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교개혁 500주년의 의미
    [종교와 사회] 아래로부터의 개혁만이 진정 Protestant 정신을 살린다.
        2017년 11월 03일 02:2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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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오늘(10월 31일) 독일의 마틴 루터 신부는 비텐베르크 성당 문 앞에 당시 부패한 가톨릭교회를 향해 95개의 토론조항을 만들어 붙였다.

    일개 무명의 젊은 신부가 당시 교황과 교권의 하늘같은 권위와 권력이 지배하던 중세시대에 이를 비판하는 항목을 95개나 만들어서 교회 문에 붙였다는 것은 과장된 비유일지는 몰라도, 마치 우리나라 군부독재 시대에 광화문 대문에다가 독재정권을 비판하는 대자보를 붙인 것과 비슷한 경우가 아닐까 생각한다. 죽기를 각오한 행동이었다는 말이다.

    젊은 신부 한 사람의 신념과 용기의 행동은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완성시켰고, 인류사회에 엄청난 변화와 진보를 이루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면서, 역시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은 위대한 소수의 신념과 용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작년 우리나라는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과 부패에 대해 반년 넘게 천만이 넘는 시민들의 촛불 항거를 통해 정부를 바꾸는 쾌거를 이루었는데 이야말로 촛불개혁이라 할 수 있으며,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과 비교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시민의 전체적 참여였다는 점이 종교개혁과 좀 다른 면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사실 1517년 마틴 루터로 촉발된 종교개혁이 절대로 마틴 루터 한 사람으로 인해 비롯되었다거나 한 사람만으로 성공을 이룬 개혁운동은 아니었다.

    당시는 국가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았기에 절대적 정치세력이 없이 주로 영주나 귀족들이 사실상 중심 세력이었지만,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가톨릭교회의 수장인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권력이 서부 유럽을 좌지우지하던 시절이었기에 중세를 크리스텐덤(Christendom), 곧 기독교왕국이라고도 했다.

    따라서 교황의 권위나 교회의 전통에 불순종하는 세력들은 가차 없이 이단으로 몰렸고, 화형과 같은 악랄한 방법으로 사람을 처단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시절이었기에, 루터에 앞서서 개혁과 변혁을 주장하다가 화형을 당하거나 감옥에 갇혔던 사람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대표적인 교회개혁가에는 영국의 존 위클리프와 체코의 얀 후스등이 있었지만 마녀사냥을 당한 이름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어디 이들뿐이겠는가, 당시 서유럽에 거세게 불고 있던 인문주의 운동은 인간의 본질, 인간의 자유이성 정신을 찾자는 것이었는데 이는 그대로 종교개혁의 모토인 “본질로 돌아가자”(Ad Fontes)는 표어와 그대로 연결된다.

    인문주의 운동으로 많은 지식인들과 학자들은 교회에 억눌리고 있었던 참 인간성을 되찾기 위해 종교의 본래적 모습을 추구하며 교회와 대립적 위치에서 갈등을 초래하면서 교회로부터 많은 압력을 받고 있었다. 바야흐로 중세의 교회는 엄청난 자유정신으로부터의 도전에 직면하여 서서히 퇴락하는 길을 걷고 있었으며, 노동자 농민들은 불합리하고 부패한 종교체제하의 사회질서에 더 이상 순종적인 자세만 취하고 있지는 않았다.

    결국 마틴 루터의 교회를 향한 저항은 갑작스런 한 개인의 기존 질서를 향한 일탈적 저항이 아니라 돌이킬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의 무르익음의 열매라고 평가해야 하지 않겠는가. 루터의 용기와 그 학문정신, 진리를 향한 열정, 굽히지 않는 진보정신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지만, 그런 정신의 뒤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은 물론, 역사의 도도한 진보 물결의 도움이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루터는 사실 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결코 가톨릭교회를 떠나 새로운 교회공동체를 만들려고 한 사람은 아니었다. 교회를 분열시켜 프로테스탄트라는 새로운 기독교회를 만들려고 처음부터 작정하고 교권에 도전한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교회가 성서의 본래적 의미를 지키고 따르며, 그 성서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는 교회가 되게 하기 위한 순수한 마음뿐이었다.

    더욱이 그는 오직 영혼의 구원문제에 집착하여 고뇌하며 성서를 연구하고 교회의 신학을 고민하던 신학자요 사제였다. 그래서 그는 로마서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그 어떤 교회의 권위나 전통, 인간의 노력과 의지보다도 신에 대한 “오직 믿음”으로 영혼은 구원을 얻는다는 각성을 부르짖으며 그 믿음에 이르게 하는 성서와 예수에게로 돌아가자고 외쳤다. 면죄부를 사야 구원에 이른다는 둥, 사제를 통해서만이 자유와 해방을 얻는다는 둥, 종교의 체제화에 대해 과감하게 도전했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순수한 도전은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자유와 해방, 저항과 민주정신을 불러 넣어주었고, 그 정신이 토대가 되어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저항)라는 무리가 중심이 되어 중세교회를 변화시켜 정치적, 사회적 변혁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따라서 종교개혁이라는 말은 잘못됐다. 영어로 Reformation 이라고 하는 뜻은 그냥 개혁이라고 해야 하는데 왜, 누가 그 앞에 종교라는 말을 덧붙여 종교개혁이라고 번역했는지 모르겠다. 500년 전의 개혁은 오늘날 시각으로 보면 종교개혁이라 할 수 없고 교회개혁이라 해야 옳다. 당시 서유럽은 종교는 오직 가톨릭이었기에 종교개혁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지금과 같이 다종교 상황에서도 종교개혁이라고 하며 그 역사를 기억한다는 것은 잘못됐다.

    그러나 종교개혁이든 교회개혁이든 500년 전의 일을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이겠는가? 만일 루터가 강조했던 “오직 믿음과 은총과 성서”의 교리를 되뇌면서 그 오직이라는 말을 모든 종교와 사상을 거부하는 배타적 용어로 쓰거나, 오직 교회만이 다시 희망이라고 말한다면 이 또한 우스운 일이 될 것이다. 루터의 외침 자체보다 그 외침의 정신을 더 깊이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 정신은 어쩌면 요새 말로 하면 한마디로 “적폐청산”이 아닐까 생각된다.

    500년 전 서부 유럽의 개혁가들을 통한 유럽 역사의 변혁과정을 통해, 오늘 21세기에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루터는 1525년 당시 억압받던 농민들의 혁명적 개혁운동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심지어 그 농민들을 다 도륙하라는 잔인한 말도 서슴지 않으면서 당시 지배세력이라 할 수 있는 제후나 영주, 귀족들의 편에 서서 농민들의 죽음에 동조했다.

    루터는 교회개혁에는 목소리를 높였지만, 더 중요한 부조리와 억압의 구조에 신음하는 노동자, 농민들을 위한 사회개혁, 정치개혁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걸로 보인다. 21세기 한국교회는 500년 전, 시대적 역사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종교개혁을 무작정 기념하며 찬양하고, 본받자고 목소리를 높일 일이 아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눈으로 다시 해석해야 한다. 다종교의 다문화 상황, 상생을 위한 양보와 타협의 시대, 인간만이 중심이 아닌 생태환경과의 지속가능한 지구촌 등등 오늘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과 적폐들은 다양하며 복잡하고 다면적 측면이 있다. 500년 전의 서부 유럽의 단순한 사회적 현실과는 다르다.

    우리가 배워야 할 500년 전 서부 유럽의 개혁정신은 우선 인간이 인간다운 대접을 받는 사회, 인간이 아닌 모든 동식물, 생태계 전체가 상호 평화롭게 하는 지구촌을 만드는 일, 이런 일들을 향한 깊은 고민과 더불어 해결하려는 연대의 정신이 아니겠는가. 영혼 구원에 집착했던 루터를 넘어서 영혼과 육신, 몸 전체를 해방케 하고 자유롭게 하는 전인적 구원을 위해 종교가 정치가 사회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것이 서부유럽을 변화시켰던 개혁을 이어받는 길이라 할 수 있다.

    단 이 개혁은 루터처럼 약자 농민을 억압하는 권세가들의 힘을 이용한 개혁이 아니라 약자들로부터 시작되는 개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아래로부터의 개혁만이 진정 Protestant 정신을 살릴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오늘 한국교회처럼 사회적 약자인 성소수자들이나 종북주의자들을 향한 공격에 매진하는 것이 개혁으로 착각하는 어리석은 반종교개혁 세력으로 전락하고 말 것 아니겠는가.

    필자소개
    목사. 거창 씨알평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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