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강점기 떠오르는 신흥계층 거주지
    [근현대 동아시아 도시이야기] 혜화동과 대학로 일대
        2017년 11월 14일 10:50 오전

    Print Friendly

    1392년 조선 건국 후, 서울(당시 한양)은 새로운 국가의 수도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수도는 변함없이 서울이다. 조선시대 한양, 일제강점기 경성, 대한민국 서울. 수도의 이름도 변하고, 그 영역도 변해왔지만, 그대로 유지된 공간이 있다. 도성으로 둘러싸여 있었던 조선시대 한양의 공간이다.

    성곽을 기준으로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은 점차 그 권역이 확대되어 성곽 밖 성저십리 지역을 두었고, 일제강점기 경성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권역이 축소되었으나 여전히 서울성곽 안의 공간은 수도 공간으로 지속되었다. 그리고 지금의 서울도 그 중심에는 서울성곽, 즉 한양도성 안의 공간이 있다. 지난 500여 년의 역사를 모두 담고 있는 한양도성 안, 그중에서 오늘 살펴볼 공간은 지하철 4호선 혜화역 인근, 대학로로 통칭되는 혜화동 일대이다.

    사실 서울에는 역사문화자원으로 남아있는 오래된 건물들이 많지 않다. 그래서인지 이전에 이 공간이 어떠한 공간이었는지, 어떤 의미를 지닌 곳이었는지 알지 못하고 지나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마 혜화동 일대도 그럴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혜화동·동숭동·명륜동·연건동 이 부근은 공연예술문화 산업의 집적지로 특화된 곳이다. 그러나 지금의 모습은 이곳에 자리하고 있던 서울대가 1979년 관악산 아래로 캠퍼스를 이전한 후, 문리대 부지에 마로니에 공원을 조성, 1981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서울대 본부 건물에 자리하면서 각종 문화시설들이 들어섰다. 공연예술문화로는 1970년대 이전의 혜화동 모습을 설명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전의 혜화동 일대 모습은 어떠했을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이곳은 마을을 쉽게 형성할 수 있었던 지역이 아니었다. 임진왜란 이후 메인 궁궐이 된 창덕궁이 옆에 있어, 지금의 서울대병원 자리인 언덕에 오르거나, 낙산에 오르면 궁궐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예외적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던 곳은 성균관 인근의 반촌(泮村), 즉 성균관 노비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던 공간이었다(현재의 명륜동 일대). 그리고 또 한 곳, 정조가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사당(명칭: 경모궁(景慕宮))을 지금의 서울대병원 자리에 짓고 주변의 황량함을 개선하기 위해 이곳에 거주할 사람들을 모집했다(현재의 연건동 일대).

    이곳을 제외한 다른 곳은 민가 형성이 드물었다. 이러한 이유로 이 지역은 한양도성 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개발되지 않은 토지가 상당했다. 이미 도성 밖 성저십리까지 사람들의 거주가 몰리던 상황에서 대한제국 시기 권한을 증대시켜가던 일본은 도심 개발과 교외지역 개발을 진행해갔다.

    그림1 백동수도원과 혜화동 일대
    출처 : Norbert Weber(1927),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베네딕도미디어
    비고 : 혜화동성당 자리에는 1909년-1927년 백동수도원이 자리해있었다.

    1900년대 일본의 압력으로 이곳에 입지하게 된 대형기관은 공업전습소와 대한의원이다. 현재 한국방송통신대학 본관으로 쓰이고 있는 건물이 바로, 공업전습소의 일부였다. 실업교육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높아짐에 따라 1907년 공업전습소가 설립되었다. 1만 여 평의 부지에 건설된 공업전습소는 목공과 토목을 비롯하여 도기와 염직 등등 여러 실습 위주의 교육을 진행하였고, 학생들은 실습 수당까지 받으며 일본의 조선 공업화 정책의 일환으로 운영되었다.

    같은 해, 대한의원도 설립되었다. 대한의원은 병원과 의학교의 기능을 복합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대규모 병원이었다. 위치는 현재의 연건동 서울대병원 자리로, 당시 영희전(永禧殿,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이었으나, 1899년 종묘로 사도세자의 신위를 옮겨 그 기능을 잃은 후 변하게 된 명칭) 남쪽의 마등산(馬凳山)과 그 인근의 민가를 매입한 약 49,000여 평의 부지이다. 현재 서울대병원이 약간 언덕인 것을 감안하면, 그 곳이 당시 마등산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대한의원은 진료비로 연간 예산의 일부를 충당해야 했기 때문에 그 진료비가 상당한 금액이었다. 그래서인지, 대한의원을 이용하는 사람은 반 이상이 일본인이었고, 이들의 이용률은 경성에 거주하는 일본인 총 인구 수의 20%가 넘는 비율이었다. 한편, 경성에 거주하는 조선인 인구 수 대비 대한의원을 이용하는 조선인의 수는 2-3%에 불과했다.

    1910년대, 한일합병조약 체결 후 일본의 조선 침략이 가속화되면서, 총독부는 이전에 설립한 기관들을 격상시키며 확장해갔다. 공업전습소는 1912년 분석과 시험연구를 할 수 있는 중앙시험소를 설립하여 공업기술 발전을 보완하고자 했고, 1916년 관립학교로 승격해 경성 공업전문학교가 되었다. 대한의원 내에 있던 의학강습소 또한 1916년 관립학교인 경성 의학전문학교로 승격하여, 혜화동 일대에는 당시 총 3개의 관립학교 중 2개의 관립학교가 자리한 셈이 되었다. 나머지 하나는 광화문통에 있는 전수학교로, 이것은 관립학교로 승격해 경성 법률전문학교로 개칭되었다.

    대한의원은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조선총독부의원으로 개칭되면서 규모가 더욱 확장되었다. 본래 사당 자리였기 때문에 토지를 매수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고, 한적하며 자연 풍광이 우수한 자연친화적 병원을 조성할 수 있었다.

    “명치43년(1910년) … 의원은 점차 확장 증축을 계획한다. … 영희전 부지 전부(약 4,000평)을 받았다. … 마등산 꼭대기 일대 미관을 이루어갔다. … 뒤뜰의 녹수(綠樹)가 울창해 회춘원 내에는 … 소위 ‘세너토리엄(サナトリ-ウム, 요양원)’ 식을 본받아 이 병동을 희망하는 조선귀족 환자가 적지 않았다.”(1)

    총독부의원의 역사를 기록한 당시 사료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확대되어 증축해나간 이후 병원은 일본인을 비롯하여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조선인들이 이용하고 싶은 병원이 되었다.

    그림2 공업전습소(왼쪽). 출처: 서울공고백년사 편찬위원회, 『서울공고백년사』, 1999, 34쪽
    그림3 조선총독부의원 전경. 출처: 조선총독부원, 『조선총독부구제기관』, 1913

    이러한 대규모 거점 시설들이 지역에 자리함에 따라 이곳을 왕래하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도로 정비와 대중교통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진행된 도로 정비는 1915년 경복궁에서 개최되는 조선물산공진회를 앞두고 8개의 노선이 완공되었다. 이 중 혜화동과 명륜동 일대 토지를 수용하여 창경궁 식물원에서 총독부의원을 지나 남쪽의 본정(현재의 충무로)과 대화정(현재의 필동)까지 이르는 11호선, 일명 의원통(醫院通)이 개수되었다.

    이러한 지역의 변화는 1920년대 최고조에 달했다. 바로, 경성제국대학의 설립 효과였다. 1923년 청량리에 경성제대 예과 캠퍼스를 설립한 후, 6-7만 평이 필요한 본과 캠퍼스 부지는 재정 문제로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후 1925년 연건동과 동숭동에 본과를 건설하기로 결정, 총독부병원 부지까지 합하여 총 9만 2천 평이었다. 경성의 시가지와 인접하면서도 저렴한 토지 가격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러한 토지가 대규모로 남아있던 점이 경성제대 본과를 입지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1923년 동숭동과 연건동은 평당 5-6원이었으나, 대학 신축 후 평당 26-27원으로 폭등했다.

     

    본과 캠퍼스에는 당시 경성의 열악한 주택상황과 주택난으로 인해 대학 교원에게 좋은 주거 환경을 제공하기 위하여 신규 관사 20개동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관사의 수는 모든 직원을 수용하지 못했다. 기숙사의 경우에도 역시 모든 학생을 수용할 수 없었을 뿐더러, 6인 1실 기숙사와 1인 1실 하숙의 가격 차이가 월 2원이었던 청량리 예과의 상황으로 비추어 보아, 본과의 상황도 비슷했으리라 생각된다. 즉, 경성제대 직원 중 80% 이상인 일본인 직원과 조선인 학생 수의 2배 가량이었던 일본인 학생까지 학교 인근 주거지역에 거주함으로써 지역으로 흡수되는 셈이다.

    경성제대 설립으로 하여금 지역의 의미가 형성되어 갔다. 기존에 혜화동 일대에 있었던 학교(공업전문학교, 의학전문학교, 경학원, 불교중앙학원 등)들과 더불어 ‘학교촌’을 이룬 것이다. 당시 신문기사에서는 “지역 내 제복점과 문방구점, 서점, 그리고 여관 등의 상점이 즐비하게 들어설 것이라 전망”(2)했고, “학교촌이라 이름을 전하는 혜화문 안에는 머지않아 신문화촌 (新文化村) 이 이루어질 것이라”(3) 보았다.

    [그림10 ] 1936년 혜화동 일대 학교 위치. 비고 : 1936년 대경성정도 위에 필자 표기 ⓒ유슬기

    1915년 공진회 이후 도로정비사업이 재개되었다. 역시 거점이 되는 지역을 우선적으로 손보았다. 재정 문제로 조금 시간이 걸리긴 하였으나, 1932년까지 6호선(광화문-돈화문-중앙시험소, 일명 종묘관통선)과 10호선(중앙시험소-종로), 12호선(혜화문-중앙시험소)이 혜화동 일대 노선으로 완공되었다.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대학로는 본래 흥덕동천(興德洞川)이 흐르던 곳에서 복개 및 도로정비로 하여금 이 때 생겨난 것이다. 이전까지 혜화문과 종로로 이어지는 길목은 창경궁 앞을 지나가는 현재의 창경궁로이었다. 전차와 버스 노선 또한 구축되었다. 전차 노선은 1910년 종로4가-총독부의원, 1939년 창경원에서 현재 혜화로터리 부근의 경성고등상업학교([그림 10] 참조)까지 이어지는 노선이 신설되었다. 그리고 1928년에는 황금정(현재 을지로)에서 종로4가를 지나 총독부의원을 거쳐 경성고등상업학교로 향하는 버스 노선, 1933년에는 창덕궁 돈화문에서 창경원과 혜화문을 거쳐 종로5가에 이르는 버스 노선이 생겨났다.

    [그림11] 1932년까지 완공된 도로개수 노선 (빨간색 표시는 혜화동 일대 노선)
    출처 : 『조선총독부관보』, 「조선총독부고시제173호」, 1919년 6월 25일
    비고 : 1919년 계획된 노선도를 바탕으로 필자 표기

    이러한 물리적 변화 속에서 지역의 정체성은 어떻게 변화해가고 있었을까? 도시의 물리적 변화는 도시민에게 영향을 미치고, 어떤 도시민이 어떤 활동을 하는가에 따라 도시의 정체성을 형성하게 된다. 종합해보면 1900년대부터 혜화동 일대는 총독부 산하의 앵커시설들이 입지하면서 유동인구를 고려한 기반시설 사업이 발현되었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지역민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지역 내 입지시설과 기반시설은 점차 주거지로써의 변화를 꾀하였다. 1910년대 공사비 마련을 위해 관유지를 매각하여 관유지가 사유지로, 임야와 밭이 대지로 전환되면서 민간 주택개발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더욱이 1920년대 당시 경성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였기 때문에, 토지의 압축·집약적 사용을 야기해 필지가 분할되는 양상이 나타났다.

    혜화동 일대 지역에서도 동일한 현상이 나타났다. 대부분의 필지 분할은 주거지 조성 단계에서 나타나 밭·임야에서 대지로 전환하면서 큰 필지의 것이 여러 소유권자에게 넘어가 작은 필지로 분할되었다. 1910년대와 1920년대 토지 용도 비율을 따지면 이미 밭과 대지의 감소/증가량이 현격히 차이가 난다. 그런데 1927년 토지 용도별 현황을 보면, 밭으로 된 필지는 아직도 대규모의 필지를 유지하고 있었다([그림 12] 참조). 이는 또 다시 대규모 필지가 분할되면서 주거지로 변화할 가능성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음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비고 : 1936년 대경성정도 지도를 바탕으로 1927년 지적목록 데이터를 입력 ⓒ유슬기

    1930년대에도 개발에 대한 요구와 사업은 계속되어 국유지 임야를 불하(拂下)하여 주택지 개발을 이루자는 청원서가 꾸준히 접수되었다. 지역의 변화하는 모습을 담은 기사에서는 이렇게 언급한다.

    “옛날 같으면 숭2동, 숭4동 부근은 일종의 특수부락으로 취급하여 사람이 그리 살지 않았으나, 중앙지의 주택이 조밀해지고 또 학교로 대학이며 의학전문, 고등공업, 보성고보, 불교전문, 동성상업, 고등상업 등 여러 학교가 들어서서 완연 학교촌을 이루게 되자 인가도 자연 더 늘어나게 되었다.”(4)

    여기서 언급된 숭2동과 숭4동은 앞선 조선시대 예외적으로 마을 형성이 가능했던 곳이다. 본래 이곳을 제외하고는 인가가 드물었으나, 1933년에는 인가가 넘쳐 도성 밖 성북동까지 확대되는 중리라 한다.

    “작년 가을만 해도 보성고보에서 버스 종점가지 혜화보통학교 외에는 별로 집이 없었다. 배추 밭이 시퍼런 것을 보고 다녔는데 올 가을엔 양관(洋館) , 조선집들이 제멋대로 섞여 거의 공지(空地) 없는 거리를 이루었다. … 조선 기와집엔 결코 어울리지 않는 시뻘건 벽돌담을 쌓고 추녀 끝 올려쌓는다. … 재목(材木)에 땀 흐르는 얼굴처럼 번질번질 끈적끈적해 보이는 기름칠들을 한다. … 유리창도 편리하기는 하지만 큰돈을 들여 지을 바에는 조선건물로서의 면목을 죽여가면서까지 유리창에 열광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5)

    새로 지어지는 주택의 특징을 언급한 기사이다. 빈 공간이 없을 정도로 빼곡히 신축되는 집은 서양식과 조선식 양식의 것들이 혼재되어 있고, 그 자재는 새로운 건축 재료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혜화동 일대의 주거지 개발 양상을 보여주고 있고, 건축에 사용되는 값비싼 재료들을 통해 새로 들어오는 이들이 어느 정도 재력을 갖추고 있음을 보여준다.

    고급주택지로 대표되던 문화주택지도 이곳에 들어섰다. 문화주택지 입지 조건에 의하면, 주로 도성 밖 교외지역에 건설되기 마련인데 혜화동과 명륜동, 동숭동은 예외적으로 문화주택지가 도성 안에 들어섰다. 이곳의 유휴 토지 총량의 존재는 개발 사업을 펼치기에 충분히 좋은 조건이다. 거주환경의 측면에서 보아도 조망과 공기가 좋고 조용하기 때문에 주택지로 인기였을 만큼 고급 주택가로 손색없었다. 문화주택의 수요층은 주로 일본인, 재력을 갖춘 조선인이었다. 혜화동 일대는 경성제대와 병원 등 주요한 시설들이 있었고, 이들 시설이 종사자들은 대개 일본인이거나 소수의 조선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직주근접의 차원에서 보더라도 이 지역은 새로운 중산층 주거지를 건설하기에 매우 좋은 위치였다.

    새로운 주택지 건설은 주민 구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경성의 사대문 안에서 뉴타운적 성격 – 편리한 교통, 쾌적한 주거환경을 갖춘 곳으로 주거지로 경쟁력이 있기에 일정 수준 이상의 사람들이 선호하는 거주지역이었다. 먼저, 1910년대와 1920년대 토지 소유자의 국적으로 따져보면, 일본인 보유량은 증가한 반면, 조선인 보유량은 감소하였다([그림 13] 참조). 이는 토지 소유를 의미하므로 실제 거주하는 것과는 다를 수 있기에 당시 기록들을 찾아보았다.

    이곳에 실제 거주하는 사람들의 직업과 그에 따른 경제력을 살펴보면 거주민은 중상류층이었을 것이다. 경성제대 학생만 보더라도, 매월 50-60원의 학비를 보태야 하는 집안은 일정 수준 이상의 재력을 지닌 집일테다. 1924년 발행된 『운수 좋은 날』에서 김 첨지가 동소문(혜화문)안으로 들어와 인력거에 태운 사람은 마마님과 교사인 듯한 양복장이였다. 이 외에도 은행업 종사자도 있었고,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손기정 마라톤 선수도 연건동에 전세로 살고 있었다. 또한 만주국 총영사인 박석윤은 혜화동, 정치인 겸 언론인 최린은 명륜1가, 소설가 이광수도 명륜3가 주민이었다. 언론인 이성환은 1928년 혜화동에 집을 짓고 살다가 명륜1가로 옮기고 혜화동 일대를 떠나지 않고 살았다. 건양사 정세권 역시 1940년대 명륜1가에 거주했다.

    일제강점기 직업별 임금을 살펴보면 혜화동 일대 주민들의 경제적 위상을 유추할 수 있다. 당시 목수와 우마차인부 등과 같은 노동자들의 평균 월 임금은 조선인 11원, 일본인 22원이었다. 혜화동 일대에 거주하는 이들은 당시 사료를 보거나 직주근접의 주택지를 감안해 보면 주로 교수, 의원 약제관, 교사, 사무관, 신문기자였다. 교수와 의원 약제관이 월 평균 100-375원, 교사와 사무관이 월 91-316원, 신문기자가 월 60원이었다. 당시 월 60원의 임금이면 상당히 높은 보수로 인정받았다.

    혜화동 일대의 위상 변화, 선망받는 주거지역으로의 변화는 당시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소위 문화촌은 어디냐? 동소문(혜화문) 안 근방을 칠까? 그들 (동소문 안 거주민)의 살림은 대개가 간단하고도 정결하다. 대개가 회사원이거니와 그 외 기타 여러 곳에서 월급쟁이로 다니는 사람이 많고 식자층이 한적한 곳을 찾아 새로이 주택을 짓고 간편하고 깨끗한 살림을 하고 있다.”(6)

    “서울 가운데서도 제일 살기 좋은 곳이 혜화정·명륜정이라고 한다. 이것은 비단 이 정회 사람 이 정내에 사는 사람들만이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최근 장안에 주택지를 잡으려면 동네가 새 집들로 깨끗하고 공기 좋은 곳을 첫 손꼽기에 모두들 서슴치 않으리라. … 정내의 경제력을 따져 보더라도 혜화정은 장안에서도 유수한 부자동네로서 이 또한 이곳 정리를 위하여 든든한 일이다.”(7)

    당시 부유층과 중간계층 사이에서 가장 선호되었던 직업인 ‘월급쟁이’와 인텔리 계층이 정갈하게 생활하며 문화촌을 이루고 있는 곳, 자연환경과 교육환경 그리고 우수한 도로 연결망으로 거주지로써 인기 있는 곳. 비단 혜화동과 명륜동뿐 아니라, 인근에 경성제대가 있던 연건동과 동숭동까지 그 영향권 하에서 선망 받는 지역, 1930년대 고급 주거지를 이룩하였다.

    위와 같은 개발은 ‘공지(空地) 활용 개발(Infill Development)’ 과 유사하다. 공지활용개발은 구시가지(old city) 내에 기존의 기반시설을 토대로 빈 공간(vacant sites) 혹은 저개발(under-used) 상태의 공간 개발을 의미한다. 혜화동 일대는 사대문 안에 위치한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미개발 지역이 많고 밭과 임야로 이루어진 국공유지가 넓게 분포한다는 특징으로, 신규 대규모 개발 가능성이 존재하였다. 즉, ‘미개발 도심 개발(Town-in-Town development)’ 의 성격을 갖고 있는 독특한 것이었다. 인구 증가로 도시가 점차 확대되어 가는 과정에서 기존의 도시 공간 속 남아있는 토지 개발은 교외의 새로운 지역에 건설하는 뉴타운과 비슷한 성격을 지니면서도 이것만의 장점을 가진다. 이는 곧, 기존에 존재하던 도시 공간을 바탕으로 비어있는 공간을 채우는 것이므로 최소한의 비용으로 고밀도 개발하여 저밀도로 퍼져나가는 도시 공간의 확산(sprawl) 을 방지한다.

    <각주>

    1. 조선총독부의원, 『조선총독부의원20년사』, 1928, 12쪽
    2. “경성대학신축과 부근토지가격푹등예상”, 『동아일보』, 1925년 1월 15일
    3. “앵도원에 문화촌 주택지로 개방”, 『중외일보』, 1927년 5월 24일
    4. “수석조흔 주택지로 인테리촌된 성북동”, 『조선일보』, 1933년 10월 11일
    5. 이태준, 「집이야기」, 『삼천리』 제7권 제8호, 1935년 9월 1일
    6. 「대경성의 특수촌」, 『별건곤』 제23호, 1929년 9월 27일
    7. “혜화·명륜정회 장안에 유수한 부촌 금후시설을 기대”, 『조선일보』, 1938년 12월 13일

    <참고문헌>

    구경하·김경민(2014), 「1920년대 근대적 디벨로퍼의 등장과 그 배경」, 『한국경제지리학회』 17(4): 675-687

    김정수(2017), 『연극클러스터 구조변화에 따른 개선 방안 연구 : 대학로 연극클러스터를 중심으로』, 세종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염복규(2009), 『日帝下 京城도시계획의 구상과 시행』,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유슬기·김경민(2017), 「조선시대 한양도성 안 동부 지역의 상업도시화 과정」, 『서울학연구』 67: 239-264

    유슬기·김경민(2017), 「일제강점기 한양 도성 안 동북부 지역의 중상류층 지역화 과정」, 『서울과 역사』 97: 161-213

    이경아(2006), 『日帝强占期 文化住宅 槪念의 受容과 展開』,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이충우(1980), 『京城帝國大學』, 서울 : 多樂園

    최공호(2000), 「官立工業傳習所 연구」, 『한국근대미술사학』 8: 153-188

    최인영(2007), 「1928~1933년 京城府의 府營버스 도입과 그 영향」, 『서울학연구』, 29: 219-250

    앞 회의 글 [공간사반 2017 여름 만주답사 트래블로그③] 이효석의 〈벽공무한〉과 함께 하는 하얼빈 기행

    필자소개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박사과정 ysk2775@snu.ac.kr

    페이스북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