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얼빈 역사기행,
    저 푸른 하늘에도 경계가 있을까?
    [공간사반 2017 여름 만주답사 트래블로그③] 이효석의 〈벽공무한〉과 함께 하는 하얼빈 기행
        2017년 11월 08일 09:11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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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성에 울린 하얼빈 교향악

    시절의 선물로서 하얼빈교향악단의 공연같이 거리에 자자한 파문을 일으킨 것은 없었다. 신문의 선전이 야단스럽고 골목골목에는 포스터가 찬란하게 나부꼈다. … 공연이 성황을 이룬 것이 반드시 향상의 예증은 아닐는지 몰라도 첫날밤 공연의 성황은 사실 특기할만한 초유의 것이었다. 수천의 음악의 팬들이 회장 안에 그득히 모여들어 거리의 교양의 정도를 그 외래의 단체에게 보였음은 통쾌한 일이었다. (이효석의 소설 〈벽공무한〉 중에서).

    1939년 3월 26일 오후 6시, 경성일보 초빙으로 현재 서울특별시의회 건물로 사용되고 있는 부민관에서 러시아인 60여 명으로 구성된 하얼빈교향악단의 연주회가 성대하게 열렸다. 이날 밤 하얼빈교향악단은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과 제5번 교향곡 〈운명〉을 시작으로, 유명 작곡가들의 다양한 곡을 선보였다. 당시 신문에서는 하얼빈교향악단을 만주국이 자랑하는 최고의 예술문화라고 소개하고 있던 만큼, 본격적인 심포니 연주를 경험한 바 없는 경성 시내는 크게 들썩였다.

    〈그림 1〉 『매일신보』 1939년 3월 23일자는 하얼빈교향악단의 사진(왼쪽)과 함께 연주회 프로그램을 소개하였다. 같은 날 연주회 주최자이기도 했던 『경성일보』는 연주회를 앞둔 경성의 분위기를 전하는 한편, 미쓰코시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본점 건물)이 본관 정면에 내건 현수막 사진(오른쪽)을 게재하였다.

    경성에서의 이 작은 소란은 〈메밀꽃 필 무렵〉의 작가 이효석에게 새로운 소설의 모티브를 제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효석은 이듬해 1월부터 7월까지 『매일신보』에 ‘창공’이라는 제목으로 소설을 연재했는데(1941년에 단행본으로 간행할 때 ‘벽공무한(碧空無限)’으로 제목 변경), 그 처음이 바로 하얼빈교향악단 초청을 위해 주인공 천일마가 만주행 열차에 몸을 싣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까닭이다.

    소설 〈벽공무한〉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천일마가 하얼빈에서 만난 백계 러시아 여인 나아자와 서로 사랑을 확인한 후, 함께 경성으로 돌아와 결혼 살림을 준비하기까지의 이야기이다. “국경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생각”인지를 말하고, 피부색에 상관없이 “사람은 다 같이 일반”으로 보인다는 이들 연인의 인터내셔널 러브 스토리는 끝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이란 뜻의 소설 제목, ‘벽공무한’과는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소재이다.

    그러나 소설 속에는 두 사람의 연인 외에도 그들의 주변에서 우연적인 ‘운명’에 농간 당하며 웃고 우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 중에는 진정한 사랑을 좇아 국경을 넘어 상하이로 도주한 연인들도 있었지만, 공연한 짓을 한 것이 아닐까 반성하는 와중에 이국땅과 고향 사이의 경계는 오히려 높아만 갔다. 그렇기에 ‘벽공무한’은 오로지 천일마와 나아자, 이 두 사람에게만 허용된 하늘처럼 보이기도 한다.

    ‘푸른 하늘에도 경계가 있을까?’

    이 간단한 질문과 함께, 끝없는 하늘과 끝없는 땅이 만나는 곳, 만주 기행의 세 번째 장소인 하얼빈으로 떠나보자.

    이등국민의 이등열차 탑승기

    -신경행 열차 개찰 시작-

    와르르 몰리는 사람 속에 섞여 개찰구를 향해들 섰을 때 삼등 대합실의 혼잡한 경우에 비기면 호젓하기 짝없는 편이었다. 계급적인 영달과 사치의 만족이 반드시 일마의 원하는 바는 아니었으나 삼등실과는 다른 그 일 이등 대합실의 실감이 오늘은 별스러이 마음을 파고든다. … 좌석의 푸른 주단이 깨끗하고 허리걸이에 흰 보를 씌운 것만이 차실의 특색이 아니라 손님들의 모양이며 태도도 삼등차실과는 다르게 보인다. 군인이며 관리며 장사치며 여인들이며 멀끔하고 깨끗한 품들이 사회의 윗층에 서 있다는 자랑을 제 스스로들 보이고 있는 셈일까.

    2017년 7월 29일, 다롄에서 오전 9시 11분에 출발하는 고속열차에 탑승했다. 약 1,000km의 거리를 5시간 내에 주파하는 중국 고속열차의 위력이란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다. 그러나 그 위력은 우선 까다로운 검색을 거쳐 어렵사리 역사에 들어선 후에야, 아니 또 탑승객들이 길게 늘어선 개찰구를 통과하고 나서야 비로소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정해진 좌석에 앉아 차표를 보니 이등석이라고 쓰여 있다. 여기에서 이등석이라 함은 특실과 구분되는 일반석을 말하는 것인데, 일찍이 KTX의 특실조차 경험해 본 적 없는 인생으로서 특실의 쾌적함을 운운할 수는 없겠으나, 좌석과 좌석 사이를 자유로이 오가는 아이들의 재잘거림, 끊임없이 울리는 위쳇의 알림벨, 태블릿 PC에서 흘러나오는 드라마 소리에 묻혀 몇 시간을 가다 보면, 그 쾌적함에 대한 절실함이 점차 커져만 가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도리이다.

    〈그림 2〉 다롄에서 하얼빈까지 가는 고속열차 탑승권

    같은 이등석이지만 천일마의 이등석은 특별했다. 당시의 일반석은 삼등석이었으니 이등석은 지금의 비지니스석 쯤에 해당할 것이다. 경성과 하얼빈 사이를 수없이 오갔던 그였으나, 이등석은 그에게도 처음이었다. 그의 눈에 이등석은 고급스런 인테리어보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승객들에 의해 더 유달라 보였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시샘도 잠시, 그는 어느새 그들과 같은 시선에서 낡은 것을 새 것으로 교체하는 “위대한 정리”를 꿈꾸고 있었다.

    이때의 낡음이란 단순히 시간적 오래됨이 아니라, 길거리에서도 서슴지 않고 바지를 내려 용변을 보는 차창 밖 빈민가의 풍경 그것이었다. 사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바뀌는 법이라 했던가. 다만 조금 더 정확히 말한다면, 그 풍경은 바뀌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정리’의 결과라고 해야 옳다.

    일·이·삼등석을 두는 열차의 공간분할 방식은 식민지 현실에서 구현돼야 할 모델로 간주되기도 했다. 1914년의 ‘부제(府制)’ 실시를 앞두고서 어느 재조일본인은 조선인들이 장차 도시 지역인 ‘부’에서 축출될 것임을 기차에 비유하여 설명했다. “경제 기타 사회 각 방면의 우수자는 뜻한 대로 상급에 타면 되지만, 이런 자격이 없는 열패자는 모두 하급의 차실에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통해 사회의 우수자인 일본인과 자격이 없는 조선인 사이는 자연스럽게 구별될 것”이라는 얘기다. 이처럼 우열의 구분은 민족의 차이와 손쉽게 결합되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각 민족은 도시와 시골이라는 차등적 공간으로 배치되고 있던 것이다.

    뒤로 몇 발짝 물러서서 지구 전체를 시야에 넣으면 또 어떤 풍경이 그려질까. 15세기 대항해시대 이래로 유럽 국가들은 유럽의 안과 밖이라는 경계 설정을 통해 ‘문명’을 자처하고 또 독점해 갔다.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문명’의 추종에 힘을 쏟았던 일본은 1894년에 불평등조약 개정에 성공함으로써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그를 기념이나 하려는 듯이 1902년에 창간된 일본의 『국제법잡지』는 국제법은 이제 유럽국제법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인터내셔널이 되었다고 선포하였다. 그러나 이때 ‘문명’은 오직 ‘야만’이라는 외부를 통해서만 증명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은폐되었으며, ‘문명’과 ‘야만’의 경계에선 여전히 양자택일이 강요될 뿐이었다.

    유럽과 비유럽 간의 이 같은 비대칭적 관계를 배경으로, 19세기 후반 동아시아 각국에는 ‘조계(租界)’라는 특수 공간이 설정되었다. 조계의 본래 취지는 무역을 원하는 외국인에게 일정 구역 내에서 거류할 수 있도록 그 편의를 제공한다는 데 있었지만, ‘문명국’은 자국민이 ‘야만국’ 법률에 구속되기를 원치 않았다. 그리하여 조약을 통해 자국민 재판은 자국 영사가 담당케 했으며, 이어서 치안, 세금징수 등 조계 내 행정 전반에 걸쳐 배타적인 권한들을 획득해 갔다. 결과적으로 조계는 ‘나라 안의 나라’라고 하는 치외법권 지대로 확립되었고, 그러한 조계의 경계 위로는 ‘문명’과 ‘야만’, 혹은 도시와 시골의 경계가 중첩되었다.

    〈그림 3〉 하얼빈은 다음과 같이 크게 네 개 구역으로 이루어졌다. ①샹팡은 하얼빈 건설의 초기 베이스캠프 역할을 한 구시가지이다. ②신시가지 난강은 하얼빈의 종교 · 문화 · 행정의 중심지이며, ③다오리는 중앙대가가 위치한 상업중심지이다. 마지막으로 ④다오와이는 철도부속지 밖에 형성된 중국인 거주지역이다(이상 왼쪽 지도 참고). 1907년에 제작된 오른쪽 지도를 보면, ①, ②, ③과 달리 ④의 도로는 도시계획과 무관하게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철도부속지의 안과 밖은 다른 세상이었다.

    하얼빈은 비대칭적 공간분할에 의해 탄생한 도시였다. 1896년 청국 정부와의 비밀조약을 통해 동청철도 부설권을 획득한 러시아는 하얼빈 일대에 광대한 ‘철도부속지’를 설정하였다. 철도부속지는 철도의 건설 및 경영을 위해 철도회사에 인도된 토지를 말하는데, 러시아는 여러 위법 행위를 통해 ‘조계’와 다름없는 치외법권 지대를 형성하였다.

    하얼빈은 분명 “국적과 인종의 진열장”이라고 불릴 만한 혼종적 도시였으나, 그것은 철도부속지만이 아니라 그 경계 바깥의 중국인 시가지도 함께 품은 형태였다. 천일마가 카바레에서 춤추는 “수다한 국적의 수다한 사람들”을 보면서 “잡동사니의 분위기에서 오는 일종의 부조화”를 느낀 것은 사람들의 얼굴과 체격의 차이에서만 기인하는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에 앞서 비대칭적인 사람들 사이의 관계들이 소통의 어려움을 야기했던 것은 아닐까.

    어느새 하얼빈서역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방송이 흘러나온다. 트렁크를 짐칸에서 내린 후 플랫폼에 내려섰다.

    〈그림 4〉 고속열차를 위해 신설된 하얼빈서역(아래 그림)은 하얼빈역(위 그림)의 곡선을 현대적으로 재현해 놓았다.

    다오리구(道里區)

    “그럼 호텔로 가겠단 말인가.”

    “호텔두 이만저만한 호텔인 줄 아나. ‘모데른’에 전보로 방을 예약해 놓았네.”

    “모데른 호텔, 굉장은 하군.”

    … 키타이스카야가에 들어서니 감회는 한층 더하다. 좌우편에 즐비한 퇴물이며 그 속에 왕래하는 사람들이며 거기는 완전히 구라파의 한 귀퉁이다. 외국에 온 듯한 느낌에 일마는 번번이 마음이 뛰노는 것이었다.

    〈그림 5〉 모데른 호텔은 이 거리의 주인은 자신이라는 듯이 중앙대가 한 가운데에 있다. 이 호텔에는 유명 인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315호 객실 문에는 “‘국모’ 송경령 1929년 5월 16일 하얼빈에 와서 이 방에 투숙하다”고 쓰여 있다.

    하얼빈서역에서 곧장 호텔로 향했다. 예약한 곳은 천일마가 머물렀던 모데른 호텔(현 馬疾爾賓館. 모데른(модерн)은 모던이란 뜻의 러시아어). 1906년에 시공하여 1913년에 준공된 모데른 호텔은 하얼빈의 상업중심지인 다오리구(道里區) 중앙대가(中央大街)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중앙대가는 본래 하얼빈 건설 때 중국인 노동자들이 쑹화강(松花江)에서 샹팡(香坊)의 구시가나 난강(南崗)의 신시가로 건축자재를 운반하던 길이다. 그런 연유로 초창기에 ‘키타이스카야’, 곧 러시아어로 ‘중국길’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지만, 후에 하얼빈 제일의 번화가라는 의미에서 현재의 이름을 사용하고 있다. 모데른 호텔은 이 도로 양편에 늘어선 유럽풍의 건물들 중에서도 하얼빈 제일의 품격을 자랑했으며, 그 명성에 걸맞게 유명 인사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았다.

    〈그림 6〉 유럽풍의 건물로 넘쳐나는 중앙대가의 과거와 현재. 대로의 남쪽 입구에는 “건축예술박물관”이라고 쓰여 있는데, 잠시만 이 거리를 걸어보아도 그 이름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러시아인에 의해 건설된 하얼빈에 러시아인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난강 지역에는 주로 동청철도로부터 높은 급료와 고급 주택을 지급 받는 철도종사자들이 거주했던 데 반해, 이곳 중앙대가에는 무역 등을 통해 자산을 모은 유복한 상인들이 자리를 잡았다. 한편 러시아혁명 이후에는 백계 러시아인들이 대량으로 하얼빈에 유입되었다. 백계 러시아인들 중 돈이 많은 이들은 서유럽으로 건너갔지만, 여유가 없는 자들은 시베리아 횡단을 선택해야만 했다. 하얼빈의 백계 러시아인들이 모여든 곳은 다오리의 서남부 나하로프카라는 곳이다. 가난한 자들이 많았던 이곳엔 빈민굴이 형성되었고, 때문에 사람들은 그곳을 범죄 소굴로 여겼다.

     

    〈그림 7〉 국적별 거류 중심지(녹색: 러시아인, 황색: 중국인, 청색: 일본인, 짙은 녹색: 유태인). 굵은 흑색 부분은 키타이스카야, 현재의 중앙대가이다(金鐵權, 「近代ハルビン中心市街地における都市空間の形成に關する硏究」, 와세다대학 박사학위논문, 2003, 100쪽의 지도 「ハルビン內各國人居留圖」(지도 내 설명 포함)를 1938년 제작 「哈爾賓市全圖」 위에 다시 그렸다)

    그런데 백계 러시아인들의 고난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1922년 말 시베리아에서 적군의 승리가 확실시됨에 따라 돌아갈 곳을 잃은 백군과 지방관료,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 중에는 배를 타고 상하이까지 피난한 이들도 있었다. 상하이 조계의 외국인들은 같은 백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수용을 꺼렸다. 그것은 뜻밖에도 난민들이 같은 백인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가난한 백계 러시아인들은 중국인들과 일자리 경쟁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렇게 되면 백인의 명예를 훼손하고 나아가 백인 중심의 지배질서까지 흔들게 될 거라 예상했던 것이다. 삶의 절벽에 선 여성들의 처지는 더욱 어려웠다. 댄서에서 호스티스, 창부에 이르기까지 하얀 피부의 여성들이 제공하는 서비스는 상하이의 ‘신기’한 풍속이 되었다. 결국 백계 러시아 여성들의 비참한 상황은 백인의 체면이 걸린 문제로서 국제연맹이 나서 대책을 세우기도 했다. ‘백인다움’이 백인을 차별하고 또 구제까지 하게 만드는 이 모순적 상황은 경계가 만들어 내는 이율배반의 한 모습일 뿐이다.

    〈그림 8〉 중앙대가의 러시아인들 중에는 유태인이 다수를 차지했다. 유태인들은 중앙대가 서쪽에 사원과 학교 등을 세우고 그 일대에 거주했다(왼쪽과 중앙의 사진은 하얼빈 최고의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는 성 소피아 성당의 과거와 현재, 오른쪽 사진은 하얼빈유태인총회당의 현 모습이다).

    난강구(南崗區)

    다오리구 동남쪽으로는 신시가인 난강구가 위치한다. 하얼빈의 종교 · 문화 · 행정의 중심지인 이곳엔 구 동청철도 본사로 쓰였던 하얼빈철로국이 있다. 천일마가 하얼빈교향악단 초청을 위해 가장 먼저 찾아야 했던 곳도 바로 이곳이다. 하얼빈공업대학 앞의 교화광장에서 난강구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서대직가(西大直街)를 따라 하얼빈역과 마주하고 있는 홍박광장까지 걷다 보면, 하얼빈철로국 외에도 철도와 관련된 다양한 건물들을 만날 수 있다.

    1911년에 준공되어 일찍이 철도구락부로 사용되었던 하얼빈철로박물관을 비롯하여, 철로국 부국장 관저로 쓰이다가 이후 동성특별구 행정장관, 만주철도주식회사 참사 등으로 주인을 바꿔 온 난강박물관이 있으며, 그리고 그 주변에는 철도회사 소속 러시아인 직공들의 주택건물군이 크게 자리잡고 있다.

    러시아가 동청철도(청조 멸망 이후에는 중동철도라 함)를 단독 관리하는 체제는 1917년의 10월 혁명으로 종결되었다. 이후 중동철도의 주권을 둘러싸고 북경정부와 봉천군벌, 일본, 미국, 프랑스, 소련 등이 각축을 벌였는데, 러시아 혁명 후 하얼빈에서 일어난 소요를 계기로 중동철도 회수에 나선 북경정부는 회수한 이권을 유지하기 위해 중동철도의 국제관리를 주장하던 미국이나 일본이 아닌 소련과 손을 잡았다. 소련 입장에서도 중국과의 제휴를 통해 중동철도가 반혁명파의 기지가 되는 일은 막아야 하는 사정이 있었다. 그리하여 1924년에 국교를 회복한 중소 양국은 중동철도의 경영에 있어서 대등 권리를 약속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철도를 둘러싼 분쟁이 이어지는 속에서 양국 관계는 오히려 악화되었고 1929년에는 결국 단교에 이른다. 1931년에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이듬해 괴뢰국인 만주국을 건립하게 되는데, 오랜 협상 끝에 중동철도의 경영권은 1935년 소련으로부터 만주국으로 이양되었다.

    〈그림 9〉 난강구 서대직가에 늘어선 철도 관련 건물들(①하얼빈철로박물관, ②하얼빈철로국, ③난강박물관).

    홍박광장을 지나 반대쪽으로 동대직가(東大直街)를 따라 하얼빈유락원까지 계속해서 가다 보면, 천일마 커플이 거닐었던 소설 속 무대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추림백화점은 외국인 경영의 하얼빈서도 으뜸가는 가게였다. 점원이 전부 외국인인데다가, 특히 금발 벽안의 여점원들의 응대는 그것만으로도 눈을 끌었다. 반드시 한 가지 나라 말만이 쓰이는 것이 아니요, 로서아어도 들리고 영어도 들려서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언어의 혼란을 일으켜 흡사 국제백화점인 감이 있었다. 층층으로 진열된 물품에는 구라파적인 은은한 윤택과 탐탁한 맛이 드러나 보인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요, 천여 년을 두고 쌓아 내려온 굳건한 전통의 빛이 그 어디인지 흐르고 있다. 구라파 문명의 조그만 진열장인 셈이었다.

    단청이 화려한 극락사를 지나서니 묘지의 문이 눈앞에 다다르며 넓은 구내가 짐작된다. 문 앞에는 꽃장사가 양편에 들어서 각색 꽃을 진열하고 조객을 기다리고 있다. 문을 들어서니 정면에 우스펜스카야 사원이 있고, 그 뒤편에 여러 만평으로 짐작되는 나무가 수뿍 들어서 묘지가 연했다. 사원도 묘지도 텅 비어서 흡사 주인 없는 집에 주인 없는 뜰과도 같다. 수십만의 무덤이 각각 그 넓은 뜰의 주인인 것이다. 주인들을 묵묵히 나무그늘 속에 누워 말없는 속에서 뜰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림 10〉 추림백화점의 현재 모습.

    〈그림 11〉 러시아인 묘지는 본래 지금의 하얼빈유락원 내에 위치했으나, 유락원 서문으로 쓰이는 종루를 지나 들어가 보면 러시아인 묘지였음을 알리는 비석만이 그 사실을 전하고 있다.

    다오리구의 중앙대가만은 못하지만 “국적과 인종의 진열장”과 같았던 하얼빈의 여느 거리처럼 난강구의 거리도 국제적인 면모를 뽐낸다.

    천일마는 그러한 하얼빈 거리를 “올 곳에 왔다”고 느낄 정도로 “구라파 취미”를 갖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추림백화점의 진열품을 보고서는 “구라파적인 은은한 윤택”을 느끼고, 또 그 안에서 구라파 문명의 “굳건한 전통”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친구들의 다음 증언을 보면 그의 이상형은 ‘동양적 취미’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던 듯하다. “나아자의 얼굴은 아무리 봐두 동양의 것이거든. 동양의 특징을 가진 순 서양의 얼굴이야. 눈이며 눈썹이며 코며가 온순한 조선의 것이란 말야. 피부가 희구 머리카락이 노랄 뿐이지.” 그런데 소설 속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지만, 친구의 말처럼 동양의 특징에 서양의 얼굴을 지닌 곳이 있다. 그를 보기 위해 다오와이구로 넘어가 보자.

    다오와이구(道外區)

    다오와이구는 본래 푸자뎬(傅家甸)이라 불렸던 곳이다. 이곳은 일찍이 산동성 덕평현 사람인 푸바오산(傅寶善)과 그의 형이 큰 가게를 연 곳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푸(傅)씨 가게가 있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푸자뎬(傅家店)’이라 불렸다. 그러나 이후 양(楊) · 한(韓) · 류(劉) · 신(辛)씨가 정착하여 ‘쓰자쯔(四家子)’라는 마을을 형성하자, 청국 정부는 1905년에 푸자뎬을 중심으로 쓰자쯔를 합병하고, 1908년에는 그 이름도 ‘店’이 너무 협소하다 하여 ‘甸’으로 대신하였다.

    ‘다오와이’라는 호칭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옌(嚴)씨 성의 어느 마차부가 중동철도를 따라가다가 한 가지 사실, 즉 중국인들은 모두 그의 ‘오른쪽(外手)’에 살고 있음을 깨달아 이를 다른 동료들에게 알렸는데, 그 후로 ‘길 오른쪽’이란 의미의 다오와이(道外)가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다오와이’는 1956년에 정식 명칭이 되었다.

    〈그림 12〉 다오와이구는 철도부속지 밖에 해당하기 때문에 행정권도 중국에 속하였다. 1907년에 청국정부는 길림 및 흑룡강성 지역의 철도교섭과 관세징수를 담당하는 행정기구로서 하얼빈관도, 속칭 도대부를 설치하였다. 위 사진은 구 하얼빈관도아문의 현재 모습.

    1910년 이후 다오와이 지역에는 중국의 수공업, 상공업자들이 정우가(靖宇街), 두도가(斗道街) 주변에 모여들었다. 그렇지만 다오리구나 난강구와 달리 다오와이구에는 제대로 된 도시계획이 수립된 적이 없었다. 주요 도로들은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되었고, 그 도로 주변의 상공업 건물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빈민들이 거주하는 협소한 주택들뿐이었다. 계획적인 도시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던 철도부속지 안쪽과 달리 그 바깥에서는 개발 없는 도시화가 진전되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와 같은 곳에서 ‘중화 바로크’라고 하는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새로운 건축 양식이 탄생하였다. 어쩌면 이해 안 되는 것이 당연하다. 왜냐하면 이 건물들은 양식적 고민 위에 지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새로운 건물을 짓는 데 있어서 참고가 된 것은 다오리구나 난강구에 세워진 유럽풍의, 특히나 고전양식의 건물들이었다. 그런데 정작 건물을 지어야 할 중국인 기술자들은 서양건축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다. 그렇기 때문에 대체로 중국식 건축구조는 유지한 채 외양의 모방만이 이루어졌고, 그러한 모방의 반복 속에서 발생한 오해가 결과적으로 ‘중화 바로크’라고 하는 하나의 양식을 낳게 된 셈이다.

    현재의 하얼빈시처럼 그 속에서 ‘중국적인 것’이나 ‘주체성’을 재발견해 낼 수도 있겠지만, 어떤 양식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무국적성이야말로 ‘중화 바로크’의 매력이다. 천일마가 나아자에게 느낀 매력 또한 ‘구라파 취미’나 ‘동양적 취미’가 아닌, 그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그저 아름다움이 아니었을까.

    〈그림 13〉 중화바로크 양식의 건물들이 모여 있는 라오다오와이(老道外).

    벽공무한(碧空無限), 반공유한(反共有限)

    겨울날로서는 드물게 푸른 하늘을 내다보면서 부부는 창에 의지해서 행복의 포화상태에 있었다. 지금 그들에게 더 필요한 것이 또 무엇일 것인가.

    “가이 없는 푸른 하늘…”

    행복도 무한하고 불행도 무한한… 무한한 인생같이도 가이 없는 창공을 바라보며 나아자는 자기 한 몸이 푸르게 물드는 듯도 한 착각을 느꼈다.

    소설 〈벽공무한〉은 위와 같이 마무리된다. 천일마와 나아자는 결혼이라는 신생활의 건설 과정에서 찾아드는 행복감에, 행복으로 가득 찬 끝없는 하늘 속에 뛰어들어 그대로 파랗게 물들려는 것처럼 보인다. 국적과 인종의 다양함과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경계들마저 모두 파랗게 물들여버릴 듯한 이들만의 파란 하늘.

    그러나 이효석이 소설 속에서 지워버린 사실은 또 다른 경계를 말하고 있다. 1939년 하얼빈교향악단의 경성 방문은 단순히 경성 시민들에게 음악의 아름다움을 전파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하얼빈교향악단은 ‘일만방공친선예술사절(日滿防共親善藝術使節)’로 불렸고, 연주단원들은 ‘반공 러시아인’으로 규정됐으며, 연주회는 만주국과 관동군의 알선으로 1개월 넘게 순회공연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하얼빈교향악단의 이동 경로는 결국 제국(과 그 지배영역)의 경계 내부를 반공이라는 한 가지 색깔로 지워 간 것이다.

    누군가 그 색깔을 물어본다면, 천일마 커플이 보았던 하늘처럼 그 또한 국적과 인종의 차이 정도는 개의치 않는 파란색이었다고 답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반공이 그린 하늘은 무한하지 않았다. 연주회 광고 기사가 실린 같은 날짜의 신문 헤드라인이 “진흙탕과 우림을 무릅쓰고 修水河畔의 적을 섬멸”이란 사실이 말해주듯이, 또 그를 위한 731부대의 존재가 증명하듯이, 하늘의 경계와 그 바깥은 잔혹한 세상이었다.

    〈그림 14〉 하얼빈시에서 남쪽으로 1시간이 채 안 걸리는 거리에 생체실험으로 악명 높은 731부대의 옛 터가 있다. 그 자리에는 현재 ‘侵華日本第731部隊罪証陳列館’, 번역하자면 ‘중국을 침략한 일본 제731부대의 범죄 증거 진열관’이 있다. 박물관이란 이름도 아까웠던 모양이다. 1945년 8월 10일, 731부대 본부 대원들은 철수하기에 앞서 건축시설과 실험설비들을 파괴했다. ①은 731부대 본부이며, 황폐화된 모습의 ②, ③은 각각 세균실험실과 보일러실로 이용되던 건물들의 흔적이다.

    천일마는 일련의 사건을 겪은 끝에 하얼빈을 ‘무서운 곳’이라 하였지만, 석양이 내리는 쑹화강변은 그저 아름답기만 하다. 이제 하얼빈이라는 시공간적 일탈의 장소에서 일상이라는 또 다른 하늘 아래로 복귀해야 하는 때, 바로 그러한 때 마음 속에 불현 듯 드는 울적함은 붉게 물들어 가는 쑹화강과 함께 흘려보내고 만다.

    〈그림 15〉 쑹화강 북쪽에는 과거 러시아인들의 휴양지였던 태양도가 있다. 태양도에는 러시아인이 머물던 별장들이 다수 남아 있다(왼쪽 사진). 중앙대가 북쪽 끝에는 1957년의 대홍수 극복을 기념하여 세워진 방홍기념탐이 있다. 그 주변에는 쑹화강 강변을 따라 스탈린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스탈린 공원에서 동편을 바라보면 신구의 두 개 철교가 나란히 강 위에 걸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오른쪽 사진)

    <참고문헌>

    金鐵權, 「近代ハルビン中心市街地における都市空間の形成に關する硏究」, 와세다대학 박사학위논문, 2003

    麻田雅文, 『中東鐵道經營史』, 名古屋大學出版會, 2012

    西澤泰彦, 『圖說 「滿洲」 都市物語』, ふくろうの本, 2006

    中國建築工業出版社, 『哈爾賓印·象』 上, 2005

    David Wolff, 『To the Harbin Station-The Liberal Alternative in Russian Manchuria, 1898-1914』,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9

    James H. Carter, 『Creating a Chinese Harbin-Nationalism in an International City, 1916-1932』, Cornell University Press, 2002

    이효석, 『(eBook)벽공무한』, 교보문고, 2011

    방민호, 「이효석과 하얼빈」 『현대소설연구』 35, 2007

    ※윗글에 인용한 사진 중 현재 사진은 모두 필자가 직접 촬영한 것이고, 과거 사진은 모두 『哈爾賓印·象』 上에서 선별한 것임을 밝혀 둔다.

    필자소개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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