 다극화에 기초한 신 국제질서의 내용과 관련된 가장 완성되고 권위 있는 공식적인 국제문헌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중국과 러시아 양국의 세계 다극화에 대한 기본인식과 주장이 구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부분에 있어 전 세계 민중 특히 개발도상국 민중들의 보편적인 요구와 새로운 국제질서에 대한 기대를 반영하고 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 모습

    2. 제국주의 패권질서 ‘대립물’로서의 다극화

    이렇듯 그 성격에 있어 보면 현 시기 다극화는 제국주의 패권질서의 대립물로서 그 분명한 존재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국제질서에 있어 ‘독점’과 ‘패권’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며, 이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현대제국주의의 종식에 크게 기여한다.

    다극화에 대한 이 같은 성격규정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현 시기 패권주의적 단극체제의 성립을 부정하는 주요 역량이 다름 아닌 그 일차적 피해자인 개발도상국 스스로부터 생겨나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이점이 과거에 존재했던 모든 다극체제와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과거의 그것은 모두 소수 강대국들의 지역 내지 세계적 차원에서 세력분할을 위한 것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국제질서에 있어 ‘독점’의 폐지가 아니라 그것의 존속 혹은 다른 독점으로의 대체를 목적으로 하였다.

    이러한 이유에서 소수 강대국들이 각축하던 과거와 같은 다극체제로의 복귀만 가지고서는, 결코 단일패권으로 상징되는 오늘날의 현대제국주의의 대립물이 될 수 없다. 오직 호혜평등과 평화공존에 입각한 새로운 차원의 다극화만이 그 진보적 역할을 다 할 수 있다. 여기서 ‘낡은 다극화’인가 혹은 새로운 ‘진보적 다극화’인가의 성격을 규정짓는데 있어 그 추진 주체가 누구인지는 매우 관건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론 개발도상국 진영 외에도 현재의 다극화를 추진하는 세력에는 미국을 제외한 다른 서구 자본주의국가들 역시 그 주체의 하나로 포함될 수 있다. 그러나 서유럽 국가와 일본 등 미국의 전통적인 동맹국들의 경우, 이들은 ‘이중성’을 갖고 있음에 주의하여야 한다. 이들은 과거 자신들을 이념적으로 굳게 결속시켰던 냉전체제의 종식과 그리고 지구화가 급속히 전개되는 새로운 정세 하에서, 한편에선 경제와 정치의 주도권을 놓고 미국의 패권주의에 저항하고 경쟁하는 관계를 형성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선 이들은 ‘국제독점자본’으로서의 이해를 같이 한다. 왜냐하면 이들 국가 내에서 국제독점자본은 마찬가지로 통치적 지위를 차지하며 전체 자본 분파를 대표하는 주도적인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국제독점자본’의 공통이익에 입각해 볼 때 현재 미국이 주도하는 지구적 통일시장의 수립은, 설령 그것이 패권주의적 방식이라 해도 완전히 자신들과 적대적인 이해관계만을 갖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에서 이들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여전히 타협할 수 있는 여지를 많이 갖고 있다. 이 같은 자신들의 이중성 때문에 이들은 미국의 패권역량이 매우 강할 때는 그 하위동반자로서의 지위를 기꺼이 감수한다. 그러나 세계의 다극화추세가 더욱 강화된다면 이들도 미국의 영향권 하에서 벗어나서 당연히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한 경쟁세력으로 전환하게 될 것이며, 다극화를 지지하고 강화시키는 요소로 될 수 있다. 유럽연합의 성립과 유로의 탄생, 그리고 최근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개발도상국들이 주도하는 아시아투자은행에 이들이 적극 참여한 것은 그 같은 경향성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들은 어쨌든 현 시점에선 미국의 단일패권에 대항하는 다극화의 핵심세력이 될 수는 없다. 현대제국주의를 부정하는 대립물은 그것을 구성하는 내부의 동맹국에서 찾아지기 보다는, 그 외부요소인 개발도상국 진영에서 찾아지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유럽연합과 일본은 미국이 이끄는 단극체제 하의 하위 파트너가 되거나 또는 다극화의 추종적인 요소가 될 수는 있어도, 그 자신이 미국을 대신하여 새로운 패권주의 세력이 되거나 혹은 단극경향을 부정하는 다극화의 결정적인 역량은 되지 못한다.

    개발도상국 진영의 부상을 주요한 추동력으로 삼아 진행 중인 지금 시기의 다극화에 있어 사회주의국가인 중국의 역할은 매우 특별하다. 중국은 사실상 브릭스 가운데서도 그 핵심역량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은 브릭스 내에서 가장 큰 경제규모를 갖고 있으며 또한 가장 빠른 경제성장률을 유지하고 있다. 또 브릭스 내부 상호 간의 경제관계에 있어서도 중국은 그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데, 사실상 이들 국가군의 최근의 빠른 경제성장은 상당 부분 중국의 경제발전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이 때문에 ‘개발도상국 진영이 추동하는 다극화’라는 표현은 사실상 ‘개발도상국과 사회주의국가 중국의 연합에 의해 추동되는 다극화’라는 표현으로 바뀌는 것이 더욱 적합하다.

    그간의 실제 역사적 행보를 보면 우리는 중국이 개발도상국 진영 내에서도 가장 일관되고 철저하게 반독점과 반패권주의 입장을 분명히 해온 국가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물론 역사적 경험이 보여주듯, 사회주의국가라고 해서 무조건 반(反)패권주의와 반독점 세력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역사는 동시에 사회주의국가가 만약 자본주의 열강처럼 스스로 패권국가의 길을 걷는다면 과거 소련처럼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 같은 방식으로는 자본주의 국가들이 다수를 형성하는 국제사회에 있어 영원한 ‘소수자’가 될 수밖에 없으며, 이 때문에 오히려 제국주의세력으로 하여금 다시금 국제적 차원의 이데올로기 대립을 조성하고 이를 통해 대 사회주의권에 대한 포위망을 형성하는데 있어 좋은 핑계거리만을 제공하게 된다.

    현실의 사회주의국가가 세계 자본주의국가들의 포위망으로부터 벗어나 독자적인 자기 발전의 길을 갈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전체 자본주의 진영 ‘단결의 핵’인 현대제국주의 세력을 무력화시켜야만 한다. 그 관건은 다름 아닌 후자가 주도하는 패권적 국제질서를 ‘민주적’인 것으로 개조하는 것이다. 즉 위의 중·러 양국 정상 간의 <성명>에서도 언급했듯이, 각국이 사회제도와 이데올로기 및 가치관의 차이와 상관없이 자신의 발전방식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 받을 수 있는 신 국제질서가 구축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지금 시기 현대제국주의의 가장 큰 경계와 견제 대상인 사회주의 중국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도 현대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에 있어 그 한가운데에 설 수밖에 없다. 또 실제로 그간 중국은 일관되게 국제질서에 있어 일체의 ‘독점’과 ‘패권’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견지해왔다.

    중국의 이러한 일관된 태도는 객관적으로 볼 때 현대제국주의의 존재로 인해 피해를 입고 있는 대부분의 다른 개발도상국들의 이해를 가장 잘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자의든 타의든 간에 중국은, 개발도상국 진영과의 연대를 통해 현대제국주의의 지배로부터 광범위한 이들 국가들을 해방시키는 것을 자신의 숙명적 사명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비로소 그 자신 또한 미국과 서구 금융자본의 견제와 봉쇄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자기발전의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중국의 사회성격을 올바로 판단하는 일은 당대의 국제정세를 올바로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긴요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중국의 사회성격과 관련한 논의는 다음 회에 별도로 다룬다.)

    3. 현 시기 다극화의 역사적 의의

    다극화에 기초한 신 국제질서가 비록 수립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여러 가지 점에서 한계를 갖기 때문에 결코 인류의 이상적인 최종목표가 될 수는 없다. 다극화가 비록 독점과 패권을 부정하고 국제질서에 있어 민주적 원칙을 옹호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지구적 차원에서의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다극화체제 하에서도 자본주의의 각종 모순들은 계속해서 존재하게 될 것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더 심각해질 수도 있다. 예컨대, 개발도상국들의 산업화가 기존에 비해 전반적으로 더욱 촉진됨으로 인해 전 세계적인 과잉생산과 무정부적 생산이 더 심해질 수 있으며, 또 각국 간의 빈부격차도 더 심각해 질 수 있다. 자본주의 ‘불균등발전법칙’의 작동으로 인해 과거 개발도상국진영에 속했던 국가 간의 발전 속도가 달라질 수 있으며, 그중 일부는 선진국으로 진입하고 한발 더 나아가 패권국가로의 야심을 품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개발도상국 진영의 단합은 더 이상 어렵게 될 것이다.

    다극화는 이러한 모든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문제들을 완전히 근절하기 위해선 맑스가 일찍이 <공산당선언>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자본주의적 지구화가 아닌 완전히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방식의 지구화가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러나 지금 시기 그 같은 국제질서의 수립은 직접적인 실현목표가 될 수는 없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이는 심각한 좌편향적인 오류를 범하는 것이 될 것이다. 때문에 현 시기 국제적 차원에서의 주요모순은 현대제국주의(내지는 패권주의)와 개발도상국 간의 모순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으며, 국제 진보역량은 일차적으로 국제관계에 있어 ‘민주적 신 국제질서’의 실현과 현대제국주의(패권주의)를 종식시키는 데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이 같은 전략은 주요하게는 객관적인 국제역량관계를 고려한 때문이다. 마치 일국적 차원에서 ‘민주혁명’ 혹은 ‘민족혁명’을 통해 궁극적 해방을 위한 유리한 길을 여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제적 차원에서도 이 같은 ‘민주적 신 국제질서’ 수립이라는 중간 단계를 설정함으로써 국제적 차원의 대립구도가 진보세력에게 보다 유리하게 설정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 같은 전략은 아직 자본주의 발전수준이 미숙한 개발도상국들이 지구상에 광범하게 존재하는 지금의 객관 현실 상황에도 부합한다. 이들은 국내적으로 자본주의의 발달로 고통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자본주의 발전의 미성숙으로부터 받는 고통이 더 크다. 그리고 이 같은 전략은 과거 냉전체제 하에서처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양대 진영 간의 직접적인 이데올로기적 대립으로부터 초래되는 국제정세의 경직화를 피할 수 있게 해준다.

    물론 위의 ‘민주적 신 국제질서’ 수립을 위한 전략은 국제적 차원의 주요모순과 관련되며 또 국제적 차원에서 의의를 갖는 전략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일국적 차원에서 본다면 각국의 상황에 따라 그 내부모순은 각기 달라질 것이며, 이미 공업화를 이룩하고 자본주의발전이 상당히 진척된 나라의 경우 그 주요모순은 직접적으로 노자간의 계급모순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점은 위의 국제적 차원의 주요모순 이론과는 상충되지 않는다.

    다극화와 민주적 신 국제질서 수립의 전략을 통해 현대제국주의는 국제 진보세력의 공통의 적이 되며, 이 역사의 반동역량이 무너지는 순간 인류 전체의 궁극적 해방을 위한 유리한 국면이 세계적 차원에서 조성될 수 있다.

    필자소개
    과거 구로공단에서 노동운동을 했으며 사노맹 사건으로 3년간 감옥 생활을 했다. 2001년부터 2017년까지 중국 사회를 연구할 목적으로 16년간 중국 유학생활을 보냈다. 중국인민대학과 상해재경대학에서 각각 금융(학사)과 재정(석사)을 전공했고 최종적으로 북경대 맑스주의학원에서 레닌의 정치신문사상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17년 8월 귀국하여 울산에 정착해 현재 울산 평등사회노동교육원에서 교육강사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