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태죄 폐지,
    안전·평등 사회 기본조건
    "‘생명권 대 선택권’의 문제 아니다"
        2017년 11월 09일 05:16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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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태죄 폐지는 여성의 몸을 인구통제의 도구로 삼아온 역사를 마감해야 한다는 선언이자, 생명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묻기 위한 오랜 고민의 결과이다. 우리는 더 이상 누군가의 생명이나 삶이 국가에 의해 선별되거나 통제되지 않는 사회를 시작하기 위해 낙태죄 폐지를 요구한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지난 9월 30일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약(미프진) 합법화 및 도입을 부탁 드립니다’라는 제목의 청원글이 올라왔다. 한 달여만에 23만여 명이 이 글에 참여했다. 온라인 커뮤니티는 물론, 언론에서도 청와대 청원으로 인해 다시 불붙은 ‘낙태죄 폐지’ 문제에 적극적으로 쟁점을 제기하며 사회적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낙태죄 폐지를 둘러싼 쟁점은 3가지 정도로 요약된다.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의 대립 ▲임신중단(낙태) 합법화와 임신중단율의 관계 ▲모자보건법 등이다.

    낙태죄 폐지를 지속적으로 요구해왔던 한국여성민우회 등 전국 97개 여성시민사회단체들은 ‘낙태죄 폐지’를 둘러싼 논란 등에 조목조목 반박하고 나섰다. 이들은 9일 오전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공동기자회견을 열고 “낙태죄 폐지는 보다 안전하고 평등한 사회를 위한 기본조건”이라고 강조했다.

    낙태죄 폐지 기자회견(사진=유하라)

    낙태죄 폐지는 ‘생명권 대 선택권’의 문제가 아니다

    지난 2012년 헌법재판소는 낙태를 처벌하지 않으면 낙태가 만연하게 되고 임산부 자기결정권이 태아의 생명권 보호에 비해 결코 중요하다고 볼 수 없다며 낙태죄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다. 낙태죄 폐지를 반대하는 측도 낙태죄는 ‘태아에 대한 생명권 존중’이라고 주장한다. 일부 언론들도 낙태죄 폐지 논란을 ‘생명권’ 대 ‘선택권’의 대립 구도 안에서 바라보고 있다.

    반면 여성시민사회단체들은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선택권은 대립하는 권리가 아니다”라며 “임신 지속 여부에 대한 여성의 판단은 태아가 살아갈 삶의 조건과 동떨어져 있지 않으며, 삶의 조건을 책임지지 않는 사회에서 태아의 생명권을 운운하는 것은 기만”이라고 반박했다.

    국가가 ‘태아의 생명권’을 이유로 낙태를 법적으로 처벌하면서도, 태아의 생명에 대한 책임은 회피하고 있다는 것이다. 장애나 질병, 경제조건, 연령, 혼인 여부 등에 따른 사회적 차별 등은 출산과 양육을 결정하는 중요한 조건이 된다. 최근 출산율이 급격히 감소한 것도 이런 사회적 원인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부가 이런 문제를 개선하는 대신 여성에게만 그 선택의 책임을 전가하는 방식 중 하나로 낙태죄를 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형숙 변화된 미래를 만드는 미혼모협회 인트리 대표는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미혼모의 고통과 아픔을 누구도 책임지지 못하고 않고 있는 사회다. 이런 사회에서 낙태는 성적 자기 결정권”이라며 “여성이 낙태를 선택한 배경이 무엇이고,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문제 무엇인지 우리 국가가 돌아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태호 참여연대 정책위원장도 “국가는 임신중단에 대해 심판할 것이 아니라 아이를 낳을 수 없게 하는 여러 사정들에 대해서 국가의 책무를 먼저 해야 한다”며 “젊은이들은 결혼조차 두려워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이런 모든 상황을 도외시해선 안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모자보건법의 문제도 심각하다. 장애가 있는 태아에 한해선 합법적으로 낙태가 가능하도록 한 것이 이 법안의 골자다. 낙태죄가 태아의 생명권을 존중한다는 이유로 유지되고 있는 상황에서 장애가 있는 태아는 합법적 임신중단 수술이 가능하도록 하는 모자보건법은 상당한 모순이 있다는 지적이다.

    이은지 장애여성공간 활동가는 “임신 초기 태아의 장애 유무를 확인하도록 해 합법적으로 임신중절이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국가가 생명에 대해 가치와 자격을 부여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질타했다.

    이 활동가는 “국가 발전을 위해 힘쓸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구분되는 차별을 지속해서 안된다”며 “국가가 한 사람의 삶을 존중한다면 어떻게 하면 누구든 혐오와 배제 없이 살아갈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낙태죄를 폐지하면 임신중단율이 증가하고 여성 건강을 해친다?

    임신 중단을 합법화하게 되면 낙태율이 증가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이는 낙태죄가 임신중단율을 낮추는 데에 실효성이 있다고 보는 셈이다. 그러나 실제 여러 사례와 통계, 조사 등은 낙태죄가 임신중단율을 낮추는 데에 실효성이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1973년 미국은 낙태합법화를 결정한 이후 5년 동안 임신 중단율이 5분의 1로 감소했다.

    보건복지부의 2015년 임신인공중절 국민인식조사에도 조사 대상 여성 중 19.6%가 인공 임신중절을 경험한 바가 있다고 답했다. 이미 많은 여성이 음지에서, 불법적으로, 안전하지 못하게 임신중단 수술을 받거나 검증되지 않은 약 복용으로 임신중단을 선택하고 있다는 뜻이다.

    2016년 5월 세계보건기구(WTO)에서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여성들의 피임 접근성이 떨어지고 상대적으로 가난한 국가일수록 임신 중단율이 높으며, 합법화된 지역보단 금지된 지역에서 임신 중단율이 더 높다고 밝혔다. 낙태죄를 폐지한 국가에선 사회적 책임을 인지하고 상담, 의료, 교육, 사회보장 등 다양한 영역에서 보다 구체적인 변화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낙태죄를 폐지하면 임신 중단율이 높아져 여성의 건강을 해치는 것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는 낙태죄 폐지를 둘러싼 논란 중 가장 근거가 없다. 임신 중단이 법적으로 금지됨에 따라, 수많은 여성이 검증되지 않은 낙태약을 복용하거나 안전하지 못한 수술을 감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새 여성민우회 여성건강팀 활동가는 불법 판매하는 임신중단약을 온라인으로 구매한 사례를 소개했다.

    “수술에 대한 공포가 심했고 법적인 제재를 받아 약을 구매하게 됐다. 포장도 없이 작은 봉투에 몇 알이 들어 있었고 판매자의 말에만 의존해 약을 복용했다. 이후 극심한 출혈과 탈진을 겪다가 이러다가 죽겠다 싶어서 병원에 찾아갔고 결국 수술을 받았다. 지금도 제가 겪어야 했던 죄책감과 통증이 떠오른다. 불법 시술, 약물 때문에 죽을 수 있다는 공포와 죄책감, 책임을 여성은 온전히 혼자 겪어야 한다”

    옷걸이나 초산 등으로 자가 낙태를 시도하거나 시술 후 후유증이 발생해도 다시 병원을 찾아가지 못해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 불법 복제 낙태약 밀반입이 시작됐고 2012년엔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임신 23주째가 돼서야 어머니와 병원을 찾아간 한 10대 여성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낙태 반대 측에선 낙태죄가 낙태를 원하지 않는 여성을 보호할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낙태죄가 여성을 보호할 수 있는 법적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과 달리, 오히려 남성이 여성을 협박하는 도구로 악용되고 있다.

    지난 5월 의정부지법은 이별을 통보한 여자친구에게 앙심을 품고 여자친구와 함께 낙태를 도운 의사를 고발하고 합의금 명목으로 600만원을 뜯어낸 일이 있었다. 낙태한 사실을 세상에 알리겠다고 협박하며 관계유지를 강요하고 금적적인 요구를 하는 사건 등 낙태죄가 오히려 여성을 억압하고 있는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최형숙 대표는 “낙태죄를 폐지가 낙태 강요의 합법화가 아니다. 낙태는 여성의 선택이고 어떠한 강요나 사회의 억압도 있어선 안 된다”며 “준비된 임신이든 아니든 출산은 당사자인 여성이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뒤바뀐 여론…정치권에서도 ‘낙태죄 폐지’ 주장

    2일 tbs 의뢰로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가 전국 19세 이상 성인 남녀를 대상으로 낙태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조사한 결과, ‘폐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응답이 절반을 넘는 51.9%로 나왔다.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응답은 36.2%였다.

    앞서 2010년 2월에 이 기관이 실시한 낙태 허용 여부 조사에서는 낙태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응답이 53.1%로, ‘허용해야 한다’는 응답(33.6%)보다 높았다. 낙태죄에 대한 여론이 완전히 뒤집어진 것이다.

    정치권 일부에서도 낙태죄 폐지 촉구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지난 달 31일 국회에서 의원총회에서 “현행 형법상의 낙태죄는 원치 않는 임신의 책임을 여성에만 전가하는 불평등한 법이며 여성의 몸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전근대적 법률”이라며 낙태죄 폐지를 촉구했다.

    이 대표는 “낙태 처벌은 비과학적인 자가낙태를 증대시키며 이는 여성의 몸에 대한 또 다른 위험이 될 수밖에 없다”며 “낙태죄 폐지가 논쟁적일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잘 알고 있지만, 이런 논쟁은 낙태죄를 폐지한 국가들이 모두 겪었던 일이지만 폐지가 가져올 변화는 논란의 크기를 뛰어 넘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낙태죄 폐지는 원치 않는 임신으로 인한 여성의 공포와 강요된 죄의식을 없앨 것이며 여성에게 더 존엄한 삶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시민사회단체들 역시 “낙태죄를 폐지하고 사회적 책임을 강화해 나가는 것이 모두의 삶을 위해 더 나은 방법이라는 사실은 이미 낙태죄를 폐지한 전 세계의 수많은 사례들이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며 “지금 필요한 것은 여론을 핑계로 공을 떠넘겨 버리는 형식적 공론화가 아니라 정부와 국회의 책임 있는 결정”이라고 촉구했다.

    필자소개
    레디앙 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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