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적 대화'는 '노정교섭'이 맞다
    민주노총의 문재인 간담회 불참 비판에 대한 반론
        2017년 10월 31일 09:07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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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민주노총이 문재인 대통령이 초청한 간담회 및 만찬에 불참한 것에 대한 비판들 중 윤효원 씨의 언론 기고에 대한 반론 글이다. 필자는 사회적 대화에 대해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현재 노동계와의 진지한 대화를 가로막는 요인이 정부 측에 있다는 지적을 한다. 이에 대한 이견이나 반론이 있으면 언제든지 레디앙은 게재할 생각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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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노총이 지난 10월 24일 청와대서 예정됐던 문 대통령과의 환담 및 만찬 행사에 불참하면서, ‘사회적 대화’를 시도하려는 문재인 정부의 노력은 일단 벽에 부딪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이처럼 ‘사회적 대화’를 거부한 민주노총에 대한 사회적 압력이 점차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박근혜 정부의 양대 지침을 폐기하는 등 나름대로 노동 친화적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새 정부에 대해, 민주노총이 몇몇 부분적인 ‘실무적인 마찰’을 이유로 행사에 불참한 것은 지나치다는 것이 이유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노동계 일부 인사들과의 만남 모습(방송화면)

    프레시안에 10월 25일자로 실린 윤효원 씨의 <사회적 대화에 관한 민주노총의 세 가지 오류>도 이 같은 여론을 형성하는 데 한 몫 기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윤 씨는 자신의 글에서 민주노총이 사회적 대화는 거부하면서 ‘노정교섭’은 요구한다고 비난하였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노정교섭’이 사회적 대화의 일부임에도 민주노총은 양자를 전혀 다른 별종의 무언가로 생각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민주노총은 내용적으론 사회적 대화를 요구하면서도 형식적으론 사회적 대화를 거부하는 자가당착에 빠졌다고 한다. 사실이 그러한가?

    필자가 그간 발표된 언론기사들을 통해 추측해 볼 때,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 민주노총은 몇 달간의 물밑접촉을 통해 분명 ‘노정대화'(윤효원 씨는 ‘노정교섭’이라고 표현한다)를 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민주노총이 왜 이 같은 ‘노정대화’를 요구했는지를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민주노총의 이 같은 요구는 무엇보다도 ‘노정대화’와 ‘노사정위원회’를 별개의 것으로 구분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간 노사정위원회가 역대 정권에 의해 너무 많이 악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김대중 정권은 당선 후 노사정위원회를 이용해서 노동자들이 김영삼 정권과의 힘겨운 투쟁을 통해 얻어낸 정리해고제의 2년간 유예조차도 ‘즉각 실시’로 바꾸어버렸다. 또 박근혜 정권은 2015년 9월의 노동개악을 정당화시키는 데 노사정위원회를 이용했다. 이렇듯 노사정위원회의 본질은 지난 20년간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으며,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에도,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절에도 동일”하였다. (<노조할 권리는 누가 쥐어주는 게 아닙니다>, 오민규)

    사정이 이러함에도 청와대 측은 민주노총의 요구와 노동계의 정서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노동계와의 첫 번째 만남에서 새로 임명된 문성현 노사정위원장을 배석시키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때문에 거기에는 ‘노사정위원회’를 사실상 기정사실화 시키겠다는 계략이 깔려있다는 민주노총과 노동계 전반의 의구심을 자아낼만한 충분한 소지가 있었다. 예컨대 민주노총이 발표한 입장문에는, 청와대가 “주객을 전도해 1부의 진정성 있는 간담회보다 2부 정치적 이벤트를 위한 만찬행사를 앞세우는 행보”를 했다는 지적이 있다.

    이는 청와대가 준비한 당일의 ‘사회적 대화’라는 것이 사실은 ‘홍문연(鴻門宴)’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초한지에 나오는 ‘홍문연’ 고사는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진나라가 망한 후 항우와 유방 두 사람이 천하를 다툴 무렵, 항우는 유방을 잔치에 초대한다면서 기실은 그를 제거할 함정을 파놓았다. 그 이후 ‘홍문연’은 겉으론 상대방을 환대하는 척 하면서도, 사실은 여러 가지 장애나 함정을 설치하여 정적을 곤궁에 빠트리려는 술수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실제로 정부는 위에서 지적한 문성현 노사정위원장을 참석시키는 외에도, 민주노총의 반대를 무릅쓰고 민주노총 본부의 공식 대표가 아닌 그 산하 ‘산별’들을 개별적으로 초대하는 행동을 하였다. 이는 누가보아도 상대를 동등한 파트너가 아닌 들러리로 세우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원래 이런 자리는 어떻게 첫 ‘모양새’를 꾸리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도 정부는 자신들이 이미 다 꾸며 논 무대에 민주노총은 그저 와서 자리만 채워달라고 한 셈이다. 과연 그간의 역대 정권은 노동자가 그들의 초청에 안심하고 응할 수 있을 만큼 전폭적인 신뢰를 쌓아 온 것일까? 앞서 지적했듯이 문재인 정부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김대중·노무현 정권 하에서 대대적인 구조조정, 그리고 비정규직의 합법화에 노사정위원회가 이용되었다는 사실을 노동자들은 아직도 잘 기억하고 있다.

    사건의 진실은 이렇듯 단순하다. 그럼에도 윤효원 씨는 납득하기 어려운 논리를 가지고 독자들의 판단을 흐트러뜨리려 하고 있다. 예컨대 그의 주장은 국제노동기구(ILO)의 정의에 대한 나름의 해석에 기초하고 있는데, 그가 소개한 ILO의 ‘사회적 대화’에 관한 정의는 이러하다. “노동자와 사용자와 정부 사이의 정보 공유를 포함하여 공통된 이해가 걸린 사안에 관련된 교섭과 협의”가 그것이다. 여기서 ‘사회적’이란 말은 노사정 3자를 뜻하며, ‘대화’는 정보-협의-교섭이라는 세 기둥을 가진다는 것이 윤 씨의 해석이다.

    그런데 그는 이로부터 해괴한 논리를 도출한다. 그가 지적하는 민주노총의 첫 번째 오류는, 민주노총이 요구하는 ‘노정교섭’이란 것이 사회적 대화의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양자를 전혀 다른 별종의 무언가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물론 본 필자가 생각하기에도 교섭은 분명 사회적 대화의 일부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둘의 관계가 윤씨가 주장하듯 반드시 ‘정보교환’과 ‘협의’를 거쳐야만 ‘교섭’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단계적 성격의 것은 아니다.

    각국의 형편에 따라 사회적 대화에 있어 부각되는 측면이 다를 수 있으며, 전체적으로 ‘대화’의 성격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은 결코 선험적인 논리적 판단으로 결정될 문제는 아니며, 한국에서는 그간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노정 간의 대화든 노사정의 형식이든 ‘교섭’의 측면이 가장 중요하였다. 즉 서로 간 힘의 관계가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때문에 반드시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도로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교섭 전술’이 필요하였다. 실제 정부는 금번의 청와대 회담을 사실상 ‘홍문연’으로 만들려 함으로써 그러한 전술을 먼저 사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정부의 그 같은 전술에 말려들길 거부한 민주노총이 여론의 비난을 받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물론 나름의 ‘적폐청산’을 수행하고 있는 문재인 정부 하에서, 어차피 공동의 적을 앞에 두고 장차 어떤 형식이로든 노정 간에 ‘사회적 대화’의 틀이 형성될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노동자들도 보수수구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선 일정 정도 현 정부와 공동보조를 취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협력관계는 상호 간에 존중과 신뢰를 기초로 한 것이어야 한다. 청와대가 지금처럼 앞으로의 노정관계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 ‘기선잡기’를 시도한다면, 이는 매끄럽지 못한 관계를 예고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만약 적폐청산이 급한데 사소한 기선잡기 문제로 서로 시간을 끌 필요가 없다고 민주노총을 비난할 생각이라면, 그 같은 비난의 화살은 고스란히 문재인 정권한테도 돌아갈 수 있다. 왜 애초부터 민주노총을 평등하고 진지한 대화상대로 인정하지 않고 이렇듯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정권 초기의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려 하는가?

    이렇듯 ‘사회적 대화’는 한국에선 객관적으로 팽팽한 기싸움을 수반함에도, 윤 씨가 순진하게도 당사자 간의 무조건 만남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민주노총에게 일단 대화부터 시작하라고 설득하기 위해, 윤 씨는 가장 낮은 수준이지만 그러나 가장 기초적인 사회적 대화는 ‘정보교환’이라고 말한다. 정보교환이 알차게 이뤄지면 이해당사자들이 의견을 주고받는 협의가 튼실하게 되며, 알찬 정보와 튼실한 협의는 제대로 된 교섭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엔 이런 식의 정보교환이라면 다른 방식으로도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보는데, 그럼에도 청와대 회담과 만찬처럼 왜 굳이 공개적이고 대대적인 매스컴의 주시 속에 그 같은 정보교환이 이루어져야 하는지가 궁금해진다.

    그것은 다른 ‘더 큰 목적’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즉 노정이 만난다는 사실 자체가 사회적으로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할 것이며, 이로부터 문재인 정권에 대한 기대는 한껏 높아지고 그들의 현 정국에 대한 주도성은 더욱 강화될 수 있다. 그렇다면 노동자가 반대급부로 얻을 수 있는 대가는 무엇일까? 민주노총과 노동계가 아무런 비용 없이 이 같은 대화에 참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왜냐하면 일단 이 같은 대화의 틀이 성립하면, 그것이 진행되는 동안은 싸움터의 일반규칙에 따라 노동자들은 당면한 투쟁을 잠시 멈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당장 내년 임투가 다가오는 시점에서, 그 같은 규칙이 작동될 경우 어느 세력에게 유리할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때문에 노동자들로서는 충분한 성과를 자신할 수 없는 ‘사회적 대화’에 무조건적으로 참여해서는 안 되며 신중해야 한다.

    윤 씨는 계속해서 민주노총이 정보와 협의의 축적 없이도 효과적인 교섭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두 번째 오류라고 지적한다. 여기서도 윤 씨가 사회적 대화를 단계론(정보-협의-교섭)적 시각으로 접근하는 면모가 잘 드러난다. 그러나 사회적 대화를 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것은 그런 단계를 순서적으로 밟아 나가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사회적 상황과 그간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어떤 측면이 가장 중요한지를 판단하고 미리 대처하는 일이다. 한국의 노동자들은 그간 누차의 경험을 통해 이 같은 ‘사회적 대화’에 임할 때는 반드시 ‘교섭’의 자세로 임해야 한다는 점을 잘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교섭은 분명 투쟁의 일종이다.

    일선의 노동조합은 거의 매년 임금인상과 격년제의 단체협상을 경험하는데, 그 때마다 수차례 회사 측과의 ‘교섭’을 통해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축적한다. 즉 상대의 요구안이 무엇인지, 얼마만큼 진지하게 이쪽의 요구안을 들어줄 의향이 있는지, 우리 쪽은 언제 쯤 얼마만한 강도의 파업을 준비해야 이길 수 있는지, 그리고 그를 위해선 지금 조합원에게 어떤 교육과 심리적 무장을 시켜야하는지 등등이 그 내용이다. 이러한 정보 외에 노동자에게 더 유용한 정보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일까?

    윤 씨는 민주노총의 세 번째 오류로 노사정위원회를 배제해야 사회적 대화가 가능하다고 착각한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이 지점에 이르러 윤 씨의 주장은 결국 정부의 의도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즉 윤효원 씨의 글 전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민주노총은 문재인 정부가 주도하는 ‘노사정위원회’에 들어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이 주장을 위해 노사정위원회의 명예를 회복시키려 시도한다. 노사정위원회가 ‘신자유주의의 도구’로 반노동 정책을 합리화하는 역할을 해왔다는 민주노총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그는 그것을 “현실의 한 부분을 일반화”하는 “관념론적 인식”으로 규정한다. 그는 만약 민주노총이 이런 식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노사정위원회보다 더한 ‘신자유주의의 도구’들인 기획재정부나 산업통상자원부에 대해 폐지를 주장해야 일관성이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우리가 보통 ‘관념론적 인식’이라고 할 때, 그것은 객관현실과 동떨어진 그야말로 주관적인 인식을 지칭한다. 그렇다면 민주노총의 노사정위원회에 대한 비난은 사실이 아니란 말인가? 그간 역대 노사정위원회가 ‘신자유주의의 도구’로 반노동 정책을 합리화하는 역할을 해왔다고 하는 것은 이미 노동계 일반에선 공론화된 얘기다. 왜 이것이 ‘관념론적 인식’이란 말인지 이해할 수 없다. 그 같은 인식은 구체적인 현실경험 속에서, 그것도 수많은 사람들이 정리해고를 당하고 수백일의 외로운 고공농성을 경험한 끝에 노동조합과 조합원들이 얻은 뼈아픈 진실이다.

    만약 윤 씨가 이를 부정하려면 그 반대의 실제적 예를 제시해 보면 된다. 또 기껏 ‘대통령자문기구’에 불과한 노사정위원회와 강력한 집행 권력을 지닌 기획재정부와 산업통상자원부를 동렬 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은 매우 어불성설인 느낌을 준다. 현재 한국의 노동자들은 아직은 힘이 부족하기에 신자유주의 도구인 그들 기구들을 당장 폐지시키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언젠가는 반드시 그 기구들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만약 현 정부가 진정으로 노동자들의 노사정위원회의 참여를 바란다면, 지금처럼 단순히 대통령 자문기구가 아니라 다른 정식 국가기구처럼 명확한 실제 권한을 주고, 또 공정한 내부논의가 가능한 기구로 새롭게 탈바꿈시킬 필요가 있다.

    결국, 지금 문제의 핵심은 ‘노정교섭’의 성격을 분명히 하는 ‘사회적 대화’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이다. 여기서 민주노총이 요구하는 것은 그 같은 성격의 대화가 성립할 수 있기 위한 전제로써 동등한 자격과 공정한 형식의 부여이며, 단순한 ‘대화’ 자체는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누가 관념론자인지, 누가 논리적 모순과 자가 당착에 빠져있는지는 자명하지 않을까?

    필자소개
    북경대 맑스주의학원 법학박사 , 노동교육가, 현재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정책자문위원, 맑스코뮤날레 집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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