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말고사 망쳐
    낙심한 아이를 달래다
    [누리야 아빠랑 산에 가자-29] 시험
        2017년 11월 10일 11:08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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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는 출타하고 없었다. 돈벌이에 치중한 한국마사회가 성심여중고 앞에 화상경마장을 개장해 교육 환경을 망치려 했다. 주민과 풀뿌리단체들이 ‘용산 화상경마 도박장 추방대책위’를 구성했다. 학교 구성원들과 연대해서 반대 싸움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아내는 거기에 갔다.

    딸은 어제, 그러니까 7월 4일, 2학년 1학기 기말고사를 마쳤다. 입시산의 중턱에 다다른 것이었다.

    “시험 어땠어?”

    간밤에 물었을 때 시무룩했고 무반응이었다. 못 봤나 추측하면서도, 오늘 아침까지 못내 궁금했다. 딸은 친구와 선약이 있어서 산에 못 간다 했다. 혼자 배낭을 꾸리며 물을까 말까 갈등했다. 참아야지 싶었다. 그런데 묻고 말았다. 배낭을 메면서였다.

    “시험 잘 봤어?”

    “얘기하기 싫은데, 왜 또 물어? 생각하기 싫단 말이야!”

    딸이 발끈했다. 성적을 궁금해 한 게 무안했고, 심리 상태를 고려하지 않은 게 미안했다. 그러면서도 과하게 짜증내는 게 얄미워 맞받아쳤다.

    “한 만큼 나오는 거지. 밤마다 휴대폰이나 컴퓨터 붙들고 있으니까 그렇지.”

    “중간고사 때보다 더 열심히 했다고!”

    딸은 격하게 쏘아붙이고 침대로 가더니 이불을 휙 뒤집어쓰고 누워버렸다. 왕창 삐졌다. 못 봤다고 대답하면, 스트레스 받지 말라고 격려하려던 참이었는데. 동티가 났다. 고놈의 궁금증이 화근이었다. 난감했으나, 금방 풀리겠지 판단하곤 집을 나서려 했다. 수건을 챙기지 않은 게 떠올랐다. 들어가 챙겨야지 하다가 화해도 할 겸 입구에서 불렀다.

    “누리야, 수건 좀 갖다 주라.”

    딸은 꼼짝 안 했다. 더 다정한 목소리로 요청했다.

    “뚱띵, 수건 좀 갖다 달라니깐.”

    반응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신을 벗고 들어가 수건을 챙겼다. 그리곤 안방으로 가서 이불을 걷어 보았다. 훌쩍이고 있었다. 딸은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안 되겠다 싶어 침대에 걸터앉았다.

    “아빠랑 얘기하자.”

    이불을 걷고, 딸이 또 뒤집어쓰지 못하게 움켜잡았다. 딸은 팔뚝으로 눈을 가렸다. 나는 팔뚝을 내리려 했다. 딸은 눈부시다며 거부했다.

    “스트레스 받지 마. 못 보면 못 본 거지.”

    차분하게 달랬다.

    “생각하기도 싫은데 왜 또 물어보냐고! 나중에 점수 나오면 다 얘기해 주려고 했는데!”

    딸은 나를 원망하며 울었다.

    “아빠가 시험 못 봤다고 나무란 적 있냐. 공부하라 잔소리를 했냐. 대학 가야 된다고 강요하기를 했냐.”

    나는 억울해하며 아이를 달랬다.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 나는 아이에게 대학에 안 가도 된다고 말하곤 했다. 아빠가 돈이 없어 못 보낼지 모른다 했다. 아이는 대학에 가겠다고 했다. 중학생이 돼선 프랑스로 유학 갈 거라고도 했다. 유럽 여러 나라에 대학 등록금이 없다는 걸 알게 된 뒤였다. 유학생은 생활비가 많이 든다고 얘기하자 딸애는 엄마가 따라가서 접시 닦으면 되지 않겠냐고 했다.

    “지난번엔 적당히 했는데도 잘 나와서 이번에는 더 열심히 했고 기대했는데 망쳐서 속이 상해. 잘 보려는 강박감에 긴장해서 뻔히 아는 문제까지 실수했단 말이야. 흑흑. 목표한 대학에 어떻게 가냐고. 흑흑.”

    딸은 공부한 내용을 공책에 재정리하면서 심화 학습했다.

    중간고사에서 기대 이상의 점수를 얻었던 딸은 기말고사를 앞두고서 부담이 컸던 모양이었다. 서러움이 북받치는 듯했다.

    “울지 말고 이성적으로 판단해.”

    애잔하고 먹먹했다.

    “어떻게 이 상황에서 이성적 판단이 가능하냐.”

    딸내미는 계속 흐느끼며 항변했다. 난감했고, 어떻게든 달래야 했다.

    “대학을 정해 놓고 공부하는 게 말이 되냐.”

    나는 부드럽게 타일렀다. 그리고는 내 삶에서 체득하고 주변 삶에서 목격한 학문의 방법에다, 내가 생각하는 심리학을 엮어 조언하기 시작했다.

    “어떤 대학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공부할 것이냐가 핵심이야. 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대학에 안 가도 돼. 사회생활을 경험하고 가는 것도 좋고. 네가 전에 아빠한테 얘기했던 인권운동을 하다 가면 더욱 좋아. 상처 받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현장 경험을 쌓으면 심리학을 현실에 접목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거야. 고등학교 마치자마자 대학 들어가는 틀에 얽매일 필요는 없어.

    100년 사는 인생에 하나의 길만 있는 게 아니야. 그리고 심리학은 인간 종합 학문이잖아. 철학을 꼭 배워야 해. 철학은 근본이야. 네가 유학 가고 싶어 하는 독일에선 모든 인문사회학의 바탕에 철학이 깔려 있다고 하더라. 대학 등급에 연연하지 말고 인문, 사회, 과학, 예술 등도 두루두루 읽어야 해. 동식물도 알아야 하고. 너도 알듯 심리 치료에 동물과 식물도 활용하잖아. 동물 심리와 식물 심리를 연구하는 학자도 있어. 생명의 원천인 우주도 배우면 금상첨화고. 아빠가 즐기는 내셔널지오그래픽을 같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딸은 경청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숨소리가 고르게 흐르고 있었다. 울음은 잦아들었다. 계속 이었다.

    “심리학은 총체적이어야 해. 책 속의 이론에만 능통해선 아무짝에도 쓸 데가 없어. 세상에 그런 사람들은 차고 넘쳐. 예전엔 남산에서 돌 던지면 김·이·박 씨 맞는다고 했는데, 지금은 석·박사가 맞을 정도야. 학위가 중요한 게 아니야. 너도 알잖아.”

    “나도 알아.”

    딸내미가 반응했다. 팔뚝을 내리고선 내 눈을 깊숙이 응시했다. 딸은 이야기에 집중하면 상대

    방이 무안할 정도로 두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특징이 있었다. 됐다 싶었다.

    아이는 대화나 설명에 집중하면 상대방이 무안할 정도로 뚫어져라 응시하는 특징이 있었다.

    “그런 사람 되려고 심리학 하겠다는 건 아니잖아.”

    “응.”

    딸은 또 호응했다.

    “그렇다면 누리야. 이렇게 공부해 보면 어떨까. 삼라만상은 우주에만 있는 게 아냐. 인간 사회가 삼라만상이고, 개개인 그 자체도 삼라만상이지. 인간은 하나의 특징만으론 설명할 수 없는 오묘한 존재야. 단세포였을 때부터의 누적된 경험과 난해한 심리가 뒤얽혀 발현되는 거지. 그래서 아빠는 사람이 삼라만상이라 말하는 거야. 누리가 고등학생일 때 사람 가운데서도 특징적인 사람, 예를 들면 그림을 그리며 귀를 자른 고흐나 눈을 찌른 최북 같은 사람을 연구해 보는 건 어떨까. 그러면서 심리학 이론도 공부하고 말이야. 아빠는 그런 게 심리학을 제대로 배우는 방법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누리야. 너는 지금 잘하고 있는 거야. 놀면서도 그만큼 점수가 나오고, 학원에 다니지 않으며 혼자 공부하는 습관도 익혔고, 넌 틀림없이 훌륭한 심리학자가 될 거야. 그러니까 스트레스 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시험 점수나 대학 등급은 중요치 않아. 알았지? 힘내.”

    이야기를 마치면서 딸아이를 쓰다듬었다. 딸애의 입이 앞으로 쑥 튀어나오더니 입술이 씰룩거렸다.

    “으앙.”

    울음이 제대로 터졌다.

    “아빠 사랑해.”

    딸아이는 내 목을 끌어안았다.

    “아빠도 사랑해.”

    나도 딸아이를 품에 꼭 안고서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딸애의 눈물이 나의 볼을 따뜻하게 적셨다. 한동안 울던 딸은 침대에서 후련하게 일어났다. 나는 산에 간다며 일어섰다.

    “아빠, 잘 갔다 와.”

    딸내미가 인사했다. 나는 당부했다.

    “그래, 할미한테 밥 차려 달라고 해서 꼭 먹어.”

    늦게 출발한 산행이었다. 저녁 7시 30분까진 안산에 가서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 행사에 참석해야 했다. 상명대에서 사모바위를 거쳐 구기탐방센터까지 2시간, 맘먹고 속보로 탔다. 땀으로 범벅된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으러 집에 들렀다. 딸내미는 휴대폰에 코를 박고 있었다. 나는 물었다.

    “뚱띵, 스트레스 다 풀렸어”

    “응. 아빠가 공부하지 않아도 된댔으니까, 이제부터는 공부 안 하고 놀아야지. 히~.”

    우리는 밝게 웃었다.

    필자소개
    민주노총 사회연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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