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것은 숙의 민주주의가 아니다
    [기고] 신고리 원전 5, 6호기 재건설 문제에 관하여
        2017년 11월 02일 09:2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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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단되었던 신고리 원전 5, 6호기 건설이 재개되었다. 건설 중단에 불안해하고 불만스러워 하던 사람들을 넘어, 정부와 친정부적 성향의 인사들도 이번에 거친 공론의 과정이 숙의민주주의 성과라며 도출된 결론과 과정의 업적을 축하하고 있다. 여기에 언론이 가세하여 숙의민주주의를 찬양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덕분에 절차적 합리성을 거쳐 도달된 합의이므로, 이번에 도출된 합의에 재비판과 재토론을 할 수 없는 기이한 분위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그리고 대통령은 국민의 뜻에 따라 신고리 원전 5, 6호기 재건설을 ‘조속히’ 추진하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찬양 일색인 ‘숙의민주주의’란 무엇일까? 사실 언론이나 정부가 숙의민주주의를 찬양하면서 끌어들이는 숙의민주주의의 주요 요소는 ‘공론장’에서 ‘절차적 합리성’을 거쳐 ‘합의?’(사실 합의가 아닌, ‘다수결’에 불과하다.)에 도달했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숙의민주주의의 완성을 찬양하려면 숙의민주주의의 중대 요소 세 가지를 모두 만족시켜야 하는데, 이번 원전 5, 6호기 재건설의 결정에는 첫 번째 중요한 요소인 절차적 합리성의 요건만 충족했을 뿐이며, 나머지 중요한 숙의민주주의의 두 요소를 아예 간과하거나 깡그리 무시하고 있다.

    숙의민주주의에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요소는 ‘절차적 합리성의 원칙’이다. 언론은 이 절차적 합리성만을 조명하고, 숙의민주주의가 이룬 거대한 성과를 찬양하는 데 모든 에너지를 쏟는다. 일부 대중은 여기에 찬사를 보내며, 자화자찬 격으로 이번 결정을 수용하려 한다. 그런데 정작 이 절차적 합리성은 단순히 1회적인 것으로 충족될 수 있을까? 숙의 민주주의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숙의민주주의를 충족시킬 중요한 요소가 더 남아 있기 때문이다.

    숙의민주주에서 중요한 나머지 한 가지는 ‘개방성의 원칙’이다. 한번 도출된 합의라도 그 합의는 늘 ‘비판에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숙의민주주의는 한 번 공정한 절차에 따라 합의했으면, 이후에는 군말 없이 그 결정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숙의 민주주의는 새롭고 합리적인 비판이 등장하면, 기존의 합의를 폐기하고 다시 숙의의 절차로 들어갈 수 있음을 보장하는 민주주의다. 따라서 신고리 5, 6호기 ‘조속한’ 재개와 숙의 민주주의의 ‘찬양 일색의 분위기’는 민주주의를 가장한 모종의 독재효과를 낼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숙의민주주의의 결정은 다수결이 아니라, 가장 합리적인 의견에 무게를 둔다는 ‘합리성의 원칙’이다. 숙의민주주의에 절차적 합리성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합의된 결론에 담긴 내용의 합리성이다. 그래서 숙의민주주의는 소수의 의견을 저 ‘합리성의 원칙’에 입각하여 존중할 수 있는 장치가 된다. 동시에 숙의 민주주의는 다수의 의견이라도 비합리적이라면 그것을 따르지 않을 권리를 주는 정치다. 숙의 민주주의는 이를 통해 ‘다수의 폭력’을 방지하려는 장치를 장착하려 했던 정치형식이다.

    신고리 원전건설 재개는 숙의민주주의에 필수적인 두 원칙을 아예 무시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세 가지 문제가 생겨났다. 1) ‘합의의 폐쇄성’이다. 절차를 거쳐서 다수가 합의한 것이니, 더 논의할 필요 없이 즉각 신고리 원전 건설을 재개하겠다는 것은 이번에 도출된 합의가 ‘비판에 개방될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는 것이다. 이것은 숙의 민주주의가 아니다. 여전히 합리적인 반론이 남아 있고, 소수의 합리적인 반론이 충분한 근거를 가진 합리적 반론이므로, 통계와 다수결로 결정 난 합의는 여전히 비합리적 합의일 가능성이 있다.

    2) 이번 숙의과정을 통해 도출된 합의가 결국은 ‘비합리적 합의’라는 문제를 노출시켰다. 왜냐하면 의미 있는 오차 범위 밖의 다수결이라 하더라도, 여전히 논의되지 않은 중요한 문제들이 있다는 견해를 일부 언론에서 그리고 일부 전문가들이 표출하고 있다. 그렇다면, 재논의해서 새롭게 제기된 비판과 이의제기를 수용하여, 그 비판과 이의제기 역시 합리적인지 비합리적인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이러한 절차를 무시한 것은 결국 새롭게 제기된 비판의 합리성을 무시한 것이다.

    3) 한 가지 더 중요하게 볼 것은 숙의민주주의는 ‘속도전’이 아니라는 점이다. 프랑스의 폴 비릴리오는 현대를 ‘질주’의 시대 또는 ‘폭주’의 시대로 규정하면서, ‘정지는 곧 죽음이다.’는 주장을 펼친다. 그는 현대를 일종의 속도 파국으로 규정한 셈인데, 이런 파국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은 곧 ‘속도를 결정하는 자’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런 현대의 파국적 양상에 대하여 정지와 중단을 새로운 ‘정치적 대안’으로 제시한다. 물론 숙의민주주의를 그가 찬성하지는 않겠지만, 숙의민주주의 역시 속전속결의 정치가 아니라, 느림의 정치라는 점을 고려할 때, 숙의라는 ‘느림의 정치 미학’은 일종의 정치적 대안이 될 수 있다. 신고리 원전이 왜 숙의민주주의라는 형식을 빌어 ‘짧은 시간’의 논의로 ‘즉각’ 건설이 재개되어야 하며, 왜 그렇게 ‘찬양 일변도의 분위기’를 연출하는지에 대해서 나는 여전히 의문스럽다. 심지어 ‘안전’의 문제를 ‘속도’에 의탁해서도 안 된다.

    짧은 기간의 형식적 공론화 과정, 결정된 공론을 새롭게 비판할 수 없음, 조속한 건설 재개라는 속도전, 결정된 공론과 숙의민주주의에 대한 ‘찬양 일변도의 분위기’ 때문에, 필자는 신고리 원전을 이슈로 진행된 숙의민주주의는 가짜 숙의민주주의이며, 숙의민주주의의 가면을 쓴 숙의 파시즘 또는 숙의 독재라고 주장하고 싶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강조하자. 심지어 정치는 숙의민주주의만 있는 것도 아니다.

    필자소개
    부산 민주시민교육원 나락한알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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