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촛불 상소’하는 그대 백성인가 시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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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03월 13일 09:3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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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인구는 4,750만이(라고 한)다. 물론 남한만이다. 그런데 단 한 편의 영화를 1,100만 명이 본다면 그것은 놀라운 일을 넘어서서 기괴한 사건이다. 이미 눈치 챘겠지만 <왕의 남자> 이야기이다. <왕의 남자>는 이 수치를 넘어선 다음에도 여전히 상영 중이다. 역대 기록 중 <태극기 휘날리며>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 수치에서 당연히 아마도 이 영화를 보러갈 리 없는 어린이들을 빼야 한다. 그리고 거동이 불편하신 노인 분들도 제외해야 할 것이다. 길거리에서 아무나 붙들고 물어보아도 네 명 중의 한 사람은 보았다는 뜻이다. 이 영화의 관객 수는 3년 전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했던 숫자보다 더 많다.

    노무현 후보 지지자 보다 더 많은 사람이 보다

    여기서는 <왕의 남자>를 비평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미 많은 글이 쓰여 졌고, 또 이 영화의 성공에 대해서 많은 분석이 나와 있다. 게다가 이미 끝나가고 있는 이 영화에 관해서 비평을 쓰는 것은 ‘뒷북’의 공허한 메아리가 될 것이다.

    여기서는 <왕의 남자>의 성공에 대해서 이야기할 생각이다. 사실 처음 이 영화의 시사가 끝났을 때 이른바 ‘충무로의 선수’들은 뭐, 다소 성공이야 하겠지만 큰 성공을 거두기야 하겠느냐, 고 시큰둥하게 말했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무엇보다도 이 영화에 일종의 동성애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요소가 있다는 것이 거부반응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게이 시네마가 아니다) 게다가 요즘 누가 사극을 보냐는 것이다. (그런데 역사적 고증이 거의 되지 않았다) 또한 도대체 주인공이 누구인지 잘 잡히지 않은 불분명한 스토리 라인도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도대체 연산군이 왜 저러는지 알 수가 없다. 혹은 내시감이 왜 끝까지 연산군과 흥망성쇠를 같이 하는지도 알 수가 없다)

    ‘충무로 선수’들은 왜 시큰둥했나

    여기에 스타 한 명 없는 캐스팅도 큰 관심을 끌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성공을 하고나니 갑자기 이 모든 것이 장점으로 둔갑하였다. ‘여자보다 예쁜’ 남자 이준기는 십대 야오이 만화 팬들을 끌어들였으며, 식상한 코미디의 홍수 속에서 사극은 경쟁력이 있었으며, 각자 취향에 맞는 주인공을 각자 선택할 수 있는 멀티한 등장인물들은 다양한 관객층을 끌어 모을 수 있었고, 유명한 스타가 없는 편이 호기심을 유발하고 새로운 기대를 불러 모았다는 것이다. 나는 한 편의 영화가 성공하게 된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어떤 분석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나는 좀 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그냥 간단히 말하면 <왕의 남자>는 영화적으로 그저 그렇다. 거기에 무슨 굉장한 테마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야기가 대단한 것도 아니며, 미학적으로 논쟁적인 것도 아니다. ‘왕의 남자’ 이준기가 예쁘긴 하지만 그 얼굴을 보지 못하면 죽어버릴 것 같은 양귀비의 미모는 아니다.

    하지만 한 편의 영화를 인구 네 명 중의 한명, 혹은 천만 명이 넘게 보았을 때 그 영화를 무시하면 안 된다. 그건 단순히 공감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넘어서서, 무언가 맹렬하게 설명을 요구하는, 하나의 시대정신이 거기에 있다. 너무 과장하는 것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저 그런 영화 속에 담겨진 시대정신

    이것은 작은 성공이 아니다. 작기는커녕 무시하기에 너무 큰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지금 관객들은 누구의 요구로 동원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그 누가 이 관객을 ‘홀린 듯이’ 동원하는 중이다. 우리는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가 누구인지를 밝혀야 한다.

    이 미스테리를 안고서 겨울이 끝날 즈음 또 한편의 사극을 보게 되었다. <음란서생>은 조선시대를 무대로 남몰래 ‘야설’을 쓰는 사대부 집안의 명문(名文)으로 명망 높은 문장가 윤서의 이야기이다. 사실 한 시즌에 사극영화 두 편을 보는 것은 쉽지 않은 경험이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넘쳐나는 사극과 달리 영화에서 사극을 보기란 좀체 힘든 일이다.

    그건 두 가지 이유인데 하나는 물론 돈의 문제이고(사극은 제작비가 많이 든다!), 다른 하나는 한국영화관객의 주류인 20대 관객들에게 사극은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연의 일치인 것처럼 두 편의 사극영화가 거의 동시에 만들어졌다. <음란서생>에 대해서도 나는 세세한 영화평을 피할 생각이다. <왕의 남자>와 <음란 서생> 두 편의 영화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음란서생>과 이상하게 닮은 점

    사실 두 편의 영화는 아무 상관이 없다. 두 편의 영화는 전혀 다른 사람이 시나리오를 썼고, 그런 다음 전혀 다른 사람이 연출했으며, 전혀 다른 투자사로부터 돈을 받았고, 전혀 다른 영화사에서 만들었다. 두 영화가 조선시대를 무대로 했다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겹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아무 상관도 없는 두 영화가 임금을 다룰 때 이상하게도 그 인물의 성격이 겹친다는 것이다. 두 편은 동일한 임금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왕의 남자>는 구체적으로 연산군을 지적하고 있고, <음란서생>은 다만 조선시대라는 것 말고는 사색당파로 나뉘어 당쟁을 일삼던 조선시대 후기라는 정도의 배경만을 보여줄 뿐이다.

    연산군이 조선시대의 임금 중에서 가장 폭군이라는 사실은 온갖 드라마에서 보여주었고(그러나 그것이 역사적으로 정말 가장 폭군이었는지를 말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음란서생>의 임금은 이상할 정도로 연산군과 닮아있다. 그래서 <음란서생>을 보고 난 다음 마치 <왕의 남자>와 동일한 왕정을 다룬 영화라는 착시현상마저 들었다.

    둘 다 정사에는 관심이 없고, 둘 다 여자에게 몰두하고 있으며, 둘 다 (그 관계는 다르지만) 삼각관계에 빠져 패배자의 자리에 서게 된다. 조선시대에 폭군만이 있었던 것은 아닌데도 두 영화에서 임금은 반쯤 미친 상태이다. 혹은 이야기를 진행하기 위해서 미친 임금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임금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도 아니다. 말하자면 임금은 이야기의 매개자이다.

    변덕스런 권력, ‘코드’ 불일치, 그리고 가짜 눈물

    그런데 그 매개자가 절대적인 권력으로 이 모든 운명을 관장한다. 권력이 반 쯤 미쳤을 때, 그가 자신의 권력을 내키는 대로 사용할 때, 이야기는 비극으로 치달리고 관객들은 주인공의 운명에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이 눈물은 가짜 눈물이다. 왜냐하면 이 눈물을 끌어내는 비극은 세상의 절대적인 운명에 대해서가 아니라 변덕스러운 권력과 코드를 맞추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하는 데서 오는 좌절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실상 이 상황은 그것을 통과해야하는 자들에게는 비극이겠지만 그걸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매우 우스꽝스러운 희극이어야 한다. 마치 할리우드의 엎치락 뒷치락 코미디들이 그걸 감당해야하는 주인공들에게는 끔찍한 비극이지만, 그걸 보는 사람들은 어처구니없어서 웃을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희극이 비극으로 둔갑한 이유가 무엇일까? 더더구나 지금 (흥행지표가 보여주는 바에 따르면) 한국영화를 사랑하는 대중들이 사랑하는 장르는 비극이 아니라 코미디가 대세이다. 이를테면 한 해의 흥행결과에서 절반 이상을 차지한 코미디 영화들. 혹은 <왕의 남자>에 살짝 가려서 보이지 않은 <투사부일체>의 거의 기적에 가까운 성공. 지난해에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은 <가문의 위기>의 성공.

    <왕의 남자>가 노골적으로 묘사한 이 시대 ‘무엇’

    내가 <왕의 남자>와 <음란서생>에서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단지 사극이라거나 혹은 임금이 등장해서가 아니다. 이 두 편의 영화의 절정은 끔찍하게도 고문이다. <왕의 남자>와 <음란서생>에는 이상하게도 임금의 지시에 의한 고문이라는 개입이 비극을 고조시킨다. <왕의 남자>에서는 광대 장생의 양쪽 눈을 인두로 지져서 장님을 만든 다음에야 일시적으로 고통을 중단한다.

    <음란서생>에서는 당대의 명문가이자 장안의 ‘야설’ 작가인 윤서의 두 다리를 부러트릴 만큼 고문을 가한 다음에야 비로소 멈춘다. 둘 다 임금이 직접 개입하고, 그가 지시를 내리고, 그것을 지켜본다. 여기에 무슨 음모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어떤 함정에 빠진 것도 아니다.

    임금은 이 이야기에 고문의 형식으로 개입한다. 같은 말이지만 이야기가 비극이 된 까닭은 이 고문의 과정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고문의 자리에 가서 고통을 당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보는 쪽의 자발적 수동성(나는 지금 능동성을 반대로 쓴 것이 아니다!)이 문제가 된 것이다.

    나는 여기서 대중문화와 대중들 사이의 관계가 즐거움에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싶다. 아무리 끔찍한 이야기를 다룬다고 해서 괴롭기 위해서 자기 발로 영화관에 가는 사람은 없다. 이상하고 잔인한 말이지만 그 괴로움을 즐기기 위해서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 진실이다. 이걸 그저 단순하게 마조히스트적인 즐거움이라고 말하는 것은 핵심을 놓치는 것이다.

    이 즐거움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 그것도 매우 용의주도한 즐거움이다. 여기서 이 즐거움이 항상 동시대의 일상생활에서 오는 결과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모든 영화는 동시대의 관객을 위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영화는 자기 시대의 노골적인 기록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가 자기 시대에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것들을 물고 늘어질 때 구경꾼들은 진부하고 따분하다고 느낀다.

    우리 시대 언어로 다시 번역을 해야 한다

    구경꾼들은 거기서 무언가 불편한 것이 있어야 영화와 자신 사이에서 긴장관계를 얻는다. 그 어떤 잉여. 말하자면 영화는 세상이라는 일상생활 안에서 통과에 실패하고 무언가 망설이고 있는, 무언가 버티고 있는, 무언가 불편한, 무언가 억압당하고 있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데 침묵 당하고 있는, 무언가 그렇게 해야 하는데 하지 못하는, 무언가 해결되지 못한 문제를 걸고넘어지면서 그 아픔에 울거나 혹은 그 아픔을 보고 웃는다.

    카타르시스? 그건 고작 두 시간 동안 만들어지는 영화에서 훔쳐내기에는 너무 엄청난 단어이다. 영화에서 감정은 그렇게 만족스럽게 배설되지 않는다. 차라리 여기에는 무언가 문제가 다루어졌다는 상상적 교란이 있다. 사실 영화에서 현실 속의 문제를 다루었다고 해서 실제로 다루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도 그걸 보는 사람들은 그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다는 일종의 착각에 빠진다.

    그때 거기에 정서적으로 나는 어느 자리에 가야 할 것인지를 선택한다. 울 것인가, 웃을 것인가. 여기서 생각해야 하는 것은 그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결국은 그것을 끌어안는 정서는 동시대의 잉여라는 것이다. 일상생활 안의 대중문화, 그것이 끌어당기는 지금 여기의 세상과의 관계.

    아무리 <왕의 남자>와 <음란서생>이 조선시대를 무대로 설정했다고 하더라도 결국 이 성공은 2005년 겨울, 혹은 2006년 봄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대중들의 감흥, 혹은 그 이야기에 대한 호응이라는 것이다. 대중영화와 일상생활 사이에 있는 어떤 순환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우리 시대의 이야기로 다시 번역해야만 한다.

    요즘 마키아벨리는 왜 그렇게 많이 출판될까

    약간 시선을 돌려보자. 지금 갑작스럽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왕실에 대한 관심은 별난 측면이 있다. 이를테면 아직도 왕조시대를 살고 있다는 황당무계한 설정의 텔레비전 드라마 <궁>의 신기한 성공. 그런 다음 인터넷 웹 서점을 검색해보았다.

    지난해부터 올해 초까지 마키아벨리에 관한 책이 전례 없이 출판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무려 일곱 종. 물론 <군주론>에 집중된 글이 대부분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니콜로 마키아벨리에 대해서 교양 이상의 전문적인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사람은 (내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드문 편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거의 지난해부터 일종의 붐이 불었다는 인상이 있을 정도로 마키아벨리는 새로운 화두가 되었다. 이를테면 여기에는 ‘스타’ 철학자 들뢰즈가 불러일으킨 스피노자 유행과는 좀 다른 측면이 있다. 현대 철학자들 중에서 (알튀세를 예외로 한다면) 마키아벨리를 끌어낸 글은 거의 만나보기 어렵다.

    그런데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전문서적이 아니라 교양서적 수준으로 관심을 끌어 모으고 있다. 무언가 군주가 문제가 된 것이다. 하나의 담론이 갑자기 세상에서 주인 행세를 하려들 때 그것은 헤게모니가 내세우는 알리바이라는 것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 일시적인 유행처럼 보이는 담론이 아무리 우스꽝스러워 보여도 그것이 일상생활 안에서 실제로 작동하기 시작할 때,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담론에 동의할 때, 그 의미보다도 그 맥락이 더 중요해지기 시작한다.

    무언가 ‘군주’가 문제가 된 것이다

    나는 대중문화 현상을 곧바로 사회의 반영이라고 단정 지을 만큼 단순하지는 않다. 하지만 둘 사이에 아무 관계도 없다고 태연자약하게 무시하는 것은 훨씬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대중적 동의에는 그것을 설명해야 할 정치적 이유가 있다.

    세상에서 모든 대중적 성공은 하나의 시대정신이다. 거리에서 꽃병이 사라진 시대에, 오직 거리에서 일인시위만이 외롭게 계속되고 있는 시대에, 그 자리에 장동건이 서 있을 때에만 관심이 되는 시대에, 바로 그런 우리 시대의 정치적 투쟁이란 그 의미를 누가 먼저 ‘캐치’하느냐의 싸움이다.

    나는 21세기 한국에서 살면서 하나의 새로운 현상을 목도하고 있다. 그건 촛불시위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시청 앞에 모여서 청와대로 향한다. 백성들의 목소리를 전하기 위해서, 청와대에 앉아있는 저 분께서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그 분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그 곳으로 향한다.

    나는 지금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가, 조선시대에 살고 있는가? 대통령은 임금님이 아니다. 그런데 왜 청와대에 앉아있는 저 사람이 당신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고 믿는가? 상소문을 들고 종로에 앉아있는 유생들.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신문고. 당신은 백성인가, 시민인가?

    나는 이 이상한 전근대적 믿음의 시대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보고 있다. 푸코의 말. 왕을 왕으로 만드는 것은 왕 자신이 아니라 그가 왕이라고 믿는 사람들이다. 일개 영화평론가에 지나지 않는 나는 당신과 함께 21세기 대한민국의 일상생활 안에서 살면서 <왕의 남자>의 기이한 성공과 그 뒤를 잇는 <음란서생>이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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