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장양념 황태구이,
    인내를 강권하는 사회
    [밥하는 노동의 기록] 황태의 고생
        2017년 10월 31일 09:29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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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있을 때 명태로 불리는 생선은 곱슬머리 내 동생도 아닌데 별명도 아닌 이름이 여러 개다. 잡는 시기나 방법으로도 이름을 달리 부르고 건조 방법으로도 나누어 부른다. 그냥 말리면 북어, 그보다 더 바짝 말리면 먹태,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여 말리면 황태, 반만 말리면 코다리, 배를 갈라 소금에 절여 말리면 짝태라 한다.

    찬장에 황태 두어 마리를 쟁여두면 요긴하다. 오래 둔다고 상하는 재료가 아니니 더욱 든든하다. 잘게 찢어 무쳐도 되고 적당히 잘라 한나절 양념에 재웠다 굽기도 한다. 잘 자리에 애들이 배가 고프다 하면 그냥 찢어 주고 정성이 돋을 때면 소금과 후추를 뿌려 볶아서 내주기도 한다. 살짝 불려 들기름에 달달 볶다가 더운 물을 보태가며 끓이면 뽀얗게 우러나는데 소뼈를 우려낸 국물과는 다른 녹진한 맛이 있다. 오래 전에 솜씨 좋은 분께 황태 껍질로 만들었다는 어글탕을 얻어먹었던 적이 있는데 모양새나 맛이 참 좋았다. 언젠가는 따라 만들어 보리라 작정하기로만 십오 년쯤 된다.

    눈 쌓인 대관령을 넘어가다 황태 덕장을 보고 잠깐 차에서 내려 가까이 가본 적이 있다. 삭풍이 적당히 기분 좋은 비린내를 실어왔고 좀 더 다가가자 무엇인가가 날아다녔는데 도시 촌년인 나는 날파리인가 싶었으나 알고 보니 황태를 걸어놓은 나무에서 날리는 작은 조각들이었다. 차고 매운 바람 속에 황태를 옮기는 덕장 사람들에겐 꽤 위험하겠다 싶었다.

    황태를 구우며 한 겨울 얼고 녹는 고생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 사회는 유독 고생이란 참는 것이라 믿는다. 어렸을 때 읽었던 위인전은 죄다 ‘000은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로 시작하니, 급기야 내 동생은 한국 위인의 첫 번째 조건이 ‘가난한 농민의 자식’이라 했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속담이 무색하게 사서 하는 고생은 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내가 처음 사서 한 고생은 국민학교 극기훈련이었다. 고작 열 두 살인 인간이 극기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 지 암만해도 모르겠는데 교관들은 계속 ‘이 정도도 참지 못하면서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라며 소리를 질렀다. 중학교에 가자 본격적인 ‘고생 참기와 극복의 서사’가 나를 습격했다. 월경통 때문에 찾아간 양호교사는 ‘이만한 것도 못 참으면 공부를 어떻게 하냐’며 침대를 내주지 않았고 약이라도 달라고 하자 진통제 한 알을 주며 기어이 ‘아플 때마다 약 먹으면 못 쓴다’는 말을 덧붙였다. 추워서 코트를 입으면 ‘이 정도 추위도 못 참으면서 무슨 공부를 한다고’, 더워서 부채질을 하면 ‘이 정도 더위도 못 참으면서 무슨 공부를 한다고’, 매점에서 빵 사먹고 오느라 수업종과 동시에 들어왔을 땐 ‘배고픈 것쯤은 참아야 공부를 하지’ 등등 ‘이 정도는 참아야 00을 하지’의 변주는 지금까지도 끝이 없다. 그 동안 참은 것이 꽤 되는 것 같은데 남들보다는 한참 모자란가, 아니면 참기만 하고 극복을 하지 못해서인가, 나는 별 볼 일 없이 살고 있다.

    그래서 황태를 구우며 나는 언제쯤 사람이 되는가, 그러니까 언제쯤 이 사회는 나를 사람 대접을 해줄까 생각해보는 것이다.

    황태구이, 배추김치, 된장국, 현미옥수수밥.

    필자소개
    독자. 밥하면서 십대 아이 둘을 키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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